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민신조.대소요리

소요리문답 제39문~42문

baromi 2005. 8. 17. 13:45

제2부

 

제1과

 

 

 

 

제39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꼐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 나타내 보이시는 뜻을 복종하는 것입니다(1)

 

제40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2)

 

제41문 이 도덕의 법칙이 어디에 간략히 포함되어 있습니까?

      답 이 도덕의 법칙은 십계명에 간단히 포함되어 있습니다(3)

 

제42문 십계명의 대강령이 무엇입니까?

      답 십계명의 대강령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것입니다.(4)

 

1)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2) 율법 없이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롬2:14, 15)

 

3) 여호와께서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라(출31:18)

 

4) 마태복음 22:37~40을 보라.

 

 

제1부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았고 여기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에 관해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신자 생활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순종이 없이는 참된 믿음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참된 순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히11:6), 순종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2:22).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자시고 사람은 다만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사람은 단지 피조물이므로 자기 멋대로,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규율이 된다. 요리문답에 따르면 인간을 위한 이 하나님의 뜻은 도덕률로서 인간에게 먼저 계시되었다. 그리고 요리문답은 계속해서 요약된 도덕률을 십계명에, 또 이 십게명이 요약된 두 가지 대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제42문, 마22:37~40).

 

이제 이 가르침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도덕률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두 계명과 동일하다. 1+1+1+1+1+1+1+1+1+1= 10 이며, 또한 5+5= 역시 10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도덕률=십계명이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대계명도 역시 십계명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시작 때 아담이 그의 순종의 규범으로 가졌던 도덕률은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가 성경에 갖고 있는 십계명과 동일했으며, 본질적으로 두 가지 대 사랑의 계명과도 동일했다. 이것은 아담이 우리가 가진 십계명과 두 사랑의 계명과 동일한 형태, 혹은 동일한 말로써 도덕률을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의미와 정신이 동일함을 뜻한다.

 

이것을 빛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즘을 통해 그 빛이 분산될 때는 여러가지 색깔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빛들은 동일한 빛이다. 다만 우리가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도덕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의 뜻은 거룩하고 불변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규칙은 본질적으로 십계명과 두 사랑의 계명과 동일함을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의 가르침에서 이것을 또한 증명할 수 있다(롬2:14, 15).

 

(1) 이방인은 '율법'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이나. 십계명을 기록된 형태로 가지지 않았다.

(2) 그들은 율법에 포함된 것들을 행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십계명에 요구한 것들을 행하려고 그들이 시도할 뿐임을 뜻한다.

(3) 그러므로 그들의 율법은 그들 자신이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의 요구로 자기를 공박하는 도덕적 양심을 그들 자신 속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이 이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때 그들을 송사하고 변명하는 양심을 가진 사실에서 볼 수 있다.

(4) 그래서 바울은 '그들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그들이 가졌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그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말씀'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그는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우리가 현재 가진 십계명인 하나님의 뜻이 아담이 본래 가진 그 자신의 도덕적 의식 혹은 양심과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이엇을 그에게서 물려받는다.

 

여기에 자연적으로 질문이 생긴다. 태초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도덕법이 이미 기록되었다면 하나님은 왜 또다시 그것을 계시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죄 때문이다. 죄를 가진 인간은 그들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삭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1:28),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롬1:25),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3:19).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노력했으나 그들 자신들이 빛을 도무지 제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그들 마음에 새겨진 법의 사역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악한 행실을 증거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하지 못한다(롬1: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도덕법을 십계명에 다시 계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죄인은 단지 이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신 바를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법이 자신의 마음과 양심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파묻어 두거나, 구부러지게 하거나,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뜻을 계시하기 위하여 재차 언급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함이라"(갈3:24). 때론 사람들은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갈보리채플도 이런 주장함). 또는 어떤 사람들은 이 십계명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도록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성경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친다. 율법은 "범죄함을 인하여" 주어진 것이다(갈3:19).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모두 다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을 위해서도 주어졌다.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았다'(was)고 말하지 않고, '깨닫는다"(is)고 말했다(롬3:20).

 

만약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하는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사역을 말한 후에 율법을 논하고 있는가?

 

(1) 첫째, 그리스도는 율법보다 더 중요한 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요리문답이 율법부터 먼저 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분 만이 모든 죄귀를 받으실 분이다.

 

(2) 둘째,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뒤에 우리가 율법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르치기를 기독신자는 십계명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의 모든 대.소요리문답들은 이러한 잘못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슫의 사역을 논한 후에 율법을 논한다. 신자는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9:21) 율법은 우리를 구원 받도록 인도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요14:21).

 

마지막으로 성경에는 우리가 도덕법이라 부르는 것 외에도 다른 법들이 있다. 성막과 성전에서 희생의 예배로 드린 바 된 의식법,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에 주신 시민법이 있다. 그 법들은 그들이 적용하는 상태가 변함에 따라 점차 말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법은 그렇지 않으니 십계명과 두 사랑의 계명이 계속되어진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왔다고 하였다(마5:17).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 또한 죄에서 돌아서며 그의 계명의 길로 걷기를 시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