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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율법의 완전한 순정)의 전가 교리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함은 개혁주의에서 벗어나고, 복음을 약화시키는 것임

baromi 2017. 4. 6. 10:35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함

앞에서 다룬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어떤 FV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치에서 율법을 지키셨고 그분의 공로적인 율법 지킴이 칭의 때에 우리의 계좌에 전가(이채 credit)된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 대해서 릭 러스크(Rich Lusk)는 "그리스도의 33년간의 토라 지킴이 나에게 전가된다는 개념은 문제가 있다."라고 썼습니다. 50 제임스 조르단(James Jordan)도 비슷하게 주장하기를: "...공로 신학은 종종 그리스도의 이땅에서의 행위와 공로가 어떻게든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개념에는 아무런 그거가 없습니다."51 그는 더 나아가 주장하기를 "'공로'신학은 성경에 없습니다."52

러스크와 조르단이 노골적으로 이 교리를 부인하는 반면에, 공동 FV 선언문은 그것의 중요함을 최소화 시킵니다. 그 선언문은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의 어떤 교리적 공식화도 요구"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이 선언문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없으신 삶이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점에 있어서 불편한 모호함이 있습니다.

이 교리에 대해서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22항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모든 거룩한 행위들과 그분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십니다." 드종(P. Y. DeJong)은 "매우 중대한 강조점이 위험에 처해있다. 개혁 교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든 은택을 받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53 이 아티클에 주를 달면서, 클라스 스킬더(Klass Schilder)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54 고재수(N. H. Gootjes)는 더 멀리 나아가 벨직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하는데 있어서 모호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55 

제임스 조르단(James Jordan)은 "성경에는 '공로'신학이란 없습니다."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의 신실한 요약이라고 고백하는 세일치신조에는 그러한 신학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로는 또한 제 23항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나 우리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밖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의지합니다; 그분의 순종은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7주일에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의 모든 은택이 우리에게 온다고 고백합니다. 비슷하게, 제 23주일에서, 신자들은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돌트 신조 오류논박 1.3에서 돌트 총회는 "모든 효력의 그리스도의 공로"를 빼앗아 버린 알미니안의 오류를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신조 5.8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단수)는 무효화 될 수 없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다시 한번 이러한 신앙고백 문서들이 그토록 명확하게 공로의 언어로 말하고 있고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확언하고 있음에도 조르단이나 다른 이들이 이 문서들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그토록 신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 교리의 부인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아닙니다. 자카리우스 우리시누스(Zacharias Ursinus)가 이 교리와 반대되는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1561년 대요리문답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쓰여질 당시에 그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수했다는 것을 증언해줍니다.56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데 관여한 캐스퍼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 역시도 이 교리를 고수했다는 것을 압니다.57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케 하심, 의로움, 거룩함"의 전가를 말하는 제 23주일에서 이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분의 순종은 그분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초기 주석가들이 이 요리문답을 이해한 방법이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58

하지만 우르시누스의 학생인 데이비드 파레우스(David Pareus)가 이 교리와 충돌하는 위치에 이르른 것은 사실입니다.59 또다른 저명한 독일 개혁주의 신학자인 요하네스 피스카토(Johannes Piscator)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관점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관점들이 서부 유럽의 개혁 교회들 안에서 용인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긴 논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 개혁교회 안에서 이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피스카토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와 서신들이 오갔습니다. 1607년 라 로쉘(La Rochelle)총회는 피스카토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것이 개혁주의 고백서 밖에 떨어진다고 결론내렸습니다.60 1612년의 총회는 모든 프랑스 개혁주의 목사들이 다음의 성명서에 서명하도록 결정내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서, 도덕법과 의식법에 순종하셨으며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순종이 따라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우리의 칭의는 죄 사함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로움의 전가로도 이루어진다.61

계속되는 저항에 대항해서 1614년 토네인(Tonnein)총회는 이 결정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62

이 교리는 네덜란드에서도 압력을 받았습니다. 고재수는 돌트 총회(1618-19)에서조차도 이 점에 있어서 벨직 신앙고백서가 이 교리를 부인하도록 수정될 것을 바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연관시켰습니다. 이 논의가 총회 끝무렵 외국의 대표자들이 떠난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에 모든 네덜란드 대표자들은 두명을 빼고는 이 입장[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였고 이 문제에 있어서 명제를 강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점은 이 교리가 가진 중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63

두 대표가 동의하지 않은 것이 총회가 이 교리에 대해서 거리낌을 갖는 사람들을 결코 거부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오늘날 때때로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이 두 대표중 한사람이 총회이 의장인 요하네스 보그만(Johannes Bogerman)이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1633년에 프라네커(Franeker)에 신학교 교수가 됩니다. 우리는 이 직위가 그에게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돌트] 신조)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며 그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명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개정된 22항에 대해서 결코 공적으로 공격하거나 깍아내린 적이 없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더 깊은 심사숙고를 통해서 보그만이 돌트 총회가 개정한 벨직 신앙고백서와 동일한 선상에 자신의 견해를 가져다 놓은 것으로 결론내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16세기 후반에 논쟁이 있었지만 17세기에 그 논쟁은 끝이 났습니다. 제네바 신학자인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개혁교회들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입장인 것으로 말합니다.64

공식적인 총회의 발표는 이것을 정통 개혁주의 교리로 정의하며 이 발표의 중대함은 결코 축소되거나 당연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이단을 총회의 권위에 의해서 정죄된 거짓 가르침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그 범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단원을 마치기 전, 이 교리에 대한 노만 쉐퍼드(Norman Shepherd)의 발언에 간략히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쉐퍼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는 행위 언약 교리의 발전과 나란히 받아들여진다. 이 둘은 서로 손을 잡고 가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라고 말했습니다.65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에 기술된 타락전 언약과 같은 선상에 있는 어떠한 타락전 언약 안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행위 언약의 교리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 역시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이것의 증명은 루터주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루터주의자들은 잘 발달된 언약 교리나 행위 언약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브루크 고백서(Augsburg Confession)와 Formula of Concord는 둘다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확신합니다.66 따라서 세퍼드의 주장과 반대로 이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행위 언약 교리를 강요하거나 필연적으로 그것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67

이 교리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캐나다 개혁교회의 특징이 아닐 뿐더러 어떤 고백적 전통에 있는 개혁주의 정통으로써 행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또 다시, 많은 FV 옹호자들이 신실한 개혁주의 신학으로 부터 명백히 벗어나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복음의 복됨을 약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위로와, 기쁨, 힘을 줍니다. 제 23주일 설교에서 해방파 신학자 브레머(Dr. R. H. Bremmer)는 적절하게 말하길: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satisfaction)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움 역시도 우리에게 전가시키신다고 우리의 고백서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중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무작위의 죄도 범합니다. 안 그런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깬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요? 따라서 이제 60 답은 우리 구원주의 의로움의 전가 역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이르기 까지 그 모두를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거기서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한 신학 용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심에 있는 그분의 의. 심지어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를 살인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자,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무시함으로 너의 삶이 [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우느뇨? 듣거라: 내 아들의 완전한 의로 내가 그것을 덮노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고 그것을 너에게 전가하노라, 바로 그렇게, 오직 은혜로 그렇게 하노라.68

비슷하게, 캐나다 개혁교회 목사인 조지 반 폽타(George Van Popta)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우리에게 여거진다(credited);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다(considered)). 벨직 신앙고백서 제 22장이 말하듯: ' 그리스도 우리 의께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그분의 모든 거룩한 행위들과 그분의 모든 공로들을 우리에게 전가하십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은택들을 받습니다. 그분의 고난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의로운 순종까지도 받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으심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순종의 삶 역시도 우리에게 은택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그분의 태어나심 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까지, 우리에게 혜택을 주며 이는 우리의 구속에 매우 중요합니다...그리스도께서 세번째 시험에서 첫번째 계명에 순종하신 것은 우리의 위치에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분의 거룩하신 행위 중 하나입니다. 69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FV이 이것을 우리에게서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출처: http://m.blog.naver.com/truthh/20127250206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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