경배찬양자료

[스크랩] 성탄절 특별헌금, 없습니다!(저희 교회 이전칼럼 중에 있는 글)

baromi 2006. 12. 12. 13:52

                                 성탄절특별헌금, 없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성탄절’이 없다는 것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태어난 날자가 정확하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느 곳에도 아기 예수의 태어난 것을 기념하라든 지 하는 명령이 없습니다.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태어난 곳을 찾아가서 경배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그런데도 교회에는 성탄절을 지켜왔습니다. 우리도 목자처럼 동방박사처럼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흔히 내세우는 그 성경적 근거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탄생은, 그저 단순한 어떤 역사적 인물의 탄생과는 그 의미를 달리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그 태어나심의 의미는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날이 정확하게 언제이든지 참된 구원의 의미를 체험한 자들이라고 하면, 함부로 그 태어나심의 의미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가 구속주가 되기 위하여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탄’절기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성육’의 시기도 아기 예수가 태어난 싯점이 아니고, (그 신비를 우리가 헤아리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10개월 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몸이 되기 전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기’가 되기 이전에 ‘정자’가 되셨었습니다. 그러니, ‘성육’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현금 매년 12월25일로 그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12월 25일 성탄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날에 예수가 태어났는 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그 태어난 바를 기념하라, 예배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태어나심의 의미를 기억하고 예배한다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어디 성경에 ‘회당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그럼에도 예수는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지 않으셨던가?  기념하고 예배한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이 이방인들의 축제일인 농번제의 12월25일을 오히려 아기 예수의 탄생일로 삼고 그 태어나심을 기념하는 것이 무엇 그리 잘못이더란 말인가?

어쩜 이런 논란은, 생산적인 것이 아니고 소비적인 감정대립으로 끝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현상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이런 논의가 잠잠하기만을 기다리자는 입장도 아닙니다. ‘성탄절’이 너무나 상업주의화되어버렸고, 세속화되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쇄신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무언가 그 의미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중세적인 미신의 의식이 되기 쉽고,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태어나신 그 태어나심을 기념하고자 했던 그 날이 오히려 인류의 타락을 방조하고 촉진시키는데 기여하는 날로 뒤바껴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탄절’을 참으로 성탄절되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신약시대에는 어떤 절기나 의식적인 율법도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기와 의식들의 의미들이 충족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절기와 의식들의 외형적인 준수에 의해서 그 절기와 의식들의 의미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그 절기와 의식들의 의미가 이미 현재화되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을 어느 날 어느 시에 지키지 않아도, 이미 그 유월절의 의미, 곧 죄된 세상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건너 온’ 사건의 의미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체험되어집니다. 이것을 ‘성탄절’에 적용을 시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12월25일만이 아니라 1년365일 하루하루가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매일같이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이것 없이는 12월25일의 ‘성탄절’은 성탄절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아무리 유쾌하게, 아무리 거룩하게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원래 신앙으로 그 의미가 회복된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 많은 것을 강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단 두가지만 강조합니다. 첫째, 2000년 이 세상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그 예수가 , 바로 내 안에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는 것은, 성령의 강권하시는 역사로만 말이맘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분의 말씀 속에서 그 분의 현현을 소망하게 될 때에 그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서, 그 분께서는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7:31-32).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탄절이 여러분에게 자유를 맛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이렇게만 얘기하고 만다면, 구체적인 논의를 구름잡는 얘기로 끝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번째 강조점의 의미를 아주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의 두번째 것을 강조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도 성탄절특별헌금 같은 것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선 이미 몇년 째 강조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해 오면서, 이런 강조의 약점과 강점을 헤아려서 그 공과를 따져볼 때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탄특별헌금없다고 해서 뭐 어쨌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이 ‘있었던 때’보다 더 나았습니까? 영적 유익이 있었습니까? 정말로 이 성탄특별헌금을 없애자던 취지처럼, 그 특별헌금했을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복음을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사용했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 것도 없고, 성탄특별헌금 없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더욱 의식적이고 선진적이라고 자위한다면, 그것은 위선의 길에 우리가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특별헌금하면서 오히려 미신적인 것이, 위선적인 우리들보다 몇 배 더 낫습니다. 그들은 그 특별헌금으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왜 성육하셨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의로 도취될 수 있도록이었습니까? 죄로 인하여 참된 행복에서 소외된 자들(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을 위해서였습니다. 아, 이번 ‘성탄절’에는 진정으로 내 안에 태어나신 예수를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와 함께 그 예수가 만나 보기를 원하는 이들을 만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그 ‘특별헌금’들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