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스크랩] 곤잘레스: 중세교회사(169- )

baromi 2006. 10. 31. 12:04

p.170-173. 새로이 등장한 이 계급의 이해관계는 봉건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귀족들간의 잦은 전쟁,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한 세금들, 그리고 자급자족을 추구하였던 대영주들의 욕망 등은 모두 교역을 저해하고, 그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부르조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정부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교역이 보호받고, 산적들을 퇴치하며, 화폐제도를 통솔하고 사소한 전쟁들을 종식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로조아들은 대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을 지원하였다.

  국왕들 역시 이러한 동맹을 통하여 이익을 얻었다. 국왕들이 대군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자금이 없을 때에만 강력한 귀족들은 군주들에게 반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군자금을 왕들은 부르조아들로부터 얻었다. 그리하여 중세에 있어서 중앙집권군주제의 성숙은 은행가들 및 상인들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병행하였다....

  국가주의는 이 시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원래 대부부의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어느 도시, 혹은 어느 지방출신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주민들은 자신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항한 공동연대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군주에 의해 통일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주의는 우주 전체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의 주장을 잠식시켰다. 만약 교황들이, 마치 아비뇽 거주 시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프랑스쪽으로 기울어지면 영국인들은 이에 불복하고 노골적인 저항까지 표시하였다. 반면 교황이 프랑스인들의 영향권을 벗어나고자 하면,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그의 라이벌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어느 교황을 좇을까에 관한 문제로 전체 유럽이 양분되었다. 그 결과 교황청은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막대한 권위와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은 교황청 이외의 다른 곳으로 교회의 개혁을 희구하게 되었다.

 

p.172. 14-15세기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사건은 백년전쟁(1337-1475)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프랑스와 영국의 대결이었으나 유럽 전체가 이에 개입해야만 했으므로,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제1차 유럽대전'(The First European War)이라 불렀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사촌인 필립6세가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 왕위를 탐내었다. 이때 마치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침입하고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국왕 데이비드를 지원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p174. 오랜 전쟁은 교회생활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 기간 중 한 동안 교황들은 프랑스의 비호 아래 아비뇽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인들은 교황을 자기들의 대적으로 보았다. 그후 전체 서방교회가 분리되었던 대분열(Great Schism) 당시 각국은 백년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동맹 및 적대관계에 따라 교황들을 선택하였다. 또한 전쟁 자체 때문에 대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당시의 국제관계로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으므로, 우주적 권위를 주장하는 교황청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p.176.당시의 흑사병은 그 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적으로 유럽전체가 영향을 받았다. 우선 공산품의 소비장소인 시장이 자취를 감추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사망율이 높지 않았던 지역에서는 실업율이 크게 증가했다. 그후 수세기가 지나서야 유럽은 겨우 인구적, 경제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병으로 인한 대규모의 사망은 중요한 종교적 결과를 불러왔다. 아직 면역성을 갖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희생자가 되었으므로, 마치 죽음의 신은 젊은이들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건강했던 자들을 무차별 공격하였던 역병의 성질 자체 때문에 많은 이들은 선조들이 믿었던 바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우주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식인들은 인간존재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의심하시 시작했다.일반 평민들은 미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항상 죽음이 눈앞에 있었으므로  삶 자체가 이를 위한 준비처럼 생각되었다. 많은 이들은 성지,로마, 혹은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났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이처럼 먼 순례길에 오를 수 없었던 이들은 가까운 성지들을 순례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성유물숭배, 또 이러한 유물들의 매매가 성행했다. 공포가 천지에 만연하였다. 전염병의 공포, 지옥의 공포,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곧 직면해야 할 심판의 공포 등으로 사람들은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당시 이성의 한계에 대한 회의가 어떻게 17-18세의 이성의 확신으로 이어졌을까.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역병을 소재로 한 실존주의자들의 실존에 대한 묘사들을 중세인들의 실존의식과 비교해 볼 것.

 

p.176.또한 이 페스트의 창궐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신자들에 비해 유대인들의 사망자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일부 의학자들은 당시 기독교신자들이 고양이를 마술과 관련한 것으로 생각해서 기르지 않았으므로, 유대인지역에 더 많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어째튼, 평범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신자들의 우물에 독을 집어 넣었다는 단순한 소문을 믿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잔학행위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때는 공포으 시대였으며 공포는 그 희생자를 요구하였다.

 

현대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뱀을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의 참고자료.

 

p.189. 이 일이 있은 지 3년 후 캐더린(Catherine of Siena)은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1세기 후 그녀는 로마교회의 성자로 시성되었으며, 1970년 바울6세는 그녀에게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러한 명예를 받은 여성은 겨우 두 명 밖에 없다.

 

누가 다른 한 명인가?

 

p.190. 교황의 아비뇽 장기체재로 인하여 교회생활은 크게 재난을 겪었다. 교황청의 포로기간은 백년 전쟁의 그것과 일치했으며, 교황들은 프랑스정책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므로, 프랑스에 대적하였던 국가들은 교황청을 단지 적대외국세력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이들 가운데서 국가주의는 곧 교황청에 대한 적대감과 연결되게 되었다.

 

p.198.4세기경, 아리우스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될 위험에 처했을 때, 콘스탄틴은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또한 그 후의 역사속에서도 종교회의를 통해서 여러가지 위기들이 해결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점차 교황들의 권력이 강성해 짐에 따라, 종교회의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경우처럼 단지 교황청의 정책들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교황의 바벨론 유수 및 이에 따라 발생한 대분열을 통하여 교황청의 도덕적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많은 이들은 둘의 통일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개혁을 이루는 방법으로서 전체 종교회의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에 관한 이론들이 발전함에 따라, 그 주창자들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보편종교회의가 교황보다 더 우세한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과연 누가 합법적 교황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자기들끼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던 교황들 대신에 종교회의가 더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명백한 해결책에 난관이 되었던 요소는 과연 회의를 소집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만약 어느 한 당파에서 회의를 소집할 경우에는, 그 결과가 또한 편파적이므로 분열이 해결되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난제는 결국 협상을 거부하였던 교황들의 고집에 지쳐버린 두 파의 추기경들이 1409년에 피사에서 공동으로 대회의를 소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자 적대관계에 있던 두 교황은 피사(Pisa)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스스로의 정통성을 계속 주장하였던 두 교황들은 각자 자기의 요새로 은둔하게 되었다.

  피사에서 개최된 회의는 양측 추기경들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두 사람 중 과연 누가 합법적 교황인가를 결정하고자 노력하는 대신, 양자 모두의 비합법성을 선언하고, 제 3의 인물을 교황에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서 피사회의는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한 후에 정회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두 교황들이 종교회의의 결정을 부인하고 나섬에 따라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이제 세 사람의 교황들이 존재하는 촌극을 빚게 되었다. 비록 알렉산더5세가 유럽 주민들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나, 다른 두 사람의 교황들 역시 나름대로의 지지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는 선출된지 1년이 지나지 못해 사망하였으므로 추기경들은 다시 요한23세를 선출하였다....(독자들은 아마도 20세기에 교황 요한23세가 존재하였는데, 어떻게 15세기에도 교황 요한23세가 있을 수 있었는가고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로마카톨릭 교회가 로마에 거주하였던 우르반6세 및 그의 후계자들을 합법적 교황의 법통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비뇽에 거주하였던 교황들뿐만 아니라, 피사회의가 선출하였던 알렉산더5세와 요한23세 역시 대립교황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p.203. 후에 플로랜스로 옮겨간 펠라라(Ferrara)공의회[로마 교황주도하는 공의회]는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한 당시 정치상황에 못이겨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총대주교는 교황지상권(papal supremacy)을 포함한 재결합조건을 승인하였다.

한편 바젤공의회[종교회의운동자들이 주도하는 공의회]는 점차 극단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도적 위치를 점유했던 인사들이 하나씩 교황이 주재하는 공의회에 합류하였다. 남은 자들은 유게네(로마교황)의 폐위를 선포하고 그 대신 펠릭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제 두 개의 공의회와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교황들의 분열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종교회의운도은 자신으로 손으로 또 다시 동일한 문제를 재발시켰다. 그러나 바젤 공의회와, 여기서 선출된 교황은 전체 교회의 생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남은 자들은 로잔(Lausanne)으로 옮겼다가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종교회의에 대항한 교황의 승리가 명백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종교회의는 교황에게 복속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하는 짓이란 모두 이렇다!

 

p.206.마침내 그(위클리프)는 1381년 루터워스(Lutterworth)에 있던 그의 교구로 은퇴하였다. 그가 교구를 소유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교구를 그의 봉사에 대한 댓가로 왕실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사실은 개혁가들이 그토록 증오하였던 부패가 얼마나 교회전체에 만연했었는가를 보여준다.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위클리프마저도 그가 임명되었던 성직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으로 옥스포드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또한 후일 그는 현금이 급히 필요하게 되자, 상당한 금전을 보상으로 받고 보다 수입이 적은 교구와 이를 교환하였다.

 

인간개혁의 불완전함. 그리고 위클리프가 개혁의 잣대를 철저하게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았을 가능성. 오,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패함이여! 나는 주의 말씀을 나에게 먼저 적용시킨 뒤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라.

 

p. 208. 당시 영국왕 리챠드2세가 보헤미아의 공주와 결혼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영국에 유학하였던 일단의 체코인들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보헤미아로 들여왔다. 이러한 저술들은 대학교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초기의 논쟁은 주로 위클리프의 철학적 입장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당시 대학교는 독일인들과 체코인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위클리프의 철학에 관한 상반된 입장으로 표출되었다. 체코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반해, 독일인들은 고루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일부 독일학자들이 논쟁의 내용에 위클리프의 정통성 여부를 끌여 들였다. 이에 따라 체코인들은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체코인들이 위클리프의 모든 사상에 동조하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후스의 경우에도, 학자들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고 토론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 반면, 그리스도의 성찬 임재에 관하여는 위클리프와 의견을 달리하여 전통적인 화체설을 따르고 있었다. 결국 보헤미아국왕의 지원 아래 체코인들이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독일출신 교수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Keipzig)에 자기들의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프라하를 떠나면서 그곳이 특히 위클리프의 사상을 중심한 이단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따라 위클리프의 저술을 두고 발생한 논쟁은 결국 체코인들이 이단들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p.214. 프라하의 4개조(Four Articles of Prague)

         1.하나님의 말씀이 자유스럽게 왕국전체에 전파되어야 한다.

         2.'이종성찬'을 거행해야 한다.

         3. 성직자들은 일체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적 가난'을 규범으로 생활해야 한다.

         4. 공적인 범죄, 특히 성직매매를 처벌해야 한다.

 

p.218. 이에 따라 그의 영도 아래 정기적으로 '허영의 화평식'(burnings of vanities)이 거행되었다. 중앙광장에 나무로 만든 피라믿이 지어졌으며 그 아래에는 화약을 친 짚단과 장작이 쌓여졌다. 피라믿의 계단 위에 시민들은 그들의 '허영들'을 갖다 버렸다. 즉 사치스러운 의복, 보석, 가발, 그리고 값비싼 가구 등이었다. 그 후 찬양과 행진 등이 행해지는 가운데 이들을 불살라 버렸다. 개혁운동을 통해 금지되었던 카니발 대신에 이러한 불꽃놀이를 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보나롤라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서 개혁을 추구했던 그 방법은 유치하다고 여겨진다. 열광적인 모습이 확산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p.223. 루이스브뢰크(John of Rusbroeck)와 구루테(Gerhard Groote)는 흔히 '근대적 경건'(modern devotion)이라 불리는 사상의 형태를 이룩하고 이를 일관화시켰던 인물들이다.근대적 경건은 주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엄격한 명상과 그 모범을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학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저술은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atation of Christ)로서 그 후 수세기에 걸쳐 가장 널리 읽히는 경건서적이 되었다. ...아마 구루테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공동생활 형제단(Bretheren of the Common Life)의 설립이라 할 수 있겠다....구루테는 추종자들에게 수도생활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구든 자기가 진정 수도생활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이미 가지고 있던 직업들에 충실하면서, 이를 통해 근대적 경건의 원칙들을 따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동생활 형제단은 수도생활에 뜻을 둔 자들 뿐만 아니라, 계속 직업에 충실코자 하는 이들을 위한 뛰어난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들은 학문과 아울러 경건을 강조하였으며, 교회 부흥의 중심지들로 화하였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배출된 졸업생들은 대부분 기성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력과 아울러 개혁의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16세기의 지도적 인사가 된 로텔담의 에라스무스이었다.

 

p.224. 독일 및 플랜더스 출신의 신비주의자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감정에 흐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신비적 명상이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내면의 평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 쉬운 감정적 자극이나 열정이 아니라 내면적이면서도 확고부동한 이지적 명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비주의운동은 기존교회나 혹은 계급제도에 대적하는 양상을 띠지 않게 되었다. 비록 이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고위 성직자들의 오류, 특히 이들의 사치와 향락을 비난하였으나, 대부분은 그들의 경건이 가져다 주는 내면적 평화에 만족하였으므로 기존 교회의 권위에 대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반면 신비주의적 경향 자체가 단지 부패한 고위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계급조직을 가진 교회 자체를 약화시키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실제로 만약 직접적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통이 가능하게 된다면, 전통적인 은혜의 수단이었던 성례, 설교, 혹은 성경까지도 그 중요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14,15세기의 신비주의자들은 이처럼 극단적 결론에 도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심어놓은 의심의 싹은 그후 점차 계급제도의 권위를 약화시키게 되었다. 

 

 

p.229. 중세말에는 사상과 철학의 분열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스콜라신학의 전통을 견지했던 인물들과, 또 다른 편으로는 고전으로부터 영감과 방향을 발견하고 르네상스를 낳게 한 인물들이 함께 존재하였다.

 

p.229-234.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절정에 달했던 스콜라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번째는 이해하기 조차 힘든 난해한 질문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미묘한 구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비전문인드로서는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어려운 문체와 기술적 용어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오직 신적 계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사이에 점차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장벽이 쌓여갔다....보나벤투라 이후 가장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는 '난해한 박사'(Subtle Doctor)라고 일컬어져 왔다....스코투스가 이전 세대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영혼의 불멸성이나 하나님의 전지성 등이 이성의 합당한 사용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는 가설에 반대하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는 이러한 교리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도한 이러한 교리들이 이성과 공존할 수 있음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이성이 이들을 증명할 수 있다는데에 반대했다. 이성은 단지 이러한 교리들이 진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데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14-15세기에 들어와 더욱 분명해진다. 당시 전형적 인물들은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 1285?-1349)과 그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하나님의 전능성이라는 속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자연이성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전혀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이들중 대부분은 하나님의 '절대적'(absolute) 능력과 '제한적'(ordered) 능력을 구분하였다. 신적 전능성을 전제로 할  때에 '절대적' 능력은 그 한계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 인간이성이나 혹은 선악간의 구별도 - 하나님의 절대능력 위에 존재하지는 못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절대 능력이 인간이성이나 혹은 선악간의 구별에 의해 제한당한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지 '제한적' 능력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운행하시며, 선한 사역을 행하신다. 엄밀하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을 행하신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무엇을 막론하고 선한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선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합리적으로 행동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은 하나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엇이 합리적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이며, 그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제한적 능력에 의하여' 이러한 범주에 따라 행동하시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이전의 신학자들이 어떤 교리가 합리적이라거나 '적당'하다고 주장하고자 했던 일체의 전통적 이론들이 무효화됨을 의미한다.....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오캄의 제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께서 당나귀 속에 성육신하실 수 있었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물론 이러한 신학자들이 단지 사상의 유희를 위해 이처럼 난해한 질문들을 던지기 좋아한 불신자들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이제까지 알려진 기록들을 보면 이들은 대부분 경건하고 헌신적 신자들이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이었다. 창조주는 무한히 피조물들 위에 계신다. 인간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짐작할 수 조차 없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은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조차도 불가능케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기꺼이 신앙하고자 하였던 불신신학은 아니다. 이는 차라리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깊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 준 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계시한 모든 것을 기꺼이 신앙하고자 했던 신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교리나 진리가 합리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되었기 때문에 믿고자 하였다. 이는 곧 14,15세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문제야말로 특히 중대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성으로서 교리의 진리나 오류를 증명할 수 없었으므로 인간은 이제 무오한 권위의 토대 위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려야 만 하였다. 오캄은 교황 및 전체 종교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믿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주장하였다.

 

p.233. 이들 신학자들이 아무리 경건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난해하고 번잡한 이론과 사고의 전개는, 당시 학문적 신학의 복잡성과 복음의 단순성의 차이를 감지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반발의 일부가 '근대적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p. 237. 그런데 이러한 고전학문에 대한 흥미의 부활은 인쇄기의 발명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므로, 이는 당시 휴머니즘, 즉 인문주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쇄술을 문학의 보급을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 인쇄되었던 대부분의 서적들은 읽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라틴어나 헬라어로 되어 있었다. 또한 활자들 역시 손으로 베껴 쓴 책들을 모방하여 당시 필사가들이 흔히 사용하였던 속기문자들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초기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쇄술은 학자들간의 의사 전달, 혹은 고대 저작들의 복사를 위한 뛰어난 수단이었을 뿐, 자기들의 사상들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다. 따라서 인쇄술은 한 동안 상류층 지식인들의 독점물이 되었다. 사보나롤라를 제외하고는 종교개혁시대 이전에 대중들에게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쇄술을 사용한 인물은 전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은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제 학자들은 서적을 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전에는 동일한 서적이라 할지라도 필사하는 과정에 오류가 들어가서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 이전 세대들 역시 이러한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으나, 보다 조심스럽게 원서를 필사하는 방법 이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오류를 범할 필요도 없이 수백 권의 동일한 책들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만약 어떤 학자가 한 가지 저술의 서로 다른 몇 가지의 사본들을 비교해 본 후, 보다 믿을 수 있는 고대서적의 원문을 밝혀 내고 그 인쇄를 감독할 수만 있다면, 이 작품은 영속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또 다른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는 전문필사가들의 손을 빌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고대 저술의 가장 정확한 원문을 밝혀 내기 위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학문이 발생하였다. 얼마 안되어 키케로, 제롬, 그리고 신약원문의 비평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p.246. 식스투스 4세 아래서 교회는 사유기업화하였으며 전체 이탈리아는 교황의 조카들이 벌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음모들 속에 말려들어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사람들은 식스투스를 그의 이름을 본따 명명된 시스틴성당(Sistine Chaple)을 건축한 이로 기억하고 있다.

 

p.248. 삼촌 식스투스4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던 율리우스2세(1503-1513)는 기독교성자가 아니라 쥴리우스 시저를 모형으로 하겠다는 의미에서 그 칭호를 택하였다. 당시의 많은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예술의 후견인이었다. 그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시스틴성당의 그림들을 완성하였으며, 라파엘은 뛰어난 프레스코화들로 바티칸성당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율리우스가 무엇보다도 즐긴 것은 전쟁과 약탈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고 전해지는 화려한 복장으로 교황친위대를 옷 입힌 후 전쟁터로 이끌고 갔다. 그는 외교적 수단과 병법에 뛰어난 인물로 어떤 이들은 율리우스가 마침내 이탈리아를 통일시킬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율리우스는 외교와 전투를 통해 이들 모두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51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폭군'(Terrible)이라 불렀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유명한 로렌조의 아들, 지오반니 데 메디치로서 그는 레오10(1513-1521)를 택하였다.....그는 특히 로마에 소재한 거대한 성베드로성당을 완성하고자 하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금의 조달을 위한 무분멸한 면죄부 판매는 결국 그 후 루터의 저항을 맞게 된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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