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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상급(?) 정용섭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분분한 것 같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상급이 이 땅에서 행한 노력의 결과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황금면류관을 받고 어떤 사람은 개털모자를 받는다는 식으로 하늘나라의 성격을 희화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어떤 사람은 넉넉하게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부끄럽게 구원받는다고도 한다. 간혹 하늘나라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늘나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게 좋은 집도 있고 허름한 집도 있는 것이다. 십일조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집에서 살고 헌금을 변변치 않게 한 사람은 당연히 누추한 곳에서 산다. 절대적인 생명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이렇게 인간의 판단에 따른 상대적인 나라로 깎아내리는 이유는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며, 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게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은 것 같다. 신자들의 영적인 삶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이런 상급론을 억지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를, 그 절대적인 생명의 나라를 세속적 욕망으로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불신앙이다. 그런데 왜 이런 불신앙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끼는 걸까?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그들이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거의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교회 지도자나 일반 신자들이 성서를 모르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전혀 모르면서도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가 모른 것을 단지 절대화할 뿐이다. 그들은 성서를 단지 문자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일 뿐이지 그 성서에 어떤 신학적 사유가 개입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아니 성서 텍스트와 신학적 사유를 분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무지를 합리화할 뿐이다. 예컨대 욥기서는 기본적으로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문학작품인데도, 그것을 역사적인 것처럼 다룸으로써 마귀의 인격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전하는 일이 많다. 성서는 그 안에 역사와 존재 전체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들어있다.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어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들, 우주의 광대함과 오묘함, 악과 선의 결합, 삶의 무의미와 허무, 인간 삶과 행위의 모순들, 수많은 인간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거친 사람들이 그 당시의 세계관에 근거해서 그 경험과 해석을 진술한 것이 성서다.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인식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그 하나님 나라와 플라톤의 이데아는 어떤 관계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에서 말하는 그 형상(에이도스)과 성서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계일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의 ‘도’는 하늘나라와 어떤 관계일까? 이런 전반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없다면 하늘나라는 결코 우리의 인식에 잡히지 않는다. 혹시 성서만 보더라도 하늘나라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성서를 훨씬 심층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소극적으로 표현해야만 한다. 물론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인식이 충분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성서가 말하는 하늘나라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성서의 하늘나라는 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그런 모습에 머물지 않고 종말론적으로 훨씬 깊은 절대적인 세계로 열려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심지어는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우리는 성서의 세계를 전혀 모른 채 자기 확신, 자기 신념, 자기의 주관적 경험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주관적 경험 안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공연히 흥분하고 남을 선동하는 게 아닐까? 어떤 목사는 신자들에게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 역설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기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걸까?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고, 부지런을 떨 때도 있다. 게으름은 악이고 부지런한 건 선이라는 발상 자체는 성서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육체적인 성취에 근거를 둔 율법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피곤하지만 무리해서라도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게 부지런한 삶이며, 그게 곧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 목사는 이 세상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고 절규했다. 금욕적으로 살았던 세례요한과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님을 모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해서, 특히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주신 경고를 그는 반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 목사가 곧 시장바닥에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 데 왜 춤추지 않느냐고 친구들을 닦달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오용하면서 우리는 하늘나라에도 상급의 차별이 있을 것처럼 가르친다. 하늘나라에는 그런 일들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 오직 사랑과 평화와 기쁨만이 완전하게 지배하는 나라에는 1등도 없고 꼴등도 없다. 자본주의도 없고, 공산주의도 없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이다. 여기서 아무리 교회 충성했다 하더라도, 목사나 선교사로 순교했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그 반대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일단 그 말은 옳다. 구원은 우리가 생산하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절대적인 사건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세계를 약간이라도 의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하라 말라 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게 마련이다. 자기 형편에 따라서 부지런하게도, 또는 게으르게도 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처럼 금욕적으로 살 것이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처럼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아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늘나라의 상급은 그곳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주어졌는지 모른다. 평신도들은 하늘나라에 가서 좋은 상을 받지 못할까 염려하지 말고, 목회자들은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대신하려고 과욕을 부리지 말고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모두들, 공연한 걱정이나 욕심을 좀 묶어두고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나라를 향해 기쁨의 노래나 부르시라.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칼빈의 주장은 옳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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