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길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준님의 꽈배기처럼 꼬아놓은 글을 읽으시고 나름대로 정리해 주신 글을 보고는 그가 어떻게 꼬아두었는지를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 저의 비평을 다음과 같이 올리겠습니다. 그곳에 퍼가셔서 말씀에 대한 왜곡이 더 이상 없도록 힘써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먼저, 주길님께서는 이준님의 글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셨습니다: “이준의 요점은 3장 9절은 요한일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습관적인 죄를 짓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개인의 (삶 속의 이런저런 범죄) 행위(의 습관성)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로서 났느냐 아니냐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가 아니라 간주될 수 있다는 뜻,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인해 죄짓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그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옳은 구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논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길님이 이준님의 글을 욧점정리하신 것을 보면, 이준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가 아니라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잘 요약하였지만, 이준님의 또 다른 견해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빠뜨려 놓았습니다. 이준님의 이것에 대한 견해를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 요일
다시 한 번 이것을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이준님은 지금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하면서(이런 구분은 참으로 정당합니다!),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범하지 않”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범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렇다면, 현재, 이준님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일까요? 특별히 이준님이 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어’정리부터 좀 해야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습관’이란 단어는, ‘버릇’이라고만 하고 자세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어, 혹은 헬라어문법에 있어서 ‘습관’이라는 단어는 아주 특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영어로 It rains. 라고 하면 현재삼인칭단수 직설법현재능동형이 됩니다. 여기서 직설법현재능동이라는 문법적 요소는 이 rains라는 동사가 현재의 지속적인 상태나 습관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때의 습관은 ‘버릇’이라는 말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한글사전의 습관이란 단어를 ‘버릇’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그 설명이 완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습관이란 단어는 단순히 ‘버릇’이라고만 이해되어서는 안될 어떤 사물의 “지속성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가 온다’(It rains)는 것은, “지금 현재 비가 오고 있다”는 현재의 지속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it(상태를 나타내는 가주어)의 지속적 상태로서의 습관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 dog barks라는 문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개가 짖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짓고 있습니다. 이 지속적으로 짓고 있는 상태를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의 지속적인 상태로서의 습관을 지금 barks라는 동사형태가 기술하고 있다고 해서 그 개가 ‘버릇’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 문법적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문법적 용어로서의 ‘습관’이라는 말은, 한글의 ‘버릇’이라는 의미를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지속적 경향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영어문법상의 ‘직설현재능동’의 의미는, 헬라어문법에도 적용됩니다. 곧 헬라어의 지금 현재 논의되고 있는 ‘포이에이’라는 ‘직설현재능동’의 문법적 의미는, “현재 지금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3장9절의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현재 지금 지속적으로 죄를 행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한다면, 이 죄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자’는 제외됩니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현재 지금 사망에 이르는 죄를 행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이점에 있어서 이준님과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위의 요한1서3장9절에 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라는 말을 넣어 봅시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전혀 행하지 않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난 자들이 때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변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죄란 과녁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못미쳐도 죄이고, 지나쳐도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 하면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여러가지 도구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첫째는 이 말씀을 기록케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 해석에 대해서 귀기울이는 것은 전통의 숭배가 아니라, 신앙선배들과의 성도의 교제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역사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에 그 기록된 말씀의 문맥과 단어가 구성되어 있는 문법적 요소에 귀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법이란 일종의 지침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 영감을 허락하셔서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할 때에, 기계적으로 받아적으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물론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 종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문화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 종들 속에 있는 사고와 감정과 인식구조들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그것들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문법적 구조 속에서 표현되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66권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각권의 문체와 스타일과 문법들이 그 기록한 자들의 지식과 경험과 체험의 형태와 질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이런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기록된 말씀의 의미가 아주 풍성해 집니다.
그런데, 이준님은, 헬라어문법에 대한 언급을 두고는, ‘포크와 나이프’인 양 말합니다. 자기의 무식을 ‘김치’로 위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해석을 ‘손으로 쭉쭉 찢어서 먹는 것’이 제맛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제맛대로 해석하는 것을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쭉쭉 찢어서’ 제맛대로 해석해 버리고 있으면서 ‘어설픈 나이프질이 주변인들까지 망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시도 때도 없이 나이프질에 의존하려는 자체적 사고방식도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의 1차수신언어인 헬라어나 히브리어에 대한 언급을 ‘서양식 나이프’라고 보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자신이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대해서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 배움의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헬라어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고 자신의 헬라어실력이 뾰룡나니깐 이제는 그 헬라어에 대한 언급을 두고는 ‘나이프질’이라고 곡해시키고 있습니다. 참으로 못된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이럴 때의 ‘습관’을 ‘버릇’ 혹은 ‘버르장머리’라고도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 좀 더 비평하겠습니다.
주길님이 요약한 이준님의 글에 의하면,두가지를 먼저 부정합니다. 첫째, “3장9절은 요한일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습관적인 죄를 짓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3장9절의)…’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 표현만 하더라도 개인의 (삶 속의 이런저런 범죄) 행위(의 습관성)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로서 났느냐 아니냐라는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두가지 부정은 이준님이 얼마나 적반하장식의 비판을
그런데 지금 그들 중의 한 명인 이준님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 구절을 마치
말이 나온 김에 이 점에 대해서 한 마디 더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새로운 습관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갖게 된 습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염소의 습관만 가지고 있던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양이 되어서 양이 지니고 있는 습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새로운 습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옛습관을 한편으로는(in a sense) 청산했으면서도 완전히(completely and comprehensively)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청산은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청산되었지만,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already but not yet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된 상태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때로는” 지을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는 짓지 않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은혜이고, 성령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아직도 자신 안에 역사하는 옛습관을 완전히 청산해서 간혹 짓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조차도 완전히 짓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할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성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이미 성도가 된 에베소교회교인들에게 권하기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옛습관!)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새사람을 입으라”(엡4:22-23)고 합니다. 이런 바울사도의 권면을 전통적으로 받아온 서양문화에서는 여기서 입으라고 하는 ‘옷’의 비유를 따라서 ‘옷’을 habit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수녀들이 입는 옷을 habit이라고 합니다. 어떤 영화제목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
하나님에게 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옛습관이 지배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금 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3:9이 성도들에게 이런 옛습관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옛습관이 성도들에게 아직 남아있을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런 포이에이의 문법적 요소를 ‘현재직설능동’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3장9절이 이준님이 첫째로 부정하고 있는 “성도의 습관적인 죄를 짓는 상태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러면, 그가 긍정하고 있는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제가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 지적하겠습니다. 첫째는, “(요한일서3장9절은)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가 아니라 간주될 수 있다”, 둘째,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인해 죄짓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긍정을 그는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라는 말로 앞의 것을 다시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앞서서 구분했던 것처럼, 죄라고 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준님은 첫번째 긍정부분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언급하면서도 둘째 긍정부분에서는 그냥 ‘죄’라고만 말합니다. 첫번째 긍정부분을 올바르게 해놓고는 최종결론은 엉뚱하게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긍정부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가 아니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 말을 “다시 말해” 보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려고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그냥 “죄”로만 “다시 말해” 버림으로 인해서, 그 “죄” 속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구분해 놓고, 그 구분을 최종 결론에 적용시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말에 자기가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준님의 말이 옳다면, 그의 말을 따라서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죄’는 짓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전제합니다. 이런 죄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더라도(에베소교인들처럼!), ‘구습’을 가지고 있어서, 아직 새사람으로 ‘완전히’ 입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미 암묵적으로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무나도 조화가 됩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분깨서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ㄷ, 이 성경을 말한다면서 꽈배기처럼 꼬아서 읽기조차 곤란하게 쓴 이준님의 글을 보면서, 어떤 분이 표현한 것처럼 읽기조차 짜증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이번까지는 이준님의 글에 대해서 비평을 하지만, 다음부터는 너무 이준님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서 막말로 쓰레기같다고 한 그 말을 그대로 그의 글에 적용해서 쓰레기 같은 이런 글 퍼오지 않기를 당부해 봅니다.
이준님이 자기글에 붙여둔 제목과 관계해서 한 마디만 하고 글을 맺습니다. 그는 “무지로 인해 제자리걸음만 일삼는 아담들의 상상력”라는 제목을 붙여두었습니다. 이 제목은
이준님의 글의 제목에서조차 곡해함이 들어있습니다.
“성도된 아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자라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라지 않으면 책망받을 것입니다.
이준님이 이런 책망받는 일에 앞장서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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