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사(320- )

baromi 2006. 10. 31. 12:03

p.320. 교회가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받았던 지원들은 축복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희랍교회는 방대한 특권을 누렸으나, 동시에 그 자유는 제한받아야 했다. 서방의 경우 교황들이 국왕들보다도 더 강력했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동방에서는 황제들이 교회를 통치했으며, 황제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총대주교들은 그 직위을 박탈당하거나 대체되곤 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자기 조직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와 재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을 때, 비잔틴교회 내의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1년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터어키인들에게 함락당했다. 수많은 비잔틴기독교신자들은 이 사건이 동방교회를 이단적인 로마와 강제로 연합시켰던 황제의 폭거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했다....

  콘스탄티노플 시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반수가량은 모스크로 전환되었으나, 나머지 교회에서는 국가의 완전한 보장 아래 기독교의 예배를 계속할 수 있었다. 1516년 오토만제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게 되자, 그곳에 있는 기독교신자들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두었다. 1년 후 이집트가 터어키에게 함락되었을 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하여금 그곳의 신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를 통해 총대주교들은 터어키제국내에서 또 다른 별개의 기독교국가를 통치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술탄의 정책에 반대하는 총대주교들은 가차없이 그 직위가 박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쳐 헬라어 사용권 교회들의 신학활동은 서방의 영향 아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기간 중 서방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학적 문제들은 헬라어사용권 교회에서도 논의되었으며, 162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ucaris)가 펴낸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짙은 프로테스탄트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비록 루카리스는 직위을 박탈당하고 살해당했으나, 그의 이름은 계속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신앙고백은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1672년의 종교회의는 그를 "칼빈주의적 이단자'라고 정죄했다.

 

p.324.피터 대제(Peter the Great, 1689-1725)는 또 따른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그리스 정교 신자들과의 화해보다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교회 역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신학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호했든, 이들은 자기의 본래의 정교회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카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의 방법론 등을 도입하여 정교회 본래의 신학을 발전시킬 길을 찾았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일부는 카톨릭적으로, 일부는 프로테스탄트적으로 기울어져 공존했다.

  피터 모길라(Peter Mogila)가 이끄는 키에프학파는 가톨릭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반해, 테오파네스 프로코포비크(Theophanes Trokopovick) 및 그의 추종자들은 러시아의 종교가 프로테스탄트노선을 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초에는 계몽주의 및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프로코포비크학파가 우세했다. 그러나 19세기말 민족주의적 반동이 강하게 일어나, 러시아 고유의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친슬라브주의(Slvaophile)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끈 중심인물은 평신도출신의 신학자 알렉시스 코미야코프(Alexis Khomiakov, 1804-1860)로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도입하여 정교회가 주장했던 보편성이야말로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의 통일과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하는 복음의 자유를 포용하는 완전한 신테제(Synthesis)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p.338-339. 그러나 요한23세라는 칭호를 택한 나이많은 교황의 짧은 재임기간(1958-1963) 중 역사적 변화들이 발생했다. 그가 일찍이 아비뇽 교황시대와 피사에 거주했던 반교황(anti-pope), 요한23세에 의해 얼룩진 요한이라는 칭호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중한 임무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았음을 자각했던 요한23세는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교황선출 후 3개월만에 에큐메니칼종교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황청내의 많은 인사들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과거의 종교회의들은 대부분 교회가 당면했던 시급한 문제들 - 특히 위험한 이단사상들 -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제1차바티칸공의외에 의해 교황무오성의 교리가 반포된 이후에는, 이미 종교회의시대가 막을 내렸으니, 이제 교황은 절대적 군주로서 교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피우스9세 이루 카톨릭교회는 일련의 중앙집권화 현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주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 불렀으며, 이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충고를 듣고 싶어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전면개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확신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전체 교회주교들의 단결된 지혜와 관심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