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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벽기도회가 없으면 이단이라고요?

baromi 2005. 3. 10. 08:48
   새벽기도회는 이 땅에 세워진 소위 정통적인 개신교회 중에 보편적으로 자리매김 돼 있는 기도회의 한 유형입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새벽기도회 하나로 유명세를 탄 나머지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교회당 주변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교통 혼잡을 빚고 있다고도 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곧 새벽기도회를 통해 각종 문제를 해결 받을 뿐 아니라, 축복을 받는 결정적인 방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교회들은 한결 같이 새벽기도회야말로 교회적 성장과 개인적 구복(求福)의 지름길이라고 성도들을 채근하는 일에 열을 올리곤 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해마다 수능시험 때가 가까워 오면 크고 작은 거의 모든 교회가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자녀들의 ‘수능시험 고득점을 위한 몇 일 작정 기도회’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특별히 새벽기도회에 집중하는 모습 속에서 절정을 이루곤 합니다. 올 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종교를 빙자한 이기적 욕심의 발로입니다. 같은 시기에 사찰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100일 기도회가 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 이 시대의 기독교와 타종교간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모호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유무와 무관하게 새벽기도회의 시행여부가 곧 교회의 표지(標識)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새벽기도회가 있으면 정통교회이고, 없으면 이단시하는 경향까지도 은연중에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단성 시비는 교리(본질)와 관련된 문제이지 결코 형식(지엽)에 의해 좌우될 성질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그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적으로 결부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를 들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고 성경은 단정적으로 선언하고 있음에 반해,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거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주장한다면 이는 성경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처사로서 곧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이단성 여부를 확인하는 준거는 다름 아닌 성경이 말씀하는 바 교리체계를 기준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기도 문제에 연관시켜 보면 새벽기도회의 시행여부가 이단성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생활은 성도가 마땅히 행할 신앙의 도리입니다. 성경은 기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교회가 이를 묵인하거나 방관한다면 그런 성도와 교회는 정상적일 수 없음으로 인해 이단적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명백한 교리체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는 경우가 다릅니다. 새벽기도회는 기도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언제 기도할 것인가의 문제로서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은 언제 기도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해 무시로, 정해진 시간에, 지속적으로 등 다양한 관점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교리적인 측면이 아니기에 시행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결코 획일화 돼 의무적으로 시행할 필요는 없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벽기도회가 한국의 교회적 전통으로 자리매김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흔히 얘기하듯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던 경우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한국교회사를 통해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884년 9월 기독교인 의사 알렌의 입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개시된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1907년 소위 평양과 원산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부흥운동의 시발로 본격적인 교회부흥과 성장의 효시를 삼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소속된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된 소그룹 새벽 기도회가 점차 교회적 호응은 물론 외부에서 참여한 성도들의 합세에 힘입어 크게 활성화되면서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전 교회로 파급되는 계기가 마련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길선주 장로가 개인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갖게 된 배경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도교에 몸담고 있을 때,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던 습관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도교에서의 새벽예불이 기독교로 개종 후 새벽기도회로 바꿔졌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그의 새벽기도회 습관이 당시 대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경회와 기도회를 통해 새롭게 접목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자연스럽게 교회적 전통으로 파급돼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속에 요지부동의 기도방식으로 정착된 소위 통성기도와 철야기도 또한 이 당시 부흥회 기간 동안 정착하게 된 새벽기도회와 기원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 속의 새벽기도회의 기원이 이럴 진대, 우리는 이를 교리적 차원이 아닌 필요에 의해 정착된 교회의 전통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할 줄 압니다. 문제는 교회적 전통은 어떤 관점에서도 교리적 차원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리의 기원이 신적인 것에 반해 전통의 기원은 인간적인 필요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계명인 전통을 교훈으로 삼아 하나님의 교리체계보다 앞세우는 처사는 마땅히 지양해야 될 곡해된 관점입니다. 지금 새벽기도회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고안된 방편들은 교리체계와 비교해 절대적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보건대, 자칫 사람의 전통과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신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헛된 경배’가 성립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아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이런 위험성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막7:6-8입니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이상의 관점을 종합해 보면 새벽기도회는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계명으로서 곧 교회의 전통에 불과합니다. 기도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때문에 새벽기도회의 시행여부가 이단성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와 준거로 작용한다면 이는 확대해석과 확대적용일 뿐입니다. 따라서 새벽기도회는 개인의 필요와 형편,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시행에 있어서 자율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선택의 부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기도의 본질상 사람의 현세적 유익을 추구하는 기복(祈福)과 기원(祈願)과 구복(求福)의 방편은 더더욱 아닙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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