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제가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
>저의 질문을 통하여 참된 구원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하게 들어내고 자 함입니다.
>
>가능하면 주님께서 각인에게 깨닫게 하신바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 해서
>
>진리에 더욱 가까이 하는 바람이며
>
>한편으로는 이근호 목사님의 수준을 따라 가고자하는 자들에게
>
>뭔가 일깨움을 주고자 합니다.
>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질문 : 고린도 후서 3장 6절을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아니하고
>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
>님들께서 깨달은 바를 석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린도 후서 3장1절로 부터 시작하여
>3장 11절까지 흐르는 문맥을 중요시 하면서 석의를 달아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새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라는 말씀에 강조를 두면 더욱 좋겠죠
>
>이상 부탁드리오며 ......... 김 수정 올림 ..............
(답변)
김수정님께서는 세가지 목적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째, “참된 구원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하게 들어내고자”, 둘째, “진리에 더욱 가까이 하”고자, 셋째, “이근호목사님의 수준을 따라 가고자하는 자들에게 뭔가 일깨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고후 3장6절을 석의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석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쉽게 덤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석의”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김수정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됩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또한 원어분석과 지금까지의 역사적 교회가 받아들여왔던 해석들을 참고해야 하고 심지어는 원문비평도 시도되어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지, 세번째 목적(이근호목사의 추종자들과 관련된)을 따라서 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충분히 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인정하고 또한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근호목사의 소위 ‘십자가신학’은 고후3장6절을 난제구절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모든 성도조차도 죄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죽은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고후3장6절에서 말하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구절이 그 신학 속에서는 수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영’과 ‘의문’의 대조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어거스틴 같은 이는, 아주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의 ‘의문’을 단순히 성경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만 아니라, 도덕적 율법(예, “탐하지 말라”)을 인간의 성화되지 않은 자아로서 이루려고 하는 모든 노력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곧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지 않는 모든 인간적 실행과 노력의 대상으로서의 구약율법이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율법이나 도덕적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적 노력이 그 율법을 오히려 악한 것이 되게 하고, 그래서 문자는 죽이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덕적) 율법을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에 의지해서 이루고자 할 때에 그것은 앞서는 죽이던 것이지만, 이제는 살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해서, 인간의 영적 생활을 강조한다는 빌미로, 인간의 내면적 생활이나, 심리주의적 영성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그의 책, The Spirit and the Letter 참고].
똑 같은 (도덕적) 율법이 어떤 경우에는 ‘의문’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영’이 되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요지입니다. 저도 이런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근호목사의 신학이 왜곡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모든 율법에 대한 강조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그렇게 그리스도에게로 촞점을 맞추는 것은 백번 천번 정당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된 자들이 그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실행하는 것을 무시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고후3장9절에서 지금,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재해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원래의 의미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래의 의미가 그러했다고 하는 것은, 김수정님께서 요구하시는 고린도후서3장1절부터 11절까지의 맥락만 아니라, 그 이후의 계속되는 맥락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강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 자천서를 쓰겠느냐고 합니다.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사람들 자신이 바울의 사도됨의 천거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사도의 말은, 고린도교회사람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새사람들이 되었다는 것, 곧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심비 속에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쓰여진 바로 그것이 자신의 천거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하나님의 영에 의한 심비에 그리스도의 편지가 쓰여지는 변화를 불러오는 직분이 바로 “새언약의 직분”이라고 합니다(6절).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바로 의문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을 죽이는 ‘의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살려내는 ‘영’에 의해서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한 보다 더 중요한 맥락은, 3장9절의 앞부분이 아니고, 뒷부분입니다. 더욱이나 김수정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신, 11절 이하입니다. 7-11절에서는 정죄의 직분과 영광의 직분을 비교하고 있지만, 12절 이하에서는 그 영광의 직분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 바울사도가 영광의 직분과 정죄의 직분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죄는 바로 죽이는 것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의문’에 의한 것이지요. 이것에 대조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영’이었습니다. 영에 속한 직분이 바로 ‘영광의 직분’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직분’이며 또한 ‘의의 직분입니다. 살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죄인되었던 인생들이 의인이 되고 거룩한 자들, 곧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 때문에, ‘영의 직분’은 곧 ‘의의 직분’이 되는 셈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한 편으로는 죽이고, 한편으로는 살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없이 역사할 때는 죽이는 것이 되는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역사하게 될 때, 그것은 살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동시에 ‘의문’이면서 또한 ‘영’이 되는 소이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죽이는 의문으로서의 율법을 살리는 영으로서의 율법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내가 율법을 폐하려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완성하려 오셨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율법이 살리는 영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고린도후서3장12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본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석의’하지도 않겠고,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구절과 연관되어서 수많은 논의들이 진행되어왔고, 또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단지, 지금의 ‘우리들’의 논의와 관계해서, 이 구절중에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17절)을 통해서 율법의 의미가 영의 의미를 갖고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많은 논의들을 참고하면서 저는 이 구절의 ‘주’를 구약의 야훼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는 야훼이십니다(요12::41). 하지만, 예수님만 야훼가 아니십니다. 예수의 아버지되신 분도 야훼이십니다. 성령님도 야훼이십니다. 저의 말은,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을 단순히 예수님에게만 돌아간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이근호목사의 소위 ‘십자가신학’과 같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것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으면 곧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일부러 모른채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고,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에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이며 역사적인 교회의 관심이었고, 삼위일체신학의 한 표현이 됩니다. 이근호목사의 신학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바로 고린도후서3장의 후반부구절이야말로 삼위일체신앙의 모판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구약의 야훼(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돌아갈 때에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하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신앙 안에서입니다.
다시 앞의 본론으로 되돌아갑니다. 어떻게 한편으로는 죽이는 율법이 살리는 율법이 되는 것일까요?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벗고 주께로 돌아갔습니다. 수건을 왜 썼었던 것일까요? 율법의 영광의 사라짐을 오히려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13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율법을 주목하지 않고 그 율법의 핵심이고, 그 율법의 주가 되시는 구약의 야훼를 주목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야훼를 온전히 계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그 예수라는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도취해 있고자 함도 아니고, 영적 황홀경에 취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변화된 자로서 계속 변화되어야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하신 목적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산상보훈에서 이미 말씀하셨더랬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사도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대로 볼 것”인데,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1요3:2-3).
조금은 장황한 이런 설명을 드리는 것은, 바로 살리는 영으로서의 율법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되, 그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생기는 감격과 은혜에 근거해서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그 착한 행실에 대해서 자의식을 가짐으로 인하여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거나, 자기자랑을 삼고자 한다거나,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라거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은, 성도의 바라봄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율법의 주에게로 돌아가게 될 때, 자유하게 된 성도들은, 이제 그 자유함으로 방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율법을 행할 수 있게 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이제 죽이는 것이 된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율법은 의문의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으로 인하여, 그 율법을 이전에는 행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이제는 그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에 매여서 종노릇하였지만, 이제는 율법을 종으로 삼아서 주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한다면, 자유한 자가 되었다면, 착한 행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지는 존재로서, 자유케하신 영의 역사를 좇아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은 바로 성도가 착한 행실에 힘을 쓰고, 주의 신령한 율례와 계명들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기차가 철로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의 법을 누리는 것은, 철로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철로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로의 목적이고, 철로의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이라는 철로를 잘못 이해하고 오해했었습니다. 그래서 철로 위에다가 또 다른 길들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 철로 위에 자갈을 깔고 시멘트를 부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그 철로 위에 있던 자갈들, 시멘트를 모두 제거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제대로 달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로 그 철로가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위를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쓰다 보니, 길어진 것 같습니다. 장황한 저의 글이 이근호목사의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양무리/쌀쌀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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