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해석
김 재 성(한국신학연구소 연구교수) 의 글 중에서...
구상화 할 수 없는 성령
프뉴마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실체로 보는 사고의 특징은, 프뉴마를 어떻게든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구상화하는 것이다. 후기 영지주의에서는 프뉴마를 '빛'이라는 표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철저히 내재주의적인 스토아 철학에서는 사물의 모습들 속에서 그 속에 깃들인 프뉴마를 보았다. 영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고는, 1세기의 헬레니즘적 유대교, 스토아 철학자들, 플루타크 등에서 일반화된 현상이다.신약성서 기자 가운데는 누가 기자가 헬레니즘적 요소에 친숙하다. 그는 오직 힘을 실체의 형식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헬라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관심은 다른 데 있다. 헬라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성령이 '어떻게' 사람에게 침입하느냐 하는 것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서, 누가 기자는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와 대조하여 보면, 누가 기자는 성령이 '형체를 가지고' 내린다는 내용을 첨가하였다(눅 3:22). 이것은 그 사건이 단지 예수가 본 어떤 환상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사건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묘사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성령을, 세차게 불면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공간을 가득 채우기도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불같은 혀들'로 구상화한다(행 2:1-3). 나아가서 그는 집이 흔들리는 것으로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도 한다(행 4:31).
누가 기자는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성령이 채워진다'거나 '성령을 부어 준다'(행 2:33)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령이 어떤 액체와 같이 사람을 채운다는 사고는 그리스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다. 누가 기자는 '채워진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pivmplhmi라는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인 plhsqh'nai를 자주 사용하며, 이와 비슷한 의미의 형용사 plhvrh"(행 7:55)나 동사 plhrou'n을 사용하기도 한다(행 13:52). plhsqh'nai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는 흔히 '충만하다'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서 성령과 관련하여 plhsqh'nai를 사용한 사람은 누가 기자뿐이다(눅 1:15; 1:41; 1:67; 행 2:4; 4:8; 4:31; 9:17; 13:9). 누가 기자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곧 그가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그들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役事)를 개인의 내면적 환상이 아닌 객관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열광주의자들도 사람들 속에서의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 개개인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음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 누가 기자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서도, 성령이 어떤 개인에게 역사함을 남에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언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 병고치는 은사를 선호한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구상화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성령을 어떤 소리나 형체로 표현하지 않으며, 성령이 사람을 채운다거나 사람에게 성령을 붓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어느 은사나 다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고전 12:11), 은사에 차등을 두고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특정 은사만을 선호하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대신에 그는 '남을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12:28), 그리고 '섬기는 일', '나누어주는 일', '지도하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롬 12:7-8) 등, 곧 성령의 임재를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것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것들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남
성령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바울의 노력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을, '주다'(divdonai)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기자의 경우에는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다(눅 11:13; 행 5:32; 8:18; 15:8). 그는 파루지아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선교의 역사가 파루지아를 대신한다.
그는, 요엘이 말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영'(행 2:17)이 오순절 사건과 선교 역사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부어졌다고 보았다. 그가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것은, 종말이 지연된 선교 현장에서의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강조하려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아예 한 번도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적이 없다. 두 단어를 나란히 사용한 경우는 고린도전서에서 두 번,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외의 바울서신에서 두 번 나온다. 먼저 고린도전서 이외의 경우를 보면, 한 번은 '성령'이 현재 분사(didovnta)의 목적어로 되어 있고(살전 4:8), 또 한 번은 과거 수동태 분사(doqevnto")의 한정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롬 5:5). 어느 경우에서나 그 분사는, 성령을 사람에게 '소유하도록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결하고도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고(살전 4:3-7),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과 인내와 소망을 일으키려고(롬 5:4-5),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의 경우(12:7·8), 바울은, 독자들이 그 두 단어를 연관시켜서 성령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일이 없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전 12:7을 직역하면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eJkavstw/) 성령의 나타나심이(hJ fanevrwsi" tou' uvmato") 주어진다(divdotai)"이다. 이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나 성령이 개인에게 주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 곧 성령의 은사이다. 바울은 '주어지다'(divdotai)라는 동사의 주어를 '성령'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함으로써, 사람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는 있지만 성령을 소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divdotai),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하는데(8절), 여기에서 '성령으로'(dia; tou' pneuvmato")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라는 의미이고, '같은 성령으로'(kata; to; aujto; pneu'ma)는 '같은 성령을 따라서'라는 의미이다. 즉,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곧 은사가 사람들에게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람들게 주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사이지 성령이 아니다.
성령을 받음
'받다'(lambavnein)라는 동사는, 그 목적어가 사물인 경우에는 '취함'을 의미하지만, 그 목적어가 '성령'일 때에는 '받음' 또는 '영접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령을 '소유함'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이다.
바울서신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롬 8:15; 고전 2:12; 갈 3:2·14)을 살펴보면, 그 동사의 주어(성령을 받은 이)는 언제나 '우리'이거나 '여러분'이다. 이는 성령을 받은 주체를 개개인보다는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역사(役事)에 사람들이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곧,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일(롬 8:15; 갈 4:6),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영광의 주'로 고백한 일(고전 2:6-12), 복음을 듣고 믿은 일(갈 3:2,14)이다. 이러한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나타난 것은, 무슨 신비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 곧 기도이다(롬 8:15·26-27; 갈 4:6).
개개인이 성령을 받는 것은, 공동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개개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지, 공동체와 관계없이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기자의 글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행 2:38; 8:15.17.19; 10:47; 19:2)을 살펴보면, 바울서신의 경우들과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누가 기자는, '각 사람'(e{kasto")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고(행 2:38, 참조: 행 2:3),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도 한다(행 8:17-19). 그는, 성령을 받기 위한 조건 같은 것으로 회개, 세례, 죄의 용서를 들기도 하고(행 2:38), 사도가 손을 얹는 것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 매개로서 작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행 8:17; 19:6).이런 것은 바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자기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해달라면서 사도들에게 돈을 내민 일(행 8:19)을 두고, 누가 기자는 그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한 것을 문제 삼지만(행 8:20),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개개인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려고 한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는 어떠한 조건이나 중재도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본다(갈 3:2·14).
공동체 안에 임하는 성령
'여러분 가운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개인에게 임함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예수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활동을 묘사하는 것들이다. 예수와 성령의 관계는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바로 성령이 개인에게 임하는 예를 끌어낼 수는 없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예수께 성령이 임한 경우 말고도 개인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말할 때는 언제나, 성령이 개개인에게 임한다고 하지 않고, '여러분 가운데'(ejn uJmi'n) 임한다고 한다(롬 8:9; 8:11 고전 3:16; 6:19 갈 3:5). 이는 곧 성령이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임함을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각 사람에게'(eJkavstw/)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롬 2:6; 12:3 고전 3:5; 4:5; 7:17; 12:7; 12:11;
15:38). 바울은 고전 12:7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이 주어진다고 하고 나서, 잠시 후에 다시 각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진다고 한다(12:11). '각 사람에게'라는 표현을 이와 같이 두 번이나 거듭하여 사용한 것은 이례적인데, 그것은 그가 여기에서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나타나심' 또는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성령 자체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는, 어떤 영적 실재가 하늘에서 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나 헬레니즘의 프뉴마 이해에서 나타나는 프뉴마 임재의 특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곧 프뉴마가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에게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스토아 철학과 후기 영지주의의 프뉴마 이해에서 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공기가 사람의 코로 들어와서 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천상적인 실재가 사람의 몸 속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에서 나타나는 '빛의 파편'으로서 프뉴마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하늘의 어떤 본질이 사람 속에 나누어진 것이며, 육체 속에 갇힌 것이다.
현실의 삶을 도외시하고 신령한 것에 몰두한,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도 이런 식으로 성령의 임재를 이해하였다. 그들은 신령한 신적 본질이 '각 사람'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각 사람'을 신령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계시며,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고전 3:16).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소나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役事)하는 곳에 계심을 말하며, 그곳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밑의 글은 서철원 교수의 글과 니나님의 덧글입니다. 서철원 교수의 표현과 니나님의 생각이
어떠한 생각임은 위의 글과 아래의 이어지는 글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님께서 제 글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을 올리시라 하시니 부득불 올립니다 이미 토탈 진리라는 분이 약간은 언급하셨습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잘려면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아래의 인용글은 서철원목사의 글입니다. "구약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위에 계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주하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방 모든 민족들과 구분된 선택된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백성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내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만의 특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백성이 구속되었으므로 그 은혜때문에 성령이 신약 교회 전체와 함께 계시지만 신자들 각자의 마음속에 거주하신다. 이렇게 성령이 신자들 각자안에 거주하심으로 신약교회는 하나님앞에 거룩한 백성이 된다" (성령신학, p.145)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 마음에 내주하신다고 하셨는데 진짜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 이해가 안되는군요? 성령은 우리의 영에 오셔서 우리와 한 영이 되심이 분명한데요? 글쎄요? 영은 물질입니까? 비물질입니까? 영도 질량이 있는지요? 영도 형체가 있습니까?
니나
저는 아무래도 오웬의 해석은 용납이 안되는군요? 문자 그대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온다고 믿을렵니다. 06.09.27 21:03 --> 영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내주 하셨다라는 말을 할 수 없지요. 우리 안에 온다는 개념은 어느 물질이 어느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이라고 존 오웬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영이 물질이 아닌것을 알면서도 왜 영을 물질적 개념의 이동개념으로 우리안에 내주한다고 말하십니까? |
바울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성전'(naov")을 단수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개개인이 작은 성전을 이룸을 말하려 했다면 단수형 대신에 '성전들'(naoiv)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을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고전 6:19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분은 성령의 전입니다'(3:16)라는 이전의 진술에다가 '몸'(sw'ma)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6:19)라고 한다. 이로써 신령한 삶이 내면적, 심령적 체험에서가 아니라 신체적 실존의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바울이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15:46)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롬 8:9). 이 구절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ejn uJmi'n) 임재하는 것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 사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役事)할 때 그 현실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 안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거의 다 예수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예수의 삶과 활동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는 '성령 안에서'는 주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삶과 은사,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현실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는 열광주의자들에게서는 '신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져서'와 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말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ejn pneuvmati qeou')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가 아니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고전 12:3). 이 점에서도 바울의 성령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은 바울이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롬 9:1; 고전 12:13과 갈 3:28). 고전 12:13과 갈 3:28은 둘 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말하지만, 전자는 '성령 안에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는 바울서신에서 주로 나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전치사 ejn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것이 '장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 장소를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신비적인 해석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수단'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활동을 어떤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함으로써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원 활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것이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전치사 ejn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관계'를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형식적, 교리적 관계로 보지 않는 한에서 타당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성령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정체도 모르는 영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성령 안에' 있는 상태로 착각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를 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 관계가 아닌 역동적 관계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맺음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4:8). 이 말은, 지금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두고, 바울이 그들 자신의 표현을 가지고 비꼰 것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희망으로 확립함으로써(6:14; 15:22-20),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쐐기를 박았다.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는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자아도취나 교만으로 나타났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이러한 교만을 직·간접으로 지적하고 있다(4:6, 8, 18-19; 5:2; 8:1). 이것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 공동체 전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위험의 뿌리는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있다고 보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이 성령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구상화 할 수도 없고, 개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령을 받음은, 어떤 내면적, 심령적 황홀경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께서 이룩한 구원의 현실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이 임재하는 곳은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공동체('여러분 가운데')임을 밝힘으로써, 성령의 역사(役事)는 내면적, 심령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정체불명의 영을 받고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영을 분별하는(고전 12:10)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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