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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보기도 연구 보고서(고신)

baromi 2006. 4. 23. 17:39

신대원에 올라와 있는

중보기도에 대한 연구 보고서입니다.

2005년 후반기에 총회에 제출된 자료입니다.

 

보고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고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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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 기도에 대한

   연구보고서







       수  신: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장

       제출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제출일: 2005년 9월 1일


       중보 기도에 대한 연구보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2004년 제5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중보 기도’(中保祈禱)라는 명칭의 사용이 타당한지 여부에 대한 연구를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위임하였다. 이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보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좋으냐 하는 것이다. 즉, 소위 ‘중보 기도’라고 하는 용어의 적절성 여부에 관한 질문이다.

  이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소위 ‘중보 기도’가 무엇인지, 그러한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 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I. 기도의 종류


  성경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2:1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간구’(懇求, 데에시스, request)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것을 말한다. ‘기도’(祈禱, 프로슈케, prayer)는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단어로서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포괄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 에게’(프로스)와 ‘소원하다’(유코마이)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도고(禱告, 엔튝시스, intercession)’라고 번역된 단어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감사’(유카리스티아)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네 가지는 기도의 모든 형태를 다 말한 것은 아니고 교회 성도들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해야 하는 기도의 주요 형태를 말한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한다. 여기에 보면 ‘기도’와 ‘간구’와 ‘감사’가 나타난다.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의 기도 전반을 말하며, ‘간구’는 그 중에서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아뢰며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 중 ‘간구’가 주된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간구’가 따로 언급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감사’는 여기서 우리가 기도할 때의 태도,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즉,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아뢰어야 함을 말한다.

  요한일서 1:9에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 자백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기서 ‘자백하다’(호모로게오)는 것은 다르게는 ‘동의하다, 승인하다’를 뜻한다. 즉, 우리가 죄 지었음을 인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 자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야고보도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여기서 ‘고백하다’(엑스호모로게오마이)는 숨겨져 있는 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 자백은 물론 자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주가 되지만(요일 1:9, 약 5:16), 또한 다른 사람들과 열조와 민족의 죄를  대신 고백하는 것도 있다(단 9:4-15, 느 1:5-7 등; cf. 대하 29:6).

  그 외에도 시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내용도 많이 있으며, 자신의 참담한 상태를 그대로 고백하는 내용도 많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회상하며 고백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처럼 기도의 내용에는 여러 형태들이 있으나 그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찬양 포함)와 ‘자백’, 그리고 ‘간구’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간구는 다시금 ‘자기 자신을 위한 간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마지막 유형 곧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간구)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개역판 성경에 의하면, 디모데전서 2:1에서는 ‘도고’(禱告)로 번역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동사로 사용될 때 대개 ‘위하여 간구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면 이 단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II. 도고(禱告)에 대한 신약의 용례


  ‘도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엔튝시스’는 신약 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 디모데전서 4:5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와 별 차이 없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여기서 ‘기도’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엔튝시스’인데, 이것은 식사 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서 ‘감사’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1) 디모데전서 2:1에서 이 단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도고’ 곧 소위 ‘중보 기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엔튝시스)의 동사형은 ‘엔튕카노’인데, 신약 성경에서 다섯 번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5:24에서는 (무리가 베스도에게) ‘청원하다, 간청하다, 간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로마서 11:2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송사하다, 간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위하여’(휘페르)란 전치사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27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8:34에서는 “그[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위하여 간구하다’(엔튕카노 휘페르)는 표현은 제3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7:25도 같은 의미에서 “그[그리스도]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 8:26은 “...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위하여 간구하다’의 원어는 ‘휘페르엔튕카노’인데, 전치사와 동사가 결합하여 한 동사가 되었다. 그 뜻은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intercede for)는 것이다. 즉,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성령이 ‘중보 기도’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도고’가 있는 반면에, 성도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도고’도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한다고 하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하였으며(롬 1:9), 에베소에서도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하였다(엡 1:16; 또한 살전 1:2, 딤후 1:3, 몬 4절). 여기서 “너희를 말한다(언급한다)”는 것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하는 ‘도고’ 곧 소위 ‘중보 기도’를 의미한다.

  빌립보서에서는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말한다(빌 1:4). 그리고 골로새서에서도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라고 한다(골 1:9). 위 두 곳에서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는 간구한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3:10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얼굴을 보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하고 섬기는 교회 성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열심히 간구하였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서도 ‘도고’ 또는 소위 ‘중보 기도’를 하라고 권면한다. 고린도후서 1:11에서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해 간구함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6: 18,19에서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원문: 모든)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한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또한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해” 간구하라고 부탁한다. 이처럼 ‘도고’ 또는 소위 ‘중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모든 성도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인데, 특별히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III. 구약의 예


  구약에서는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도고’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창 18:22-33).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러 갈 때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위해 간절히 간구하였다. 이러한 기도(도고)의 결과 롯은 유황불로 멸망하는 가운데서 건짐을 받았다. 모세는 출애굽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화(禍)를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다(출 32:11-14). 이처럼 백성을 위한 간절한 기도(도고,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고 진노를 면하게 하는 역사를 가져오게 됨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 열조의 죄를 대신 자백하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였다(단 9:3-19). 또한 히스기야 왕은 자신을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고치셨다고 한다(대하 30:18-20).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3년 6개월만에 다시 비가 내렸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기도(간구, 도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때때로 큰 역사를 이룸을 알 수 있다.


IV. ‘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사용 문제


  그러면 이러한 ‘남을 위한 기도 또는 간구’에 대해 소위 ‘중보 기도’(中保祈禱)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사용할 때의 문제점과 유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중보’라는 용어


  ‘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중보’(中保)라는 용어를 과연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은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中保)란 단어의 원어는 ‘메시테스’이다. 이 단어의 뜻은 바우어 사전에 의하면 ‘의견 불일치를 제거하거나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one who mediates betw. two parties to remove a disagreement or reach a common goal)으로 풀이하고 있다.2) 곧 ‘중재자’(mediator), ‘조정자’(arbitrator)란 뜻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8:6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9:15과 12:24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이상의 구절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중재자 되심을 말한다. 곧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것(죄)을 치우시고 화목케 하셨다는 의미이다(롬 5:8-11).

  그러나 갈라디아서 3:19은 모세에 대해 ‘중보’(메시테스)라고 말한다. 곧,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중보’란 말은 그리스도 외의 인간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豫表)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보(자)’란 말을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은 ‘중보(자)’란 말을 반드시 ‘그리스도’에게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20절에서는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단어는 단지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중보’의 성격, ‘중보’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3) 따라서 ‘중보’란 단어 자체는 원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두 편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2. ‘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중보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좋은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롬 8:34, 히 7:25), 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 사용되었다(롬 8:26). 반면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할 때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에 주로 ‘... 위하여 구하다/간구하다/기도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의 용례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위하여 간구하다, 중보하다”(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서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는 ‘위하여 구하다, 간구하다, 기도하다’(데오마이, 아이테오, 프로슈코마이 휘페르)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용례에 의하여 ‘중보 기도’란 용어를 예수님과 성령의 간구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여 한다고 하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간구하다, 중보 기도 하다’(엔튕카노)는 동사의 명사형인 ‘엔튝시스’(도고, 중보 기도)가 디모데전서 2:1에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모데전서 2:1의 ‘엔튝시스’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아가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기도의 종류 중에 나온다. 개역판 성경에는 ‘도고’(禱告)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단어의 동사형(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은 로마서 8:26,34과 히 7:25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우리를 위한 간구를 ‘중보 기도’라고 말한다면, 성도들이 성도들을 위해 하는 간구를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어상 둘 다 동일한 단어에서 왔으며, 성경이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성도를 위해 간구하는 것을 ‘도고’라고 부르고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도 ‘도고’라고만 부르고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중보 기도’를 언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서 ‘중보(자)’(메시테스)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꼭 그리스도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모세에 대해서도 ‘중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갈 3:19), 나아가서 ‘중보(자)’란 단어는 원래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용어임을 말하기도 했다(갈 3:20). 따라서 우리는 ‘중보’라는 단어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V. 만인제사장적 측면에서 본 ‘중보 기도’


  물론 구원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중재자)는 단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음은 분명하며,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딤전 2:5).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존재, 예를 들면 석가나 무하마드나 마리아를 의지하면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리아나 성자들 또는 천사들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새롭고 산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히 10:20)를 떠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시험을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히 4:16).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물론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기도하지만,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약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 대해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벧전 2:9). 성도들은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복음을 전파하며 기도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다. 특히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특별히 위정자들과 관리들을 위해 기도하며, 민족의 죄를 대신 자백하고 그들을 위하여 간구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중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또한 이런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세상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중보 기도’라는 용어는 신약 전체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 론


  신약 성경에 의하면 ‘중보 기도’라는 용어가 꼭 그리스도와 성령의 간구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도고’ 또는 ‘중보 기도’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간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성도의 기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신약 시대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므로, 다른 성도들과 세상을 향하여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한 ‘제사장적’ 직무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중보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보’라는 용어의 사용이 자칫 잘못하면 교리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곧,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중보 기도를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성도들의 중보 기도의 효력과 권위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중보에 근거하며 오직 그로부터만 온다. 성도들의 중보 기도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공로와 효력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며, 예수님의 중보 때문에 효력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간혹 빠지게 되는 함정은 자신들의 간절한 기도 자체에 어떤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중보의 효력만을 전적으로 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공로와 영광을 돌리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예수님의 중보의 무한한 공로와 효력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그것만을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기도를 힘써야 하며,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힘써야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상 역사를 운행하신다. 특히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기도가 활성화 되도록 교회는 지도하고 장려해야 할 것이다. 자칫 용어 문제로 행여나 기도의 불씨를 끄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은 현실 사회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지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더욱 기도에 힘쓰며,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겨자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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