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스크랩] 곤잘레스: 중세교회사(121- )

baromi 2006. 10. 31. 12:04

Justo L Conzalez, 중세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은성출판사, 19995.

 

빌려온 책인데, 빨리 돌려줘야겠다. 책도 짐이 된다.

 

p.120. "우리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악한 짓도 하지 않았다. 모조리 창으로 찔러 죽였을 뿐이다."

 

1차십자군운동때에 병사들이 투르크 진영의 여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면 그 경건을 자랑하면서 한 말.

 

p.120. 모하메드의 딸 파티마(Fatima).

 

포루투칼에 마리아가 현현하였다고 해서 성지가 된 곳이 파티마이다. 왜 하필이면 파티마였을까? 로마천주교회가 파티마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그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p.122. 제2차 십자군 원정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1144년 알레포(Aleppo)의 술탄에 의한 에데사의 함락이었다. 또 다시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가들은 일반 신자들의 성지 탈환을 촉구하였다. 또한 어떤 이들은 원정 도 중 유대인들도 진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의 설교는 이들과 매우 달랐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구원을 위한 정규군의 조직을 촉구하였으며,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것을 주장하는 감정적 설교가들을 반박하였다.

 

p.125. 기독교적 스페인의 통일에 있어서는 성 야고보(St.James)의 무덤 '발견'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이곳은 서부 유럽 전역으로부터 기독교신자들이 모여드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으므로, 산티아고(Santiago), 즉 성 야고보의 성지에 이르는 도로는 북부 스페인을 기타 서방 기독교권과 계속적 접촉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결국 성 야고보는 모슬렘들에 대항한 투쟁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aigo Matamoros) 즉 무어인들의 살해자 성 야고보라는 명칭이 성립하게 되었다.

 

p.126. 서부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과 스페인 재정복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군 원정은 또한 기독교의  경건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지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신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에 보다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들은 특히 예수님의 인성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케 했던 설교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역시 예수님의 인성을 깊히 명상하였던 신비주의자였다.

  십자가 고난의 세부적 상황에 관한 시들과 저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인들의 유물들, 이빨들 등 소위 성 유물들(relics)이 유럽으로 들으옴에 따라 성유물 숭배 역시 가열되었다.....군사적 수도회의 설립에 따라 수도원의 이상도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십자군 정신은 또한 이단들에 대한 대항에서도 나타난다. 남부 프랑스 및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고대 교회에 존재하였던 마니교와 비슷한 교리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아마 오래전부터 마니교적 이원론을 신봉하였던 '보고밀파'(Bogomils)가 존재하였던 불가리아나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또한 '카타리파'(cathars: 이는 '순수'를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다), 혹은 특히 남부 프랑스의 알비(Albi)에서 번성하였으므로 '알비파'(Albigensians) 등으로 불렸다. 인노센트 3세는 이들에 대항한 전투를 소집하였으며, 1209년에는 북부 프랑스의 야심에 찬 귀족들이 남부에 침입하였다.....

  그런데 특히 신학분야에서 볼 때, 모슬렘과의 새로운 접촉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 왔다. 모슬렘평 스페인과 이보다는 그 정도가 떨어지지만 모슬렘령 시실리 등은 학문의 중심지들이었다. 중세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철학자와 모슬렘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와 아베로에스(Averroes) 등은 모두 코르도바 출신이다. 이들과 그 동료들은 고대철학을 부활시켜 이를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신학적 문제들에 접목시켰다. 특히 아베로에스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관하여 방대한 주석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주석가'(Commentator)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스페인고 시실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과 아울러 이들 철학자들의 작품들이 서부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그후 13세기에 들어서 철학과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유럽에 발생하였던 경제적, 인구적 변화와 십자군 원정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십자군 원정들이 이러한 변화들을 가져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명백하지만 또 다른 요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아직도 이들의 상대적 중요성의 순위에 관하여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어째튼 십자군 원정 시대에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통상과 교역이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부의 원천들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들이 성장하였으며 도시 내에 새로운 계급, 즉 브르조아(bourgeoisie)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래 '도시에 사는 자들'이라는 의미였던 브루조아는 주로 당시 점차 경제 및 정치력을 행사하였던 고위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결국 이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실과 귀족들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p.132. 도시들, 교역, 그리고 화폐경제의 발전은 이에 따른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화폐경제는 보다 전문화된 생산을 통하여 부의 집중을 야기시킴으로써 상업거래를 비인간화시켰다. 이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발생한 인구이동으로 말미암아 전통적 교구목회는 도시를 향해 모여든 인구이동으로 말미암아 전통적 교구목회는 도시를 향해 모여든 인구들의종교적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수 세기를 두고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왔던 수도원운동이 이와 같은 화폐경제의 약점에 대응하여 인구이동에 대처했던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곧 '탁발수도사들'(mendicants)로서 그 의미를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경제구조의 변화와 수도원운동의 적응에 대해서 좀 더 깊이 탐구하라.

 

p.133. "왜 그렇게 기뻐하고 있지?" "결혼했기 때문이지." "누구와 결혼했는데?" "빈곤이라는 귀부인!"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대답하였다.

 

p.134.그러나 그는 이제 가난과 설교를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즉 그는 곧 자기가 처할 곳이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고독의 장소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법석대는 시중으로 들어가 이들을 교훈하고 빈자와 병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그의 자발적 가난은 단지 스스로를 위한 극기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주위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된 자들과의 동일성을 통한 연결을 이룩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p.135. "시편을 가지게 되면 곧 일과기도서(Breviary)를 갖고 싶어지게 된다. 일과기도서를 갖게 되면 마치 고위 성직자처럼 강단에 올라서고 싶어지는 것이다."

 

성경을 갖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경계할 정도였다면, 그 당시의 필기복사여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중세의 성경에 대한 무지가 이런 염려로 인해서 가속화 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 보라. 위의 말은 신입수도사가 시편을 가지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것인가 물었을 때에 프란시스가 응답했다는 말.

 

p.137. 이단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무력보다 더 효력있는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였던 도미니크는 정통신앙의 설교와 교훈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와 동시에 엄격한 수도생활과 이단에 대항한 최선의 이론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성있는 학문의 탐구를 첨가시켰다.

 

p.138. 도미니크 수도회는 처음부터 가난을 단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했을 뿐이었다. 이들의 주요 목표와 목적은 설교, 교훈, 교육, 그리고 신학의 탐구였다. 가난은 이러한 목적들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수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상황의 변화와 함께 수도회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이들은 저항없이 그렇게 하였으며, 탁발에 의한 생활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당시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여러 대학교에 교수진들로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p.139. 프란치스코는 항상 외방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219년에는 직접 이집트에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외방선교의 관심이 식게 되었을까?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당시에 선교의 관심이 적었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견해일까?

 

p.140.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수도원 내에 두 파가 생기게 되었다. 엄수파(Rigorists)들은 창립자의 지시에 절대 순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온건파(Moderates)들은 상황의 변화가 규율의 문자적 해석과 적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수도회는 이제 그 사명의 수행을 위해 선물로 주어진 재산을 감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1230년 그레고리9세는 프란치스코의 유언이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수도회는 이제 가난에 관한 규칙을 개정시켜 주도록 로마에 요청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245년부터 교황청이 재산의 소유권을 갖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사용권을 보유한다는 형식으로 재산을 소유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형식마저도 포기하고, 수도회는 막대한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소유하기 시작하였다.

 

p.140-141.요아힘(Joachim of Fiore)은 역사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곧 성부시대, 성자시대,그리고 성령시대이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첫째시대는 42세대 동안 계속된다. 하나님은 질서와 균형을 좋아하시므로 성자 시대 역시 같은 숫자의 세대로 이루어진다고 요아킴은 주장하였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게산하였던 요아킴은 1260년에 성자시대가 끝나고 성령시대가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성자시대에 다른 신자들보다 더 영적인 수도사들이야말로 성령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1260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일부 엄수파 프란치스칸들이 교회의 기존계급제도로부터 이탈하여 요아힘의 주장을 수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당시의 어려움들이 새로운 시대의 여몀을 불러 오기 위한 마지막 고난이라 생각하였다. 즉 새롱누 시대에 들어서면 이들의 입장은 비로서 정당한 것으로 밝혀지리라는 주장이었다. 한편 교황과 기타 교회지도자들은 보다 낮은 계층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자들로서 성령시대에는 이들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성령파'(Spirituals)라 불렀던 이들 프란치스칸들은 피오르으 요아힘의 이론들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차기 수장이었던 성 보나벤투라(St.Bonaventura)는 심오한 경건성과 계급제도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동시에 주장하였으므로, "성령파"들은 그 기세를 잃게 되었다. 이와 동일한 사상이 14세기경 '프락티첼레'(Fraticelli)-이탈리아어로 '작은 형제들'이라는 의미 - 사이에서 출현하였으나 가차없는 탄압 속에서 곧 사라지게 되었다.

 

p.149. 12세기경 신학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성당부속학당들은 13세기에 들어서서 대학교들로 대체되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는 도시들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신학은 인구중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소재한 수도사들로부터 교회와 주교들과 연관된 성당부속학당들로 옮겨졌다. 성당들은 물론 대부분이 도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후에는 중요한 대도시에 모인 학자들의 집결지라 할 수 있었던 대학교가 그 무대가 되었다.

 

p.155. 신학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먼저 수년간 철학과 인문계통학문들을 공부해야 했다. 그후에야 비로소 신학에 입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시작하여 점차 '성경학사', '문장학사'(bachelors on the sentences), '기성학사'(formed bachelors), '인허석사' 그리고 '박사' 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14세기에는 인문계학문을 마친 후에도 14년이 걸려야 이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p.156-158. 스콜라신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유럽에의 재도입이었다....파리대학교의 몇몇 인문학 교수들은 이 새로운 철학사상들을 기꺼이 포용하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주석가 아베로에스의 관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으므로 흔히 '라틴 아베로에스 학파'(Latin Averroists)라고 불린다....아베로에스 학파는 이성의 길은 그 궁극적 종착점까지 추구되어야 하며, 설혹 그 결론들이 신학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신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주장했다....일부신학자들은 전통적 플라톤주의 혹은 어거스틴주의적 이론들을 재확인함으로써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였다. 예를 들어 13세기의 가장 유명한 프란치스칸 신학자인 보나벤투라는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아베로에스 학파와 전통적 어거스틴 신학사이에는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이는 곧 이 새로운 철학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위대한 학자인 대 알베르트(Albert the Great)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바로 이 길을 선택하였다.

 

p.161. 이러한 이론들을 안셀름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안셀름은 감각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 세상의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관념 자체를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토마스의 이론은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좇는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자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과 안셀름의 플라톤주의적 관점이 대조를 이루는 가장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안셀름은 순수한 관념의 영역 속에서 진정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반해, 토마스는 감각이야말로 지식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였다.

 

p.162. 플라톤주의 역시 그 자체의 위험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플라톤주의적 용어로 해석함으로써 성경에 의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물인 현세의 가치를 과소 평가하였다. 또한 플라톤주의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하는 일시적 실재(temporal realities)보다는 불변의 진리에 관심과 흥미를 쏟았으므로 성육신의 사건, 육체를 가진 인간 속에 존재하셨던 하나님 등은 오히려 변두리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인물로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서만 신학자들이 파악하게 될 위험성도 내재하였다.

  새로운 철학의 발흥은 전통적 신학의 많은 부분을 위협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에 반동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및 이를 추종하는 이론들의 독서와 교수가 금지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또한 정죄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 가운데는 토마스에 의해 수용되었던 주장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의 신학이 교회에서 인정하는 신학적 체계의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상당한 저항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 가치가 인정되었으며, 토마스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p.163-166.교회건물의 예배의식적 목적은 성찬의 중세적 이해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 성찬은 떡과 포도주가 기적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과정, 그리스도 희생의 반복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교회건물은 이처럼 기적적 사건들에 합당한 모습을 지녀야 했으며, 그리스도의 성체는 예배의식이 끝난 후에도 그 속에 간직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집회 혹은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기적(the Great Miracle)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이해되었다. 따라서 한 도시나 촌락이 교회를 지을 때에 생각하였던 것은 이들에게 가장 귀중하였던 보석을 박아넣기 위한 공예품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바실리카들은 흔히 로마네스크, 즉 로마식이라는 건축형식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들은 세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번째로, 교회 내부의 예배당이 길게 연장되어 이전의 바실리카들은 '타우'(Tau)십지가(T자형)모습을 했는데 반해, 로마네스크식 교회들은 보다 일반적인 '라틴'(Latin)십자가 모습을 띠어갔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과 예배의식을 주관하고 찬양순서를 맡았던 사제들과 수도사들 사이의 구별이 보다 엄격해지기 시작하였던 때문이다. 특히 수도원의 예배당의 경우처럼, 후자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성소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고대 교회당들은 나무 지붕이었는데 반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은 돌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돌지붕은 일련의 반원형 아치를 지음으로써 가능했다. 아치(혹은 일련의 아치들을 연결한데서 생겨난 천장)들의 경우, 구조물의 무게가 측면으로 퍼져나가게 되므로, 거의 창문이 없이 보다 두꺼운 벽을 쌓아야 했고, 외부에는 중후한 버팀벽(buttress)들로 이를 지탱하였다. 버팀벽은 외부의 벽에 무게를 더하여 천장의 중력을 막으려는 형태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로마네스크 교회들의 내부는 어둠침침하였고, 교회당의 정면 쑥 내민 부분(aspe)에만 창문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세번째로, 중세때부터 교회 본 건물의 일부로, 혹은 별개로 종탑을 짓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중반부터 로마네스크 양식보다도 고딕(Gothic) 양식이 우세하게 된다. 원래 '고딕식'이라는 명칭은 이 모습이 고트족들에게 적당한 것이라는 경멸의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 두 양식의 현저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고딕식은 로마네스크식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건물의 기본구조는 변화가 없었으며, 지붕들은 역시 아치형식에 근거한 천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딕양식은 반원형 대신 뾰족한 모습의 아치를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로마네스크식의 '원통형의 둥근 천장'이 아니라, '갈비뼈형'(ribbed) 천장을 만들므로써 이를 더욱 개량하였다.

  이러한 고딕식의 커다란 잇점은 전체 무게가 벽돌 대신 구석에 위치한 기둥 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길고 높은 지붕들이 두꺼운 벽에 의지하지 않고도 건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장들의 측면으로 뻗치는 장력은 굉장한 것이었으므로 부벽을 통하여 이를 버티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은 벽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기둥을 세우는 '날개모양의 부벽'(flying buttresses)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여 천장의 무게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기본적 구조가 너무도 수직적이어서 마치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물들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효과는 탑들과 망루들을 첨가함으로, 그리고 천장의 '신경들'(nerves)를 두드러지게 하여 기둥을 따라 지상에까지 연결함으로써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모습의 전체구조는 더 이상 로마네스크양식의 건물처럼 두꺼운 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비스러운 빛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을 위한 넓은 공간들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 성자들의 생애등을 그려넣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인상적인 건물들이 이루어졌다. 마치 돌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전체 건물들은 안과 밖을 막론하고 신앙의 신비성과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 권의 책이었다. 특히 그 내부의 회랑들과 날씬한 기둥들, 그리고 찬란한 색채의 창문들이 한데 어우러져 성찬의 기적에 합당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수많은 도시들의 지평선을 아직도 이루고 있는 고딕식 성당들은 중세가 그 후에 올 세대들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물론 보배(Beauvais)의 성당처럼 지나친 천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아마 이 역시도 인간본성의 저항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힐데브란트, 프란치스코 등의 고상한 이상들이 출현하였던 이 시대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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