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baromi 2005. 4. 19. 09:51

 

하늘의 예루살렘과 땅의 예루살렘

 

이규철
육군 군목(소령), 계명대 Ph.D,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을 향한 어거스틴의 회심』의 저자

 

북위 31도, 동경 35도, 표고 790m의 대지(臺地)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도로부터 한결같이 거룩한 도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어거스틴은 성서와 사도적 전승에 기초하여 평화의 비전(vision of peace)이요 영원한 도시(eternal city)인 예루살렘을 통해 하늘의 예루살렘을 주목하면서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지평을 확장한다. 예루살렘에 관한 어거스틴의 사색은 방대하다. 그러기에 이 지면에서는 그의 예루살렘관의 기본 배경과 성격의 주안점을 살피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정리해 본다.

 

어거스틴은『마니교도들을 논박하는 창세기들』(De Genesi adversus Manicheo, 388년)로부터『미완성 율리아누스 답변 반박』( Opus Imperfectum contra Julianum, 429-430)에 이르기까지 900번 이상 예루살렘이 갖고 있는 함의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어거스틴이 사유한 예루살렘관의 백미는 그의 명저『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413-426년) 후반(XI-XXII권)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새로운 비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라는 두 도시 개념 속에 잘 녹아 있는데, 이는 기독교인에게 친숙한 개념이다.

예루살렘에 관한 어거스틴의 담론의 근거는 성경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영원의 도시, 그것은 우리 성서에서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성서에‘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 도다’(Glorious things are spoken of Thee, City of God, 시 87: 3)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도성』V, 19).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신앙적 중심성을 지닌 곳으로 대두된 것은 다윗 왕 때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가 지나도록 정복하지 못한 예루살렘을 여부스족에게서 취한 다윗(삼하 5:6-8)은 이 요충지를‘다윗의 도성’이라고 명명한다(삼하 5:9).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립하여 장엄하게 봉헌하여(왕상 6-8장), 예루살렘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비전과 유훈을 완성한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정신적 중추로서 각별한 지위를 갖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예루살렘의 그 성전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파괴되었고, 이후 이스라엘의 불신앙적 일탈성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도살하는 장으로 타락케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멈추지 않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성도들은 예루살렘을 원점으로 하여 땅 끝을 향해 죄의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유형론적 해석을 한다. 곧 땅 위의 예루살렘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이고 신앙인의 어머니인데, 언젠가는 땅 위의 예루살렘이 하늘의 예루살렘 앞에서 그 모습이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한다(갈 4:24-31). 히브리서도 바울과 같은 표상을 사용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의 윤곽을 묘사한다. 주를 믿는 자가 세례를 받음으로 지향하는‘살아 있는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은 하나님의 거처(居處)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거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성도의 본향이다(히 9:11-12, 24).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에스겔서와 이사야서의 비전이 이루어질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관상한다(계 21:1-2:5).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이상의 나라요 성도가 꿈에도 그리는 도성이다.

 

이 성서의 전통과 사도적 전승 위에 선 어거스틴은 그의 예루살렘관을 피력하는데, 이는 그의 국가관의 기본 방향이 된다. 어거스틴은 시편 136:1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 종류의 국가가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혼동되지만 정신적으로는 구별된다. 하나는 영원한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고, 다른 하나는 지상적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바벨론이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잡혀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시민 중에는 천사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민의 일부는 죄 때문에 바벨론에 잡혀 있다. 그러나 죄의 고백과 의의 사랑으로써 그곳에서 나오기 시작하며, 세상의 종국에서는 육체적으로도 구별된다(시 136:1).”

 

어거스틴은 예루살렘과 바벨론으로 대변되는 두 세계를 예리하게 구분하면서도 양자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일례로, 갈라디아서 4:21-5:1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을 들 수 있다. “지상 도성의 한부분은 천상 도성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앞의 도시는 그 자체보다는 소위 다른 도시를 상징하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그 때문에 이 지상 도시는 종이 되어 섬긴다.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도시를 상징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성』XV, 2).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말한다. “단지 이 세상에는 두 나라의 시민이 뒤섞여 있다. 지상의 나라의 신체와 천상의 나라의 신체는 혼합되어 있다. 천상의 나라는 지상의 나라 한복판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지상의 나라는 천상의 나라의 시민을 고역스럽게 하고 천상의 나라는 지상의 나라의 시민을 고역스럽게 한다(시 51:4).”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나라를 구분짓고 변별케 하는가? 어거스틴은 그에 대한 해답으로 사랑의 질적 차이를 말한다. 곧 하늘의 예루살렘을 형성하는 주된 모티프는 하나님의 사랑(amor Dei)이다. 반면 자기 사랑(amor sui)은 지상의 나라(바벨론)를 형성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두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자기를 더 사랑(cupiditas)한 사람이 지상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더 사랑(caritas)한 사람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


따라서 지상 도성은 그 자체 안에서 영광을 찾지만 천상 도성은 주 안에서 영광스러워한다. 전자는 인간들로부터 영광을 찾지만, 후자는 하나님 속에서 그 최고의 영광을 발견한다.”

이 같은 어거스틴의 사유 결과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천상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지상의 나라의 시민이다. 현실의 세계에 있어서 이상의 세계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그곳에서 이상의 나라는 신음하고 있다. 교회도 역시 이 같은 지상의 이상국일 뿐이다. 하지만 이 두 도성은 지금 과도기적 상태에서 최종적인 분리와 완성의 점을 향해 순례의 길을 달리고 있다. 이는 역사의 최종 종국이 될 하늘의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고양하는 정점이요,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이 하늘의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핵심은 평화요 고요함이며 안식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지으면서 서로 상충성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이분법적 분리성을 극복하는 변증법적 사유를 확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역사란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의 자기 참여 속에서 창조되는 역동성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며 책임이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지금도 역사의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를 향해 이렇게 도전한다. “각 개인인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어떤 종류에 속해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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