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현재 1년 가까이 소요리 문답으로 새신자 공부를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인터넷에서 논의하시는 분들 중에 상당수가 장로교에서
기본적으로 성도를 위한 교재로 채택한 소요리 문답의 해석과 크게
다른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과 성도 뿐 아니라 일부
목회자들(많을 수도 있음)과 혹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조차도
이러한 경향이 간혹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왜 신학교 안에서
장로교의 기본적 가르침인 소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는가?
또한 목회자를 위한 대요리 문답을 가르치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윌리암스가 해석한 소요리문답으로 공부만해도
기존 인터넷 상에 떠도는 잘못된 개념들과 사상들 그리고 이상한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들의 주장을 얼마든지 반박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러하지 못하는가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소요리문답 교재 역시 최근에 잘 나가고 있는 것은 전에 소요리 문답에
자신이 더 추가 혹은 빠트리거나 배열을 자신 맘대로 하는 경우도 있어
얼마든지 소요리문답도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본인 역시 소요리 문답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신학교 안에서 올바르지
못한 주장을 함부로 하던 교수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본인이 그렇게
열심으로 공부하던 내용들이 이렇게 간단 요약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는 소요리문답을 왜 일찍 알지 못하였나를 한탄하기도 한다.
되려 새신자 교제로 무엇을 선택할련지 고민하는 목회자를 보면
답답함이 느껴진다. 더구나 소요리문답을 별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고
엉뚱한 해석을 하는 목회자를 보면 더 한심할 따름이고 그 밑에서
교육을 받는 성도는 대체 무엇을 배울련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최소한 소요리문답 정도만 마스터를 했다면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것은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소요리 문답강해- G.I 윌리암슨 지음 (p175~ )
제42문 십계명의 대 강령은 무엇입니까?
답 십계명의 대 강령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같이 하라
하신 것입니다.
제43문 십계명의 서문이 무엇입니까?
답 십계명의 서문은 이러한 말이니 곧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 너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자로다" 하신 것입니다.
제44문 십계명의 서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은 주도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도 되시고
또 우리의 구속자도 되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리문답의 이 두 부문에서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한다.
(1) 첫째,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위대한 진리이며,
(2) 둘째, 하나님에 의해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면 그는 오로지 단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할
의무가 증대되었다는 진리이다. 이 두가지 원리들이 오늘날 종종 부인되기 때문에 현대의
잘못된 가르침들과 대조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잘못된 가르침 중의 가장 인기있는 하나는 율법과 사랑 사이에 근본적인 충돌이 있다는 견해이다.
즉, 율법은 한가지를 요구하지만, 사랑은 다른 것이 매우 많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율법은
우리가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타인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보호하려고 거짓말이나 또 그들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이 요구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신도덕', '상황윤리' 등등..
그러나 이런 가르침에 따른 근본적인 문제점은 사랑이 율법에 반대될 수 있으며, 율법이 사랑에
반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리문답의 가르침과 매우 상반되는 가르침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제시하는 것과 반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옹호하는 자들은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율법을
거스렸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거나 파괴하러 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가르쳤다(마5:17). 그는
제자들에게 계명 중 어느 하나를 깨뜨리거나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마5:19).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계명 중의 몇 몇에 대해 말씀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첨가해서 만든 몇 몇 전통적인 해석에 얽매이는 것을 거절하셨다. 그는 또한 율법
그 자체가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보여 주셨다.(마5:48). 율법과 사랑 그 사이에 어떤 충돌이 있다고
말하기는 커녕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 (오직 사랑)은 율법을 지키게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네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고 말하였으며(요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요14:21).
성령에 감동된 사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5:3).
요리 문답의 가르침은 우리 주님께서 사신 완전한 생활에 의해 확증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보이신 것과 같은 완전한 사랑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계명 중의 어느 하나라도 깨뜨리도록 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고 했기 때문이며(히4:15), 또한 "죄는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3: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되는 그러한 경향이 있을 때마다 사랑의 개념이 잘못되었다고
결론내려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들을
하게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그리고
우리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될 것이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은 율법을 준수하도록
이끌 것이다.
현대의 유행하고 있는 또 다른 잘못된 가르침은 신 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율법, 곧 십계명이 두 성경에서 다르게 간주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잘못의 한 형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 백성이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요구되었고 그리고 그 복종의 댓가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우리는 십계명의 서문에서 이러한 것이 사실이 아님을 주목하게 된다(출20:2. 제43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해 내신 것은 그들이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그들을 인도해 내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율법을 지키게 된 것이다. 신자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구원도 얻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먼저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은 전혀 없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하나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셨으므로 신자는 십계명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더 해로운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신자는 구원을 받은 후에 구약의 신자보다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적어졌다는 가르침이다.
성경은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어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므로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고 말한다. 성경의 커다란 원리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적게 준 자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눅12:48).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보다
십계명을 지킬 의무가 컸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가
완성한 사역의 은혜를 충분히 받은 자인 기독신자는 옛 이스라엘 사람보다 십계명을
지켜야 할 보다 많은 이유가 있다.
다음의 몇 과에서 십계명을 차례대로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십계명에 관한 전체적인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1) 첫째는 십계명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생략..
(2) 십계명의 배열 순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이라는 사실이다. ... 생략..
먼저 나오는 네 계명은 진정한 예배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계명과
더불어 네 계명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때때로 신자들은 첫 부분의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요, 다음 여섯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만족할 만한 표현이 아니다. 십계명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기본적으로
가르쳐 준다.
(3) 결론적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율법에는 절대적 통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 생략..
바울 사도는 탐심음 우상숭배라고 말했다(골3:5). 즉 우리가 제10계명을 범할때 우리는 이미 진실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곧 우상숭배이니 또한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참고.. 안식일에 대한 소요리 문답.
제58문 제 사 계명에서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사 계명에서 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 가운데서 명하신 일정한 때를 그의
앞에서 거룩히 지키는 것인데, 특별히 이레중 하루를 종일토록 하나님께 거룩한 안식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59문 하나님께서 이레 중에 어느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까?
답 세상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하나님이 매 주의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으고,
그 후로부터 세상 끝날이 될때까지는 매주의 첫 날을 명하셨으니 이 날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셨던 민법이나, 의십법과는 달리 이 십계명들은 모든 시대,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이다.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제4계명은 항구적으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면 왜 요리문답이 제4계명도
역시 도덕법임을 강조하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안식일은 창조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이미 살다가 죽은 후, 즉 역사가 조금
지난 후에 새로이 등장하는 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민법과 의식법은 그러했다....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였다. 때때로 안식일
계명이 창조사역과 상관없이 논의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명 자체가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만드시고... 이레 되는 날에 쉬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계명 자체가 창조에 기원을 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되어 있다.
... 생략...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어떤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즉 제4계명은 제7일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안식교와 같은 이단 종파들에 의해 제기된 논쟁이다. 그들은 이레되는 날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기 때문에 그날에 예배해야된다고 말한다.
예문을 살펴보자..) 돌이는 "여섯개는 너희들 것이고 일곱째 것은 내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것이 일곱째 것인가? 돌이의 친구들이 여섯개를 가져갈때까지는 어떤 사과가
일곱째인지 알 수 없다. 명령 그 자체가 우리에게 안식일로서, 주의 마지막 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단지 매 주의 하루를 하나님께 지켜 드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날의 순서를 계명 자체가 고정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실 때(6일동안에) 정하셨고
엿새가 지난 후 하루를 쉬셨다. 하나님은 그가 그리스도를 주의 첫 날에 살리실 때
다시 새로운 방법으로 순서를 정해 놓으시고 그의 교회가 그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엿새는 부지런히 일하고, 하루는 예배를 위한 날임은
사실이다. 계명이 말하는 것은 몫이지 순서가 아니다.
몫과 순서의 차이점을 볼때 우리는 골2:16, 17; 갈4:10,11, 2:16,17 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올것의 그림자나
본체는 그리스도에게 있느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계속시키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신약의 교회가 안식일을 주의 날로
불렀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안식일'이라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관례였다. 주의 첫째 날인 주일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이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유대인의 관습 중에 어느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안식일을 주일의 첫날로 바꾸자 마자 유대인의 안식일 관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위 귀절을 해석한다면 이 귀절들과
초기 기독교회에 알려진 관례와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즉 바울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도록 경고한 이유는 그 자신이 주일의 첫 날에 관한 계명을 준 때문이었다.(고전16;2).
바울과 사도들이 규례에 따라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들어 간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이용해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신약성경은 안식일의 관습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법의 일부가 아니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하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냥 남아 있다"(히4:9).
주의 날을 하나님의 안식의 날로 지킬 의무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교회의 예배에만
참여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들이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교회가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일의 준수는 "성금요일"과 "크리스마스"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과 꼭 같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분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 하니,
여러분을 위한 나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지나 않았나 염려된다"는 말로 이것은 분명히
힐난하고 있다.(갈4:10,11). 교회가 날들의 준수를 요구할 권한이 없다. 하나님 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만이 우리가 어떤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
'교회문제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제명사건... (0) | 2005.08.19 |
---|---|
[스크랩] 서울중구의 한 대형교회에서 젊은 청년이 경험한 기독교 현실 (0) | 2005.08.12 |
[스크랩] 교회 풍자 개그에서 우리 현실 보라 (0) | 2005.08.08 |
[스크랩] "천국 못간 영혼 기도했더니 승천" (0) | 2005.08.08 |
[스크랩] 이곳에서의 뜨거운 토론을 보면서... (0) | 2005.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