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동님의 글 원문 | 박채동님의 글 요약 | 문병호 교수의 글 |
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자’에게 ‘값진 생명의 씨앗ㅡ 바울 사도 용어로는 “새로운 본성, 새 사람”, 요한 사도 용어로는 “하나님의 씨”, 김홍전 목사님 용어로는 “믿음의 씨”, 조엘 비키 목사님 용어로는“초자연의 씨”, 스펄전 목사님 용어로는 “믿음의 즉효약”ㅡ’을 주시는(뿌리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개혁 신학 용어로는 이를 “거듭나게 하심(Regeneration)”1)이라고 부릅니다. | ‘값진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뿌리시는) 사역 이를 “거듭나게 하심(Regeneration) 정리: 값진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 사역 = 거듭남 | ②좁은 의미의 중생. a.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심음. |
②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불어오는 중생의 바람’, ‘중생의 바람이신 성령’, ‘성령의 내주’를 뜻하는‘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으로서 중생’, 이른바 “좁은 의미의 중생(Regeneration)”이 있게 되면 ㅡ피터 마스터스 외할아버지이신 스펄전 목사님 “믿음의 즉효 약”이 뜻하는 대로ㅡ 예정된 자는 당연히 즉시 거듭나게 됩니다. 즉, 한순간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개혁 신학 용어로는 이를 “신생新生(New Birth)”라고 부릅니다. | 좁은 의미의 중생(Regeneration)”이 있게 되면 예정된 자는 당연히 즉시 거듭나게 됩니다 이를 “신생新生(New Birth)”라고 부릅니다.
| ④넓은 의미의 중생. a.새생명의 발현. b.심겨진 생명은 출산/신생을 일으킴. c.중생 사역의 완성; 회심 직전까지. |
③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 젖을 찾듯 ‘다시 태어난 새 사람(중생자, 신생자)’은 ‘신령한 젖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중생자가 하나님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이 순간, 새 삶을 시작하는 이 첫 순간을 개혁 신학 용어로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 중생자가 하나님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이 순간, 새 삶을 시작하는 이 첫 순간을 개혁 신학 용어로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 회심사건 하나님의 한 가지 역사 벌코프 본문 중. "이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
위 정의에는 큰 이견은 없습니다.
(위와 같은 용어적 정의에 있어서는 다들 같은 의견이니 말입니다. 위 개념들을 적용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문제는 아래와 같은 박채동님의 글들입니다.
(1)
설사 ‘수태 시 주시는 생명의 씨앗과 출산 시 주시는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가 아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혼의 의사}에서 ‘자연의 탄생’을 ‘영적 탄생’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로 주장하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영혼의 의사}에서 ≪출산 때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면 ≪영적 탄생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라는 자연의 탄생에서 아기는 출산 때 ‘사람 본성’을 받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씨인 정자와 난자’ 속에 ‘사람 본성’이 담겨 있습니까?
‘새 생명의 씨에 새로운 본성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새 생명의 씨에 새로운 본성이 담겨 있으면 언제 새로운 본성을 받는 것입니까? 이른바 “수태” 시입니까? 아니면, 이른바 “출산” 시입니까? 이른바 “출산” 시가 아닌 이른바 “수태” 시가 아닙니까!!!!!!! ㅠㅠ.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이미 전 글에 답변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같은 글을 쓰신 것은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읽으셨지만, 이해를 못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글을 아래에 복사해 붙입니다.
아래의 글 요약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 = "회심"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사건)
(여기서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고 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키시는 은혜를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임)
2.
회심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셔야지만 일어나는 것이기에..
영혼의 의사에서 회심을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값진 생명의 씨가 우리 안에 심겨지는 좁은 의미의 중생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생명의 씨가 심겨진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각성하게 되고, 슬퍼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우리의 "반응" 역시 성령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는 "회심"(혹 화정적 성화)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좁은 의미의 중생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회심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인해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합신 교수의 벌콥 조직신학 강의안 내용과 도표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ii)현상의 분석. ①외적 부르심. a.전파되는 말씀이 중생 이전의 심령에 임함. b.하나님이 죄인들을 부르심. ②좁은 의미의 중생. a.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심음. b.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 c.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마련. d.하나님의 말씀도 아직껏 기여 못함. ③효과적 부르심. a.성령에 의해 설교 말씀이 심령에 적용됨. b.효과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임. c.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음. ④넓은 의미의 중생. a.새생명의 발현. b.심겨진 생명은 출산/신생을 일으킴. c.중생 사역의 완성; 회심 직전까지. |
위의 합신의 송교수의 벌코프 조직신학의 도표를 보더라도
회심이란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주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회심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혹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신인협력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키시는 은혜(혹 역사)를
주셨기에, 회심의 반응을 사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즉, 중생론을 전개할 때 “중생”과 “회심”을 번갈아 가며 쓰셨습니다. 물론, ‘다시 태어나게 하심’을 ‘부활’과 같은 ‘하나님의 순간 사역’으로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위 ①, ②, ③’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의 단독사역으로서 중생’과 ‘중생자 반응으로서 회심, 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을 포괄한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 개념을 현대 개혁 신학은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현대 개혁 신학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과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은 ‘중생’과 ‘회심’ 사이에 ‘임신 기간’이라는 간격을 둔 연중론, “중생은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는 연중론 개념이 아닙니다.
청교도신학자들이 ‘위 ①, ②, ③’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청교도의 본문 글로 직접 근거를 제시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에 올렸던 글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그 당시에는 절대 그런식으로 이해를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 따라가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471
연중론, “중생은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는 연중론 개념
---> 연중론이 중생이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 라는 글을 먼저 제시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 한적 없습니다.
중생이 넓을 수도 좁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좁은의미}의 중생과 회심 사이의 회심의 과정이 점진적일 수도, 순간적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까?
왜 이런식으로 하지도 않은 소리를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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