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상급균등론은 잘못된 해석...상급은 행함에 따라 차등있어

baromi 2006. 8. 20. 19:16
2004년 07월 27일 (화) 20:20:30 [조회수 : 3542] 이화영 ( dd33

천국의 상급에는 층계가 있다(성경적 상급론)

근래에 들어 몇몇 신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구원이 곧 상급이므로 다른 상급은 없으며 천국의 상급도 차별이 없다'는 주장이 빠르게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고 능력이 한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성도에게 반드시 똑같은 상을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성경구절을 제시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성경을 오해하고 그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목회자와 성도의 헌신의욕을 꺾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 중단시키고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러한 사상이 성경의 본뜻이 아님을 밝혀서 교회가 피해를 입는 것을 다소라도 방지하고자 합니다.

상급차등론은 전통적인 교리이고(아마도 여러분은 옛날 부흥사들이 천국의 상급을 설명하면서 개털모자비유를 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은 새로운 교리입니다. 이 두 주장이 모두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중의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해 줄 심판관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상급균등론자가 내세우는 성구가 몇 구절 있습니다.
 
첫째 성구는 마태복음 20장 1절 이하에 기록된 포도원 품군 비유입니다. 이들은 포도원 품군 비유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군들에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을 보니 사후의 상급에 차등이 없고 모두 같은 상급을 받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 이외의 상급은 없다."

하지만 이 성구는 상급을 가르치는 성구가 아니라 구원을 가르치는 성구입니다. 마태복음22:1이하의 천국비유(혼인잔치비유) 역시 구원이 차등이 없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비유를 보면 왕은 혼인잔치에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예복을 줍니다. 반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벌을 줍니다. 이 말씀은 포도원 주인이 모든 일군들에게 데나리온을 준 것과 같은 뜻으로 믿음의 질에 상관없이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공평한 구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한편 강도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품군 비유는 상급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을 가르치는 비유인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같은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며 힘들게 믿으나 쉽게 믿으나 같은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공관복음 주석을 보니까 박 목사님도 같은 해석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제 십 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마 20:9)”에 대해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세상 끝에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름이다(박윤선 공관복음 주석 670쪽)”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신학교수들이 포도원 품군 비유를 상급을 가르치는 비유로 해석하므로 성경의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자가 내세우는 둘째 성구는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들은 달란트 비유를 예로 들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으니 상급의 차등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재능대로 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를 준 것이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밖에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 달란트를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반드시 다섯 달란트를 남겨야 100% 헌신한 것이며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반드시 두 달란트를 남겨야 100% 헌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네 달란트만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주인의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않고 조금 게으름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줍니다. 열 달란트 받은 종은 열한 달란트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상급의 차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가지고 상급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급균등론자가 내세우는 성구는 창세기 15장 1절의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사후에 다른 상급이 필요치 않으며 상급의 차등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모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필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을 한 곳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이제 필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겠습니다. "성경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이시므로 사람들이 받는 복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복을 받습니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하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각 사람이 받는 복이 다름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거의 시종일관 신앙생활을 잘 한 다윗왕이 받은 복과 온갖 악을 행하다 마지막에 회개한 므낫세 왕이 받은 복이 어찌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복'이므로 복의 차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류이듯이 '하나님이 상급'이므로 상급의 차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오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상급이심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다른 상급도 주시는 것을 성경이 명백하기 가르치는 이상 누구도 상급의 차등지급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큰 상급인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구원 이외의 상급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구원이외의 상급이 있음을, 그것도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이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설명을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상급균등론자가 내세우는 성구는 이것입니다.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상급균등론자는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상급의 층계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상급의 층계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상급이 공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례는 한 일에 따라 주는 보수입니다.

이러한 보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받을 자격이 없는 무익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익한 종에게 은혜로 구원은 물론 복도 주시고 상도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본뜻입니다.

이에 대한 비유를 든다면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지 국가를 위해 충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국가가 목숨을 요구할 때 바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국가가 충성의 대가를 주든지 주지 않든지 관계없이 충성해야 합니다.

국민이 국가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충성한다고 해서 국가가 충성한 국민에게 그냥 있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상을 줍니다. 훈장도 주고 포상도 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사례하지 않는다'는 구절로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일생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인도하셔서 결국 큰 복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력이나 범죄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누구나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인도하셔서 똑같이 큰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열심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든지 세상을 편하게 살수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엉터리로 살아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과 상을 주실 테니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편하게, 혹은 제멋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이 징계하거나 책망하면 반드시 신속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회개시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스스로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시험,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 등)을 자발적으로 잘 통과한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시험을 통과하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을 했기 때문에 시험에 통과하는 은혜(상대주권으로 주어지는 은혜)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절대주권으로(무한한 은혜로) 주시지만 일반적인 복과 상을 줄 때는 언제나 '인간의 노력과 신앙생활과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시는 것(상대주권으로 주시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큰 복과 큰 상을 약속하셨어도 그 사람이 큰 복과 큰 상을 받을 만한 노력을 하지 않거나 신앙수준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죄를 많이 지으면 그 약속을 취소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이 한 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의 조상 아론(레위지파)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에는 '만일 너의 후손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크게 범죄하고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고집스럽게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아론에게 한 약속은 취소되었다.

아론의 후손인 너희 집안에는 결단코 그 약속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는 것이 불변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짓을 하든지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인도하셔서 큰 복을 주시는 것이 원칙이라면' 하나님은 엘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야 옳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너와 네 아들들을 회개시키지 못해서 큰 재앙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이제라도 내 잘못을 인정하고 너희를 강제로 회개시켜서 큰 복을 받게 해주마.' 또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옳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너를 차별해서 미안하다. 내 잘못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똑같이 대우해 주겠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복을 주시는 것이 원칙이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절대주권으로 인도하셔서 큰 복을 주시고 엘리는 범죄하도록 내버려두어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하신 것은 원칙이 없는 것이고 일관성을 잃은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엘리만 비교를 해 봐도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복을 주시고 똑같은 상을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확연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 '아브라함은 택자(구원받은 사람)이고 엘리는 불택자(지옥에 갈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차별대우하셨다'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으시겠지요? 거듭 강조합니다. 일반적인 복과 상에 관한 한 하나님은 강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신앙에 따라서 차별하시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구절을 좀 더 제시하면 첫째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들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2-23).”

이 말씀은 만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두세 번 정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했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주셨을 것인데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회개시키지 않고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둘째 증거구절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 26:4-5).”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혹은 하나님의 평가기준에 비해서 비교적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크게 복을 받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구원의 복에 관하여는 예수님이 충성스러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게 해 주시고 악한 므낫세 왕의 후손으로도 오게 해 주시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행사해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절대주권과 일반적 복에 관한 상대주권을 구분할 줄 모르면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상급균등론과 같은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증거구절로는 예레미야 25장3절 이하의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3)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4)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5)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6)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7)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8)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9)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솟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렘 25:3-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죄짓는 사람을 무한한 은혜로(절대주권으로) 돌이켜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죄짓는 이스라엘에게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재앙을 내려서 징계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고집을 부리고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 이스라엘을 회개시켜서 복을 주시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야긴 왕 같이 비교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만(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명령에 순종한 사람만) 남기셔서 이스라엘의 명맥을 잇게 해 주셨습니다. 강제로 회개시켜서 구원은 받게 해주셔도 강제로 회개시켜 복을 받게 해주시지는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일반적인 복도 받게 해 주시고 상도 받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면 바리새인들도 모두 강제로 회개시켜서 큰 복과 하늘의 큰 상을 받게 해 주셔야 옳은 것입니다. 사울왕에게도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다. 아나니아 삽비라에게도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책망하면, 혹은 죄를 징계하면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자발적으로 즉시 깨닫고 회개하고 자발적으로 충성할 때만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징계를 받고 회개할 때만 다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나 사울 왕이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고집스럽게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큰 복을 주셨다가도 모두 거두어 가실 뿐만 아니라 큰 재앙까지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성경의 상급차등을 가르치는 명백한 성구 몇 절을 제시하겠습니다. 첫째 성구는 누가복음19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므나 비유입니다.  비유를 보면 주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상을 주는 것에 차등이 있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고을 권세를 주지만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 권세 밖에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후 상급에 차등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자 바클레이까지도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후 상급에 차등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바클레이는 “이것은 보상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훌륭하게 일한 보수는 보다 더 중대한 일을 맡는 일이었다(바클레이 누가복음주석: 338쪽)”고 말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므나 비유를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주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내세의 상급에 층계가 있다.(고전3:15 참조)"(공관복음 주석: 686쪽). 이 본문을 박윤선 목사님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누가 해석하든지, 어떻게 해석하든지 억지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고린도전서 3장 11절부터 15절 까지의 구절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성구를 보면 분명히 공력이 남아 있어서 상을 받는 사람이 있고 공력이 불타서 겨우 구원만 받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을 "해를 받는다 함은 상급을 잃는다는 뜻이다.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음은 위기일발의 위험을 피하여 겨우 구원을 받음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본문의 뜻이 분명하므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직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확실한 말씀을 무시한 채 상급차등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음은 요한계시록 3장 11절부터 12절까지의 구절입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은 분명히 "네 면류관은 빼앗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지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충성을 해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다시 불충성하거나 범죄하면 그 자격을 잃을 것이며 남다른 헌신을 해서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다시 악하고 게으르게 되면 그 자격을 잃을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급의 차등을 증거하는 분명한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상급차등부정론자들의 견해대로라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어야 옳습니다. "너희는 이미 상(구원이라는 상)을 얻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구원을 상으로 얻은 너희지만 앞으로 또 다른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 말씀은 "만일 너희가 달음질을 게을리 한다면 상을 잃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경은 상급의 차등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차등 부정론자들은 뜻이 모호한 몇 구절의 성경으로 뜻이 분명한 상급차등론을 부정하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왜 상급균등자들이 그런 주정을 들고 나왔는가를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아마도 이들이 상급차등부정론을 들고 나온 원인은 기독교가 지나치게 기복주의와 이상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소홀히 취급하는 데 대한 반발 내지는 개선책제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발도 좋고 개선책도 좋지만 성경대로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충성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그렇게 외쳐도 실제로 그렇게 충성하거나 목회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은 매우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자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상급을 마련해 두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상급을 제시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가 대가없는 일에 충성하는데는 한계를 느낀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 표현대로 '상까지 걸고' 충성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충성하는 동기가 첫째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요, 둘째는 이 땅의 복과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내세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충성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극히 일부 사람들은 워낙 신앙이 돈독하고 인격이 훌륭해서 내세의 상급이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구원의 은혜만으로 충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합니다. 예외를 보편화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에 물이 들면 목회자들은 목회의욕이 꺾이고 성도들은 충성과 헌신이 약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상급균등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자들은 마치 자기들은 이미 받은 상급에 감사하며 충성하므로 매우 고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상급차등론자들은 이미 받은 상급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더 상급으로 받으려는 욕심을 부리므로 매우 저질스러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상급균등론자들은 '모든 것은'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마땅한 무익한 종이므로 상급을 바라보고 충성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반쪽 진리만 믿는 어리석은 믿음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상급균등론자들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원칙 때문에 천하의 바울 사도 같이 충성된 사람도 남에게 상을 받으라고 전파한 후에 자기가 상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며 늘 자기를 처 복종시키며 상 받는 일을 하기를 힘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사람이 다 상을 받는 것이 아니며 열심히, 법대로, 절제하며 경기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는 말씀을 한 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상급에 관한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것은 신자가 궁극적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해석하셨으며 매튜핸리는 이 말씀을 '복음을 전하는 자라도 면류관을 놓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 사도의 두려움을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경주자의 두려움을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메달을 탈 등수에서 탈락한 선수의 비참함을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불 가운에서 겨우 구원만 얻는 안타까움을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진정으로 바울 사도마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신앙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매도하시겠습니까?

다른 성경도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렘 16:12-13)”

너희가 범죄함으로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훼손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나타난 복과 상급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다 범죄하며 살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처음에는 권면하십니다.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충성하면 약속하신 복과 상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면 책망하시고 그래도 안 듣고 고집을 부리면 벌을 주시고 그래도 안 들으면 죽이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무한한 은혜로) 복을 주시는 법도 없고 절대주권으로(무한한 은혜로) 상을 주시는 법도 없습니다. 복과 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처리하십니다. 복을 받느냐 상을 받느냐는 우리가 할 탓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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