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그리스도와 미카엘

baromi 2006. 1. 4. 11:08
LONG

2.3. 계시록 12장

2.3.1. 계시록에 대한 기본적 이해의 방향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대한 이해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나는 요한계시록이 초대교회이후 앞으로 발생하게 될 미래적 사건들에 대하여 1장에서 22장까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첩적인 기록양식 혹은 병행적 구조를 따라서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는 11장15-19절, 14장 14-20절, 16장 17절-21절, 19장 17-21절, 20장 11-15절, 21장 8절 등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요한계시록이 요한이 밧모섬에서 기록하던 시점 이후의 사건들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성경이 종말적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종말의 시작에서부터 기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3.2. 계시록에서의 미카엘과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3회, 그리스도는 4회, 예수는 9회, 어린양은 27회 사용 사용된다. 그러나 요한이 천사와 관련하여 그 호칭을 언급하는 것은 단지 요한계시록 12장 7절뿐이다. 천사의 이름과 관련하여 요한서신에서 두 번의 예외가 나타나는데, 둘 다 타락한 천사에 대한 호칭을 언급한다(9:11; 12:4). 보통의 경우 요한은 천사를 “another angel,” “a mighty angel,” “the four angels”등으로 언급한다. 즉 요한은 천사와 관련하여 그들의 이름이나 개별적 특징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20장 1-3절에서 언급된 천사가 Michael이라고 하더라도 Michael이란 이름으로 칭하지 않는다. 이러한 요한의 서술 특징에서 보면, 12장 7절의 인물이 그리스도이든 혹은 천사이든, 요한이 “Michael”이란 이름으로 칭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만약 “미카엘이 그리스도이다”는 주장이 올바르다면, 요한이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서만 빈번하게 사용하던 예수 그리스도/어린양이라는 칭호대신 미카엘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미카엘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주장이 올바르다면, 요한이 12장 7장의 문맥에서 특별히 Michael이란 이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은 12장 7절의 문맥과 관련하여 요한이 사용한 자료가 유대묵시문학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나머지부분에서 천사의 이름을 결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그럴듯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이 12장 7절의 문맥에서만 Michael이란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질문할 수 있다. 첫째 요한이 12장 7절의 문맥에서 Michael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12장 7절의 문맥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Michael이 하늘로부터 용을 쫓아내는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2장의 문맥은 다음과 같다:

12장 1-6절 해산하는 한 여자와 그 아들에 대한 설명    용이 아들을 공격하려한다

12장 7-9절 미가엘의 하늘에서의 승리                  용이 땅으로 쫓겨난다

12장 10-12절 찬미                                  

12장 13-17절 땅에서 보호받은 여자                   용이 여자를 핍박한다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을 핍박한다


12장은 한 여자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여자는 발아래에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별의 면류관을 쓴 것으로 묘사되는데, 아마도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여자는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표현된다. 이 표현은 시편 2편 9절에서 메시야에 대한 묘사로 사용되었고 계시록 2:26-27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권세로써 교회에게 위임된 권세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아이는 그리스도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요한은 결코 Christ=Michael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는 먼저 넓은 문맥에서 12장 7-12절과 19정 11-17절을 비교하고 그후 12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Michael은 그리스도와 비교되는데, 이것은 12장 7-12절과 19장 11-17절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12장에서 묘사된 사단에 대한 미카엘의 승리는 그 성격상 부분적이다. 미카엘의 승리는 비록 실제적이지만 또한 앞으로 다가오게 될 것에 대한 선취이다.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났지만, 그러나 여전히 땅에서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행한다(12:12). 사단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패배는 19장 11절-20장 10절 이전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19장 11절-20장 10절에서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승리에서는 미카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늘의 군대를 이끈다. 즉 12장 7-12절에서 미카엘이 얻은 승리는 사단을 하늘로부터 단지 쫓아낸 것에 불과하지만, 19장 11절-20장 10절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단의 위협을 영원하고 완전하게 끝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카엘을 언급한 요한의 목적들중 하나를 알 수 있다. 즉 비록 사단이 하늘로부터 쫓겨났지만, 그러나 사단은 땅에서 여전히 많은 일을 행하고 있다. 즉 하늘에서 사단을 쫓아낸 승리는 불완전한 승리이고, 따라서 하늘에서 사단을 쫓아낸 승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요한의 목적이다. 그래서 요한은 12장 7절의 불완전한 승리에 대한 묘사에서 전통적으로 αρχιτρατηγος로 알려진 미카엘을 하늘 군대를 지휘하는 대안적 리더로써 제시한다.

이러한 설명은 12장과 19장11절-20장 10절의 두 단락들이 연결된 이미지라는 것에서 지지된다. 두 단락 모두에서 군대적 이미지와 전투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단락 모두(12:5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19:15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시편 2편 9절(LXX)의 흔적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ποιμανεις αυτους εν ραβδω σιδηρα(MT לגרךב טבֱשְׁב מע󰙡ת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 12장 5절과 19장 15절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다. 즉 12장 5절과 19장 15절에서 시편 2편 9절에 대한 인용은 각각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갈 아이”(12:5)와 흰말을 타고 하늘군대를 지휘할 분(19:11ff)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시편 2:9의 인용/흔적이 나타나는 다른 유일한 곳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 2장 26-27인데, 거기에서 이 어구는 두아디라교회의 이겨낸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나타나는데, 요한은 여기에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덧붙임으로 나와 천사들 사이를 분명히 구별한다. 그렇다면 시편 2편은 어떠한가? 시편 2편은 미카엘 혹은 천사에 대한 언급이나 흔적이 있는가? 시편 2편은 전통적으로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시편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시편에서 우리는 천사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시편은 철저히 물질적/육체적이다. 핵심구절은 7-9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여기에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것은 12장 10-12절의 찬미이다. 이 찬미에서 하늘에서 사단을 쫓아낸 미카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존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는 승리자와 정복자로 나타나지만(3:21; 5:5; 17:14; 19:14-15)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승리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5:6; 12:11). Bauckham의 말처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결정적인 승리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요한에게 있어 어린양의 승리의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순교에서 현실화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의 참여를 근본적으로 구성한다(6:9; 7:14; 12:11).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순교하게 되는 6장 9절과 순교자들이 어린양의 피와 그의 증거하는 말을 통하여 사단을 이기는 12장 11절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그들의 사단에 대한 승리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사단에 대한 그들의 정복은 어린양의 피를 통해 완성되고 그들의 승리는 어린양의 승리에 의존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독자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요한의 근본적인 관심을 보여준다(2:7,11,17,28;3:5,12,21;15:2;21:7).

이 모든 것은 미카엘의 승리가 그 자신의 권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군대장관이라는 미카엘의 전통적인 역할은 천상적 군대의 천사적 리더에 대한 논리적 선택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천사적 리더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즉 만약 요한의 주된 관심이 그리스도가 이루었고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그 승리에 있다면, 왜 미카엘이란 존재가 나오는가?

Caird는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적 승리에 대한 하늘에서의 짝으로서 하늘에서의 미카엘의 승리를 제시한다. Caird는 12장4-5절에서 그리스도의 전적으로 지상적인 삶이 요약된다고 말한다. 즉 아이의 출생과 그 아이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려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나타낸다. 그래서 7-9절의 하늘에서의 전쟁은 메시야의 출생과 즉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번째 관점으로서 여겨진다. 이것은 12장에서 하늘의 군대를 이끄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미카엘인 이유를 설명한다. 요한은 지상적 사건들은 천상적 사건들에 반영된다 라는 묵시문학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서 10장 13-21에서 미카엘이 대적하는 바사의 왕들(바사를 보호하는 신들)이 지상의 바사의 왕들에 조화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요한계시록 1:20이하에서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내는 서신들이 일곱교회를 책임진 천사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실제적인 전투를 하는 것은 미카엘이 하늘에서 용을 쫓아내는 전투와 상응한다. 많은 주석가들이 언급하듯, 사단의 패배의 계기로서의 십자가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에 잘 나타난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1-32).

요약하면, 유대 전통과 함께, 요한은 미카엘을 군사적 의미에서 하늘의 군대를 이끄는 존재로서 이해했고 또 법정적 의미에서 고소자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을 변호하는 존재로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미카엘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종속되고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요한은 미카엘을 단 한번만 언급하는데 심지어 이때에도 요한은 12:10-12절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덧붙임으로써 미카엘의 승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고 의존하는 것으로서 주의깊게 해석한다.


2.4. 유다서 9절

유다서 9절은 분명히 “모세의 승천”을 자료로 사용하였다. “모세의 승천”의 불완전한 라틴어 양피지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사라졌다. 이 마지막 부분에 사탄과 미카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논쟁한 것이 기록되었던 것은 오리겐의 Princ. III.2.1에 나온다. 오리겐이 성경을 인용할 때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을 볼 때에 사실일 것이다. 또한 Gelasius Cyzicenus의 Ecclesiastical History, ii.21.7와 교부들의 자료들에도 나타난다. 사실 이런 자료들에서 사단과 미카엘의 논쟁자체의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자료에서 사단이 모세의 시체를 요구한 이유는 모세가 살인자였기 때문이고, 어떤 자료에서는 사단이 물질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모세의 시체를 요구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유다서에서는 이런 세부적인 사항들을 모두 생략한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는 미카엘의 말인데, 이것은 스가랴 3장 2절(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배경은 재판정이다. 따라서 유다서 9절도 재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한편 사단과 미카엘의 논쟁은 유대적, 기독교적, 이슬람적 자료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자료들에서, 미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천군천사들 앞에 새로 창조된 아담을 세우고 천군천사들에게 경배할 것을 명령한다. 대부분의 천군천사들이 새로 창조된 아담에게 경배하지만 오직 사단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사단은 교만하게도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단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화가 난 사단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는 유다서에서 사단과 미카엘이 논쟁하는 것이 법정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서 미카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변호자로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다서는 미카엘과 사단의 논쟁의 대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그 논쟁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다서는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는 그대로 살려둠으로써 근본적인 관심이 여기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유다서는 미카엘이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고 기록한다. 유다서 내에서 이것은 천사중의 우두머리인 미카엘조차도 명백하게 문제가 있는 사단에게도 훼방하는 판결(저주하는 판결)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호소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즉 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훼방하는(저주하는) 판결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미카엘의 관계라는 우리의 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핵심은 첫째 천사장 미카엘은 사단에 대한 저주의 판결을 스스로 하지 못하였고, 둘째 따라서 천사장 미카엘은 사단에 대한 저주의 판결과 관련하여 주님에게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에 대한 판결을 하지 못하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카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기능적인 유사성이 있다. 즉 미카엘이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변호자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변호자라는 이미지가 신약성경에는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약성경에서는 미카엘이 사단에 대하여 스스로 판결을 내리지 못한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로서 자신의 권세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 심판한다는 이미지도 있다. 즉 미카엘과 그리스도는 변호자라는 기능적 유사성을 가지지만, 그 권위는 천지차이이다. 더욱이 유다서는 스가랴서의 “여호와께서”를 “주께서”로 바꿈으로써 그 판결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다서 내에서 “주”라는 표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된다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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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44   글쓴이 : andere28
조회 : 8   스크랩 : 0   날짜 : 2006.01.04 07:21

글을 적고 보니 그냥 그렇습니다. 세밀한 부분들에서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만, 시간이 없어서 수정하지 않고 올립니다. 그리고 글이 끝맺음을 확실하게 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양해를.... 

 

 

그리스도와 미카엘


1. 방법론과 전제

미카엘이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장을 살펴보기 위하여 우리는 신약성경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즉 미카엘이 그리스도이다 라는 주장이 a. 직분적 동일성, b. 역할적 동일성, c. 정체적 동일성, d. 예시적(모형론적) 동일성 중의 어느 것을 의미하든지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출발해야만 하며 혹은 미카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라는 주장도 신약성경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 주장이 무엇이든지 간에 신약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고 신약에 근거하여 구약을 살펴야 하고 나아가 초대교회와 유대묵시문학을 살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파악하는데 빛을 던져주는 많은 자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은 오직 신약성경에 근거해서만 그 의미가 조명되고 밝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일지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역사상의 한 시점에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밝혀주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은 구약과 유대문헌들을 알고 있었고 신약성경에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오직 신약성경에서만 메시야가 역사상의 특정한 기간동안 특정한 곳에서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바로 그 예수였음을 확증한다. 즉 신약성경이 구약이나 유대묵시문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모형과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오직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계시와 그 삶을 통한 확증, 그리고 그와 함께 삶을 살았던 제자들 그룹의 증거에 근거하여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이 과정은 해석학적 순환을 이룬다. 즉 신약에 기초하고 출발하여 구약을 살핀 후, 역으로 구약에서의 흔적을 통해 신약에서의 증언을 다시금 확증하는 해석학적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점과 근거는 신약성경의 증언이지 구약성경의 모형들이 아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은 인간의 역사 인식에도 합당하다. 인간의 역사인식 혹은 재구성은 이미 드러나고 결정되고 확고해진 결과에 근거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이미 완결된 사건에 대해서만 역사인식과 역사재구성이 이루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인식과 재구성은 언제나 과거사건에만 관계될 뿐이다. 현재와 미래와 관련해서는 언제나 “이미 확고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불확실하고 변동가능한 예측”으로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으로서 인류역사전체를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지만 단기적인 혹은 장기적인 역사적 사건의 흐름에 대해서는 인식가능하고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불확실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미 발생하고 끝이 난 어떤 특정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역사적 인식과 재구성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대해서 역사적 인식과 재구성을 할 수 있지만, 지금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한 역사적 인식과 재구성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적 인식과 재구성의 특성을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도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역사의 결과이며 목적이며 마침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근거하여 그 앞선 시대의 역사적 흐름과 그 이후의 역사적 흐름을 인식하고 평가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역사적 절정”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는 역사의 절정이 아니라 역사의 마침이며 목적이며 결과, 즉 텔로스이다. 따라서 신학적 사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즉 신약의 증언과 기록이 그 앞선 시대의 메시야에 대한 기록과 이해, 그리고 그 이후의 메시야에 대한 기록과 이해에 대한 판단기준이며 근거가 되어야 한다. “나비효과”처럼,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건들이 인과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역사의 텔로스로 역사상의 특정한 시공간에 존재했던 한 인물 예수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듯하다.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예수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시공을 초월한 그리고 내재한 하나님이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결코 역사의 텔로스가 아니며 또한 될 수도 없고, 나아가 그를 통한 구원이 그 이전의 전역사와 그 이후의 전역사를 결코 포함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개념을 기억하면서 미카엘과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신약성경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하자.


2.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

Michael과 그리스도를 동일한 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었던 견해이고 종교개혁가들조차도 이 견해를 일부 수용한다. 이 견해는 초대교회의 기독론에 영향을 준 세 가지 흐름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한 결과이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유대묵시문학과 천사들에 대한 유대적 이해의 영향을 받은 초대교회의 기독론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1. The angelic Christology(Christ as an archangel: Ps.Cyprian's De Centesima, Epiphanius's description of the Ebionites and the sect of the Elchasaites, Tertullian's attack on Valentinian Christology, Testament of Solomon, Coptic Gospel of Thomas, Gospel of Nicodemus, Testament of Dan, Epistle to Diognetus, The Prayer of Joseph, the Pre-existent angel of the Magharians. / Christ Disguised as an Angel: Epistula Apostolorum. 14, Sibylline Oracles. viii. 456-462, Pistis Sophia 7-8, the Ascension of Isaiah). 2. Christ as Michael(The Shepherd of Hermas, P. Oxy. 1152, The Gospel of Hebrews, Epiphanius Pan. xxx. 16.2, The Pseudo-Clementines, The Ascension of Isaiah). 3. The Theophanic Angel Christology of the Fathers(Justine Martyr, Theophilus, Irenaeus, Origen, Hippolytus, Tertullian).


미카엘에 대한 유대묵시문학과 랍비들의 견해는 이런 세 가지 흐름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흐름은 주로 에비온이나 발렌틴등 이단적 주장들에서 찾아볼 수 있고, 두 번째 견해는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 흐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흐름은 사실상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지만, 결코 정통적인 교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통적인 많은 교부들은 미카엘과 그리스도를 결코 동일시하지 않으며, 단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 혹은 천사와 관련하여 몇몇 기능적인 비유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가들이 미카엘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초대교회의 복잡한 상황과 이해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듯 "미카엘"이 천사인가 혹은 천사가 아닌 다른 존재인가에 대해 성경본문상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천사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초대교회의 복잡한 상황과 이해는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흐름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황이다.

이제 미카엘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앞서 말하였듯, 여기에서 나는 유대묵시문학, 랍비들의 견해, 혹은 교부들의 견해를 살펴보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미카엘이란 이름이 사용된 본문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카엘과 그리스도가 동일한 분이다 혹은 미카엘이 성육신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이다 라는 견해는 성경본문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미카엘 사이에 기능적인 유사성이나 비유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미카엘과 그리스도의 기능적인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신약성경에서 미카엘과 그리스도가 기능적인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그리스도 혹은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는 것이다. 나의 이 주장을 성경본문이 지지한다는 것을 차례로 살펴보자.


2.1. 천사/사자라는 용어의 혼란스러움

우리말 번역의 천사/사자 라는 용어는 매우 복잡한 용어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8-19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사람을 살펴보자. 18장 1절은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고 시작하는데, 계속된 구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מישׁנא השׁלשׁ LXX: τρεις ανδρες)이 맞은편에 섰는지라”고 설명한다. 즉 여호와께서 사람 셋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계속된 설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18장 9절에서는 “그들”이라는 복수가 사용되지만(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ויאמרו), 18장 18장 10절에서는 “그”라는 단수가 사용된다(그가 가라사대; ויאמר). 즉 여기에서 복수와 단수는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나아가 13절에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가 여호와임을 밝힌다(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16절 이하에서도 볼 수 있다. 16절에서는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다”고 밝히는데, 1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한다. 22절-33절에서는 여호와와 아브라함은 계속 대화를 하고, “그 사람들”은 소돔으로 간다. 33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18장의 장면에서 우리는 “세 사람들,” “그들,” “그,” “여호와”라는 표현들이 실제적으로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9장1절에 들어가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간 사람들을 “!ykia;l]M'h' ynEv]”(그 두 사자들, 혹은 그 두 천사들)이라고 부른다. LXX는 19장의 그 두 사자들(!ykia;l]M'h' ynEv])을 οι δυο αγγελοι (그 두 천사들)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19장 10, 12, 17절에서는 그들을 האנשׁים(LXX: οι ανδρες;그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대에는 사자라는 용어와 천사라는 용어, 그리고 사람이라는 용어가 관점에 따라 사용되며 동일한 존재를 지칭할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2. 미카엘은 천사/사자인가?

흔히 미카엘은 “천사장”으로서 천사들중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카엘은 천사로서 천사들 중에서 최고 우두머리인가? 혹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로서 천사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

우선적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확인할 수 없다. 미카엘이란 이름이 언급되는 요한계시록 12장7-9절에서 미카엘이 천사이다 혹은 미카엘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이다 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이곳에서는 미카엘이 단지 “천사들을 지휘하는 자”이고 천사들은 “그의 사자들”이라고만 나타난다.

미카엘이란 이름과 “천사장”(ο δε Μιχαηλ ο αρχαγγελος)이란 표현이 함께 나오는 것은 유다서 9절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천사장”이란 표현이 미카엘이 천사이다 혹은 미카엘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가? 사실 우리는 이 표현만으로는 알 수 없다. αρχαγγελος(천사장)는 “처음이 되다, 장,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의 αρχω와 천사라는 의미의 αγγελος가 결합된 말이다. 즉 이 구절에서 천사장 혹은 천사를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천사이어야만 하는 이유나 천사와는 다른 존재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경에서 미카엘이란 호칭이 언급되는 곳은 다니엘 10장 13절, 21절과 다니엘 12장 1절이다. 다니엘 10장 13절은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인데 여기에서 미가엘은 군장들중 하나(םינשׁארה םירשׂה דחא)로 언급되는데, רשׂ는 영주, 장관, 지배자, 관리자, 다스리는 자, 청지기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사국 “군”(סרפ תוכלמ רשׂוך)을 언급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LXX는 이 어구를 μιχαηλ εις των αρχοντων των πρωτων라고 번역한다(one of the chief princes. KJV, NIV, NASB 등).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미카엘과 바사국 “군”을 나타내는 רשׂ외에 바사국왕들(סרפ יכלמ)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즉 여기에서 다니엘에게 말하고 있는 화자는 아마도 10장 5절이하에서 말하는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띠를 띠고 그 몸은 황옥같고 그 얼굴은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은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13절에서 바사국 군에게 막혀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렀다. 즉 여기에서 이 사람은 계층적으로 바사국 군(סרפ תוכלמ רשׂוך)보다는 상위이고 바사국왕들(סרפ יכלמ)과 동격이다. 그러나 미카엘은 바사국 군(סרפ תוכלמ רשׂוך)과 동격이다. 10장 21절은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뿐이니라”인데, 너희 군 미가엘은 םכרךשׂ לאכימ־םא 으로 LXX는 η μιχαηλ ο αρχων υμων으로 번역한다. םכרךשׂ은 רשׂ'의 남성단수형에 연계형어미인 남성2인칭 복수형이 붙은 형태로 “너희들의 영주, 장관, 지배자, 관리자, 다스리는 자, 청지기”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너희들”이란 복수연계형 어미이다. 즉 여기에서 “너희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10장 21절에서 “너희들”은 다니엘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즉 미가엘이란 호칭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주, 장관, 지배자, 관리자, 다스리는 자, 청지기를 의미한다. 즉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미카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주인인 “왕”(ךלמ)이라고 칭해지지 않고 단지 “군”(רשׂ)라고 칭해진다. 12장 1절은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라고 기록한다. 이 구절에서 대군 미카엘이라고 번역된 לודגה רשׂה לאכיִ󰗬(LXX μιχαηλ ο αρχων ο μεγας)은 “위대한 영주, 장관, 지배자, 관리자, 다스리는 자, 청지기”라는 의미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계속해서 미카엘은 רשׂ라고 칭해진다.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카엘이 이스라엘을 호위하는 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대묵시문학에서는 이런 의미를 계승하여 미카엘을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자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실제적인 왕과 주인과 구원자는 여전히 여호와였다.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우리는 미카엘이 천사이다 혹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로서 천사들을 다스리는 존재이다는 것을 알수 없다. 위의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첫째, 미카엘은 “왕”(ךלמ)과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다른 존재인 “군”(רשׂ)이라 칭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미카엘과 미카엘이 돕는 자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셋째, 미카엘이 돕는 자는 “바사국 왕들”과 동격이며,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띠를 띠고 그 몸은 황옥같고 그 얼굴은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카엘이 천사이든 혹은 천사와는 다른 존재이든지간에 미카엘 혹은 미카엘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존재는 “왕”이라고 칭해지는 존재와는 다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