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스크랩] 곤잘레스: 중세교회사(254- )

baromi 2006. 10. 31. 12:05

p.254. 중세말,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도중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교회의 후대 역사에 막대한 결과를 야기시킬 확장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발생하였던 중요한 사건들에 사로잡힌 프로테스탄트특의 교회사가들은 바로 이 기간이 로마카톨릭이 가장 급격한 성장을 누렸던 시기임을 망각하곤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많은 카톨릭의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이다.

 

p.296. 사비에르 및 그의 동료선교사들은 유럽문화와 기독교신앙을 명백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례를 받은 개종자들에게는 '기독교식'이름, 즉 포르투칼식 이름들이 주어졌으며, 서구식 의복을 입을 것이 권장되었다. 실제로 많은 개종자들은 자기들이 세례를 받을 때 포르투칼 왕의 신민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들 때문에 이들 선교사들이 방문하였던 여러 나라들의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은 기독교자체를 외국의영향으로 간주하였다. 즉 기독교야말로 전통문화와 기존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라는 견해였다.

  그는 비록 포르투칼의 보호 아래 있었으나 출생은 대부분 이탈리아였던 젊은 세대의 제수잇들은 이러한 기독교와 포르투칼 정부 및 문화와의 유착 내지는 동일화에 의문을 던졌다. 이에 따라 그들은 복음의 교훈과 설교를 전통적 동양문화에 적응하거나 혹은 '타협'시킬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젊은 세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베르토 디 노빌리(Roberto di Nobili)와 마테오 릿치(Mateo Ricci)이다. 마테오 리치는 인도와 중국에 간 최초의 선교사였다.

 

p.그(노빌리)는 신실한 힌두교도들처럼 채식을 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고위 카스트출신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이 회심하게 되자, 이들만을 위한 교회를 따로 세우고는 하위 카스트 출신들은 이곳에의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노빌리는 비록 카스트제도가 악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문화적 범주에 속한 것으로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러한 행동들을 정당화하였다. 힌두인들의 문화를 존경하고 카스트제도가 정한 범주들조차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일단 수행된다면, 하위 카스트출신들은 고위 카스트출신들의 본을 받아 한 번에 다 개종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p.300. 노빌리의 경우처럼, 리치의 방법도 다른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런데 이 경우의 문제는 카스트제도가 아니라 조상숭배와 유교였다. 제수잇들은 우선 유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는 아니며,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또한 조상숭배가 진정한 의미의 예배는 아니며 오히려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사회적 관습에 불괗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주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과 프란치스코 수도사들로 이루어진 반대파에서는 조상숭배가 실제로 우상숭배의 성격을 띤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어떤 중국어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 문제가 로마에까지 전달되었으며, 교황이 이를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중국황제는 크게 분노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야만인이 감히 중국인들에게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해 주는 것은 건방진 작태라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의 복음의 적응문제가 주로 문화적 분야에 관한 것이었는데 반해, 인도에서는 인간의 불의와 억압에 대한 일체의 심판이 없는 설교가 과연 복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즉 카스트제도를 인정하는 기독교신앙이 진정 기독교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와 이와 유사한 또 다른 문제들이 그후 기독교역사에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