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단의 기관지인 <기독교보>의 사설이 논리에 맞지 않는 글의 전개는 물론 상식이하의 주장을 거듭하고 아전인수 격의 해석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주지하듯 신문의 사설은 그 매체의 얼굴이자 핵심논지와 방향성에 다름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신교단지의 사설은 고신의 신학이자 신앙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보>에 실린 최근의(2005년 7월과 8월) 사설들을 보면 고신 교단의 신학이 무엇인지, 또 고신이 어떠한 신앙노선을 가진 것인지 모호해 짐은 물론 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있는 분이 집필하고 계신 것인지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교단의 신학과 달리 현실적인 논리로 사안에 접근한다든지, 교단 집행부에 대한 맹목적인 협력이 참된 고신의 신앙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음 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보여진다.
최근 <기독교보> 사설의 논조는 우선 부도상황의 고려학원을 살리는 것에 ‘올인’한 듯 보인다.
8월 24일자 “안양일심교회의 교단사랑”, 8월 10일 “교단출신 교수들의 성명서”, 7월 27일 “30억원 모금에 동참하라”, 7월 6일 “우선순위를 역행할 때” 등 두 달 동안만 살펴보아도 고려학원 회생에 얼마나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일관된 논리는 결코 교단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는 일방적인 것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사설의 논조는 “고려학원을 위해 고신교단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학원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데 집중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교회현장에서 제기되는 책임규명과 재발방지 대책마련, 신학적인 검토 등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언론의 기능 중 독자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성격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한쪽의 주장만을 거듭하며 독자들을 세뇌하거나 우민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양쪽의 견해를 전하면서 언론의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싣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고 다른 쪽의 주장에 대해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식의 단언을 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것은 책임 있는 교단 언론에서 할 일이 아닐 것이다.
둘째로 비슷한 관점에서 <기독교보>의 사설을 집필하시는 분의 성향이 교단에 존재하는 정치그룹들의 주장 중 어느 일방의 것에 충실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단지의 논조는 교단의 신학이나 정신을 반영하는 것보다는 소위 ‘집권한’ 정치그룹의 입장을 반영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작금의 사설에서의 접하게 되는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본다.
교단 내 고려학원에 대한 입장은 잘잘못을 따질 것 없이 무조건 회생시켜야 한다는 측과, 책임을 가리고 처벌을 하며 경우에 따라 제3자 인수 등의 방식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지는데 교단 사설의 논조는 전자의 입장에 지극히 충실하다.
필자가 자신의 글에서 일관된 논리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나 그것이 정당한 방법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반대논리를 가진 분들의 견해를 납득시킬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음은 물론 교단지의 역할 중 하나인 교단화합도 일궈낼 수 있는 것이다.
교단신학대학원 입시부정 건에 대한 사설(5월 30일 “입시부정이라니)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기독교보>의 기사(5월 18일 “신대원 부정입학 공방 점입가경)의 논조와 사설의 논조는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보다 뒤에 실린 사설에서는 기사와 전혀 다른 입장의 논조를 보인다. 다른 언론도 아니고 같은 <기독교보>의 기사와 상반되는 사설이라니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사설에서는 당시 신대원장을 겨냥, ‘조작’, ‘획책’이라는 도발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고 해서 그랬는가’라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전 신대원장과 다른 정치적 노선에 서 있는 분이 사설을 쓰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집권세력의 정치적인 노선에 따라 교단언론의 논지가 갈지자(之) 걸음을 걸어도 되는 것인지, 또 기본적인 언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아닌지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전통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 교단의 신학과 너무나 다른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이다.
8월 24일 “a교회의 교단사랑”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필자는 그 교회가 “교단이 어려울 때 3억원을 쾌히 내놓았고 최근에는 50여명의 교단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면서 ‘주머니가 세례받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세례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집필자에게 있어서 오늘날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학원을 위해 돈을 내놓는 이는 중생한 이이고, 그렇지 않는 이는 중생한 자가 아니란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성경적 관점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과거 고려학원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재정지원을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동시에 이를 추진해 가야 옳은 것이 아닌가.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또는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무조건 지원하라는 것은 개혁주의적 입장이 아님을 이미 교단 신학자들이 수차례 경고한 일임에도 필자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사설 집필자의 편향된 논리는 7월 27일자 “30억 모금에 동참하라”란 제하의 사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지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멈추고 내일을 향해 발돋움해야 한다. 부도기관 활성화를 위해 30억을 모금하는 일에 교단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분이라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의 신학과는 분명히 다른 신학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지난 8월 10일자 “교단출신 교수들의 성명서” 제하의 글에서는 이분의 주장이 도를 지나쳐 보일만큼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단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위로의 글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정죄하며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중략) 유산인 믿음이 소중하다면 재산도 귀중한 것이다.(중략) 교단지도자들의 부도덕성, 무능력과 기관책임자들의 안이함과 불성실, 불신앙, 파벌정치를 원인으로 지적하는데 잘못된 여론조성과 인식의 혼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때 도움이 안되는 충고를 중단하고 성명서 종이 값이라도 (학원을 위해) 도와라.”
이쯤 되면 귀를 틀어막고 외길로 마구 달려가는 고집스러운 사내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사설집필자는 교단 출신 교수들을 ‘유치하고 철없으며 무책임한’ 자들 정도로 폄하하면서 그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기자에게는 교단지의 사설을 쓰는 분의 자세로는 합당치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넷째로 사설의 논지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8월 17일자 “교단간 일치는 불가능한가”라는 사설에서 교단간 일치에는 고백과 신앙의 일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붙이고 “우리는 50년이 넘도록 2천 교회를 못넘었다. 더 큰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10년전 교세가 비슷했던 성결교단이 이미 우리를 추월했고 기장도 바짝 추격해 왔다. 부산과 서부경남의 작은 교파가 아니라 한국을 영권으로 지배하는 큰 교단이 되자”고 했다. 교단일치 운동의 이유가 덩치를 키워 큰 일(?)을 하기 위해서이거나 한국을 영권으로 지배(?)하는 교단이 되기 위해서라고 하니 기본적인 성경에 대한 이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지경이다.
7월 6일자 “우선순위를 역행할 때”는 그 정도가 더하다.
“어떤 성도는 강남에서 몇 명의 자식들에게 집을 한 채씩 유산으로 주면서 교회당 짓는데 2천만원 밖에 헌금 못했다. 씁쓸하다. 이는 세속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뒤이어 “우리도 록펠러처럼 하나님의 뜻을 높여 5천 교회당을 짓고 건강의 축복을 받고 장수한 것처럼 우선순위로 살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세속주의를 지적하면서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에 충실한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7월 4일자 “기독교보 50주년에 붙여”란 제목의 사설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개혁주의 신문’ <기독교보>를 한부 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근거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이랄지 치기어린 한마디랄지 의아할 따름이다.
고신교단의 교인 중 한사람인 기자에게 최근 고신 교단지의 사설은 여러모로 우려와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사설은 결코 어떤 특정인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견해를 피력하거나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곳이 아니다. 사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사안별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그 사설로 인해 그 언론은 자칫 ‘어용언론’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교단이 어려울 때 교단지의 역할의 중요함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상식이하의 사설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 신문의 사설은 그 매체의 얼굴이자 핵심논지와 방향성에 다름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신교단지의 사설은 고신의 신학이자 신앙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보>에 실린 최근의(2005년 7월과 8월) 사설들을 보면 고신 교단의 신학이 무엇인지, 또 고신이 어떠한 신앙노선을 가진 것인지 모호해 짐은 물론 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있는 분이 집필하고 계신 것인지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교단의 신학과 달리 현실적인 논리로 사안에 접근한다든지, 교단 집행부에 대한 맹목적인 협력이 참된 고신의 신앙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음 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보여진다.
최근 <기독교보> 사설의 논조는 우선 부도상황의 고려학원을 살리는 것에 ‘올인’한 듯 보인다.
8월 24일자 “안양일심교회의 교단사랑”, 8월 10일 “교단출신 교수들의 성명서”, 7월 27일 “30억원 모금에 동참하라”, 7월 6일 “우선순위를 역행할 때” 등 두 달 동안만 살펴보아도 고려학원 회생에 얼마나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일관된 논리는 결코 교단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는 일방적인 것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사설의 논조는 “고려학원을 위해 고신교단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학원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데 집중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교회현장에서 제기되는 책임규명과 재발방지 대책마련, 신학적인 검토 등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언론의 기능 중 독자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성격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한쪽의 주장만을 거듭하며 독자들을 세뇌하거나 우민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양쪽의 견해를 전하면서 언론의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싣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고 다른 쪽의 주장에 대해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식의 단언을 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것은 책임 있는 교단 언론에서 할 일이 아닐 것이다.
둘째로 비슷한 관점에서 <기독교보>의 사설을 집필하시는 분의 성향이 교단에 존재하는 정치그룹들의 주장 중 어느 일방의 것에 충실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단지의 논조는 교단의 신학이나 정신을 반영하는 것보다는 소위 ‘집권한’ 정치그룹의 입장을 반영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작금의 사설에서의 접하게 되는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본다.
교단 내 고려학원에 대한 입장은 잘잘못을 따질 것 없이 무조건 회생시켜야 한다는 측과, 책임을 가리고 처벌을 하며 경우에 따라 제3자 인수 등의 방식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지는데 교단 사설의 논조는 전자의 입장에 지극히 충실하다.
필자가 자신의 글에서 일관된 논리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나 그것이 정당한 방법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반대논리를 가진 분들의 견해를 납득시킬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음은 물론 교단지의 역할 중 하나인 교단화합도 일궈낼 수 있는 것이다.
교단신학대학원 입시부정 건에 대한 사설(5월 30일 “입시부정이라니)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기독교보>의 기사(5월 18일 “신대원 부정입학 공방 점입가경)의 논조와 사설의 논조는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보다 뒤에 실린 사설에서는 기사와 전혀 다른 입장의 논조를 보인다. 다른 언론도 아니고 같은 <기독교보>의 기사와 상반되는 사설이라니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사설에서는 당시 신대원장을 겨냥, ‘조작’, ‘획책’이라는 도발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고 해서 그랬는가’라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전 신대원장과 다른 정치적 노선에 서 있는 분이 사설을 쓰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집권세력의 정치적인 노선에 따라 교단언론의 논지가 갈지자(之) 걸음을 걸어도 되는 것인지, 또 기본적인 언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아닌지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전통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 교단의 신학과 너무나 다른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이다.
8월 24일 “a교회의 교단사랑”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필자는 그 교회가 “교단이 어려울 때 3억원을 쾌히 내놓았고 최근에는 50여명의 교단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면서 ‘주머니가 세례받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세례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집필자에게 있어서 오늘날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학원을 위해 돈을 내놓는 이는 중생한 이이고, 그렇지 않는 이는 중생한 자가 아니란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성경적 관점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과거 고려학원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재정지원을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동시에 이를 추진해 가야 옳은 것이 아닌가.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또는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무조건 지원하라는 것은 개혁주의적 입장이 아님을 이미 교단 신학자들이 수차례 경고한 일임에도 필자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사설 집필자의 편향된 논리는 7월 27일자 “30억 모금에 동참하라”란 제하의 사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지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멈추고 내일을 향해 발돋움해야 한다. 부도기관 활성화를 위해 30억을 모금하는 일에 교단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분이라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의 신학과는 분명히 다른 신학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지난 8월 10일자 “교단출신 교수들의 성명서” 제하의 글에서는 이분의 주장이 도를 지나쳐 보일만큼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단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위로의 글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정죄하며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중략) 유산인 믿음이 소중하다면 재산도 귀중한 것이다.(중략) 교단지도자들의 부도덕성, 무능력과 기관책임자들의 안이함과 불성실, 불신앙, 파벌정치를 원인으로 지적하는데 잘못된 여론조성과 인식의 혼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때 도움이 안되는 충고를 중단하고 성명서 종이 값이라도 (학원을 위해) 도와라.”
이쯤 되면 귀를 틀어막고 외길로 마구 달려가는 고집스러운 사내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사설집필자는 교단 출신 교수들을 ‘유치하고 철없으며 무책임한’ 자들 정도로 폄하하면서 그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기자에게는 교단지의 사설을 쓰는 분의 자세로는 합당치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넷째로 사설의 논지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8월 17일자 “교단간 일치는 불가능한가”라는 사설에서 교단간 일치에는 고백과 신앙의 일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붙이고 “우리는 50년이 넘도록 2천 교회를 못넘었다. 더 큰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10년전 교세가 비슷했던 성결교단이 이미 우리를 추월했고 기장도 바짝 추격해 왔다. 부산과 서부경남의 작은 교파가 아니라 한국을 영권으로 지배하는 큰 교단이 되자”고 했다. 교단일치 운동의 이유가 덩치를 키워 큰 일(?)을 하기 위해서이거나 한국을 영권으로 지배(?)하는 교단이 되기 위해서라고 하니 기본적인 성경에 대한 이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지경이다.
7월 6일자 “우선순위를 역행할 때”는 그 정도가 더하다.
“어떤 성도는 강남에서 몇 명의 자식들에게 집을 한 채씩 유산으로 주면서 교회당 짓는데 2천만원 밖에 헌금 못했다. 씁쓸하다. 이는 세속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뒤이어 “우리도 록펠러처럼 하나님의 뜻을 높여 5천 교회당을 짓고 건강의 축복을 받고 장수한 것처럼 우선순위로 살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세속주의를 지적하면서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에 충실한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7월 4일자 “기독교보 50주년에 붙여”란 제목의 사설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개혁주의 신문’ <기독교보>를 한부 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근거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이랄지 치기어린 한마디랄지 의아할 따름이다.
고신교단의 교인 중 한사람인 기자에게 최근 고신 교단지의 사설은 여러모로 우려와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사설은 결코 어떤 특정인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견해를 피력하거나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곳이 아니다. 사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사안별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그 사설로 인해 그 언론은 자칫 ‘어용언론’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교단이 어려울 때 교단지의 역할의 중요함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상식이하의 사설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부흥과 개혁
글쓴이 : 최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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