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자료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baromi 2006. 12. 28. 06:46
출처 블로그 > 신학
원본 http://blog.naver.com/pleeq/80018123609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여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는 율법을 은혜 혹은 사랑과 대립적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서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빼어 버리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은혜가 없다" "사랑이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자. 사랑 혹은 은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교회의 부조리가 덮어지고 있는가?  반대로 두 번째의 경우의 사람들은 율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오용한다. 사실, 법이란 귀에 걸면 귀 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가 많다. 그것은 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 본문에서 주제는 이혼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던졌다. 바리새인들이 누군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정답을 갖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것이다.  자, 어떤 신자가 이혼을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큰 질문이 생긴다. 1. 이혼을 해도 되는가? 2. 어떤 경우에 이혼을 할 수 있는가?  

참된 신자라면 당연히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신자들은 이미 자신의 답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신자들은 성경과는 상관없이 이미 답을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하는 성경구절을 찾고자 한다. 즉,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이혼을 이미 결심한 상태에서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찾는다. 이런 태도가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의 태도이다. 바리새인들의 본질적 죄는 성경을 자기 취향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죄는 성도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죄이다. 특히 목사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보다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성경밖에 없었다. 구약성경에서 이혼에 대해서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보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을 언급하였고,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을 언급하였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옹호하였다. 문제는 이혼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이혼이 가능한가였다. 그들은 신명기에 근거하여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된 경우 이혼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들 중의 논란은 주로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가?"에 치중되었다. 불행하게도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정확하고도 자세한 규정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해석은 인간에게 맡겨지게 되고, 그 결과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어떤 유대파 중에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요리를 태우는 것도 이혼 사유에 해당하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인간의 창조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이혼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자,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동일한 성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혼에 관한한 구약성경은 정말 상충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권위를 갖는가?  

물론 성경 안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신명기를 보자. 여기에서 한글 성경은 치명적인 번역의 실수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글 성경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 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와 이혼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원문에 따르면, 1-3절까지 모두가 조건절이고 4절만 명령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다. "사람이 아래를 취하여 . . .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고} (1절)," "그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고 나서} (2절),"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 . . 후부가 {죽었다고 하자} (3절),"  이 경우에는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4절).  즉, 1-3절 모두가 가정에 연결되는 말이다.  모세가 명령한 것은 오직 4절 뿐이다. 즉 1, 2, 3절의 경우가 생긴다면, 4절에 따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1-3절에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에 대하여 어떠한 판결도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최대치는 신명기가 이혼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면, 신명기 24장 1절은 결코 이혼을 명하거나 이혼을 지지하는 구절이 아니다. 24장의 1절은 그 당시 일어나는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신명기는 이혼의 가능성과 당위성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바로 서술(indicative)를 오용하여서 명령(imperative)로 교묘하게 바꾸어 버린 것이다. 사실, 일반 성도들은 그냥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그 말씀이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명백한 말씀으로 오해할 수 있다.

반대로 창세기 2장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게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좀 더 자세히 이 구절을 보자. 이 구절은 누가 "실제로" 한 말인가?  놀랍게도 아담이 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바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이다.  모세가 남녀의 창조를 서술하고나서 마지막으로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율법적 선언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적 선언에 호소하여 이혼 문제에 대해서 정리를 하신 것이다.

즉,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찾으려거든 신명기 24장이 아니라 창세기 2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을 가르쳐 주셨다. 율법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십계명을 떠 올린다. 하지만,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키기도 하고 특별히 모세 5경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예수님께는 신명기도 율법이지만, 창세기도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 율법에 호소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정당화시켰다. 결국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과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은 내용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율법의 사용에 있어서 큰 대비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무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순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혼과 관련하여 더욱 그러하다. 이혼은 어쩔 수 없다는 가정하에 성경을 접근하기 시작하면, 성경 속에서 이혼을 정당화하는 듯한 구절들만 우리 눈에 들어 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