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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행교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변증

baromi 2016. 5. 26. 09:30

[선행교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변증]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로마교와 개신교의 분리를 가져오게 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 중의 하나였다. 이 교리는 로마교회에 의해서 정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진영 내에서도 종종 논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루터의 제자였던 존 아그리꼴라(John Agricola, 1494-1566)는 신자에게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여 무율법주의 논쟁을 일으켰고, 반면에 조지 메이저(Goerge Major, 1502-1574)는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하여 루터파 내의 보수파들을 격앙시켰다. 개혁파 진영에서도 17세기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1591-1643)은 규율을 엄격히 강조하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대항하여 의롭게 된 신자들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신칭의가 비판을 받은 주된 이유는 율법을 소홀하게 생각하도록 하거나 신자들로 하여금 선행을 과소평가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활이 방종에 빠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하여, 종교개혁가들은 당연히 그와 같은 비판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변증을 하였지만, 이신칭의에 대한 피상적이고 불충분한, 더 나아가 왜곡된 인식은 개신교 신자들로 하여금 행위에 대한 무관심으로 종종 이끌었다. 특히 칭의교리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선행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된다.’는 인상을 알게 모르게 신자들에게 종종 심어 주었다.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반성은 한국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최근 한국 교회의 도덕적 타락상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윤리적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더 이상 한국 일반 국민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도덕적 타락, 교회 내의 분쟁, 기복신앙에 치중된 성도들의 비윤리적인 신앙생활은 더 이상 일부 소수의 교회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 이후 교회 성장의 둔화 현상은 한국교회의 비건강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바른 삶과 바른 신학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바른 신학 혹은 바른 교리는 반드시 바른 생활로 이끌어야 하고, 바른 생활이 뒤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의 뿌리인 신학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도덕적 퇴행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개신교의 핵심 교리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국 개신교의 수준 낮은 윤리적 삶의 원인을 일반적으로 이신칭의의 교리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떤 이들은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이신칭의 교리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들은 종교개혁가들이 행위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성경구절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도들로 하여금 선행을 올바로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넘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달리 선행은 어떤 식으로든지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이나 종말론적 “구원의 근거”라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전통적 입장에 따르면, 선행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이해에는 문제가 없으며, 오늘날 개신교회가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해석을 오해하거나 남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두 견해로 다시 나뉘는데, 한 그룹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개혁가들의 신학을 잘 못 해석하는 그룹이고, 다른 한 그룹은 종교개혁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문제가 없으며 그것을 여전히 옹호하려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 원종천 교수의 입장으로, 칼빈이 루터와 달리 선행을 신자에게 의로움을 가져다 주는 종속적 원인으로 격상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선행에 대한 종교개혁의 전통적인 견해를 변증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그러기 위해서 본인은 먼저 종교개혁 신학과 그것을 비판하는 세력들 사이의 핵심적인 이슈들을 명확히 하고, 종교개혁 신학이 성도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선행을 격려하도록 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선행에 대한 어떤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는) 가능하지도 않다-, 종교개혁이 의도하였던 바를 최대한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에 대한 비판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굳게 붙잡으면서도, 어떻게 성도들에게 선행을 올바로 격려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논문을 마무리 할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와 선행 사이에 실제적인 상관성에 대한 재검토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를 부정적으로 본다. 특히 최근의 한국교회를 그렇게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선행에 대한 무관심은 원래 처음부터 그러하였는가 아니면 최근에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는가? 이 질문은 칭의와 선행과의 실제적 관계를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윤리적 수준이 저급하였다면,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주요 기독교회사가들은 초기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일반 백성들 보다 수준이 높다는 것을 증거한다. 부흥운동은 단지 죄의 고백뿐만이 아니라 삶의 변화까지 이끌었다. 오늘날과 달리 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기독교 초기에는 이신칭의를 더 강조하고 최근 들어서 이신칭의를 덜 강조한 것도 아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말로 요약 되듯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단순한 이신칭의적 복음전도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보편적인 한국교회의 메시지였다. 한국교회에서 복음의 주 메시지가 크게 바뀌지 않았던 점에서, 이신칭의 교리와 선행의 상관성은 한국교회에서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윤리적 퇴보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다른 요소에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잠정적으로 추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또 하나 질문은 이신칭의 교리를 한국 개신교만 유독 강조하고 있는가이다. 만약 이신칭의가 윤리적 무관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면, 이 교리 굳게 붙들고 있는 세계의 모든 개혁파 교회들 역시 다른 교회에 비해서, 적어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비해서 윤리적 수준이 현저히 낮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증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에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비록 칼빈의 제네바 교회가 완전한 사회는 아니었지만, 칼빈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 하에 아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 이신칭의 교리에 엄격한 보수주의적 개혁교회일수록 교인들의 윤리적 수준이 높은 것을 찾아 보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교회에서만, 그것도 최근에 들어와서야 윤리적 퇴행 현상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 주 원인을 이신칭의 교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의 실제 모습과 교회가 다른 사람에게 비취는 모습이 같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교회에 대한 인상은 일반적으로 언론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와 보도가 같은 경우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사회의 언론들은, 심지어 주류 언론사들조차도,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보도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그런 보도들이 한국 교회의 윤리적 수준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지표로 사용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개신교회가 일반적으로 교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미흡하다. 단적으로 세례를 주기 전에, 교리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른 교리에는 관심이 없는데, 이신칭의 교리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이신칭의의 교리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을 뜻하는지, 전가(imputation)에 의한 법정적(forensic) 선언이 신자의 삶에서 무엇을 함의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한국 개신교회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는 있고 그 내용은 부실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시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는 이신칭의 교리를 너무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선행과 다른 상관된 구원론적 교리들 사이의 올바른 자리매김

앞에서 본인은 이신칭의와 선행이 실제적으로 상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상관성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신칭의의 어떤 요소가 신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무관심을 갖게 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이신칭의에 대한 비판은 두루뭉술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쉽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비판들은 선행과 이와 관련된 여러 교의학적 용어들에 대한 불분명한 정의 때문에 더욱 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 정확한 개념들이 정리되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선행에 대한 올바른 비평과 자리매김이 이루어 질 것이다.

1. 선행: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행위

이신칭의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책들이 선행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누구든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다 동의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쓰여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선행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리는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행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행을 강조하기 전에 어떤 선행을 논의할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없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행할 수 있는 자연적 선행(예를 들어,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활동)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 선에 있어서 “오직 믿음”은 통하지 않는다.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혀 필요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보다는 실제적 연습이나 인간의 노력이 자연적 선을 증진시킨다.

정직과 같은 도덕적 선행은 자연적 선행과 구분이 된다. 앞에서 언급된 자연적 선행이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라는 미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직은 ‘옳다 혹은 나쁘다.’라는 도덕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정직 역시 평소에 덕을 많이 쌓으므로 점점 더 발전하게 된다. 도적질을 많이 하다 보면, 도적질이 많이 늘 듯이, 구제를 많이 하다 보면 구제를 잘 하게 된다. 이 도덕적 선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도덕적 선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행할 수 있으며 실제로 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학 논쟁에서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선행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연적 선과 도덕적 선은 사람이 보기에 분명히 선한 행위이다.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제한적인 의미에서 선한 행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혹은 그것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인간에게 구원의 자비를 베푸실만한 행위인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선을 신학적 혹은 영적 선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덕적 선과 영적 선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사실상 같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직할 수 있지만, 악한 동기로 정직할 수 있고(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심지어 남을 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할 수 있다. 오직 후자의 경우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서 외적인 것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선행을 논함에 있어서, 이 도덕적/영적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이 이 둘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함으로 불필요한 오해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자연적⦁도덕적 선행은 영적 선행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영적 선행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어떠한 영적인 선도 행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인간의 행위는 오직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경우일 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참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첫째, 선행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어야 하고, 둘째, 그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 즉, 우리의 외적인 행동이 말씀에 근거해야 하고, 그 행동의 내적인 근원이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 외의 행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인간이” 행한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 비록 인간에 의해서 행하여졌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기인된 일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기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에 의하여 행하여졌기 때문에 여전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로마교의 경우에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여 공로사상으로 발전하는 반면에, 개혁신학은 후자의 입장을 따른다: 신자의 행위가 말씀에 따르고 믿음에서 나온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하게 받으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행동을 하는 주체가 여전히 죄인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주체자가 인간인 한, 그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버리시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선행을 그의 아들 안에서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선행이 되도록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그렇다면 칭의의 은혜없이 선행은 불가능하며, 칭의와 선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선행이 칭의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라, 그와 정 반대로 칭의가 선행을 하나님께 선행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궁극적 원인이다. 요약하면, 선행은 칭의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전제 없이는 어떠한 선행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칭의가 선행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2. “오직 믿음”은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

종교개혁의 구호 중에서 “오직 믿음”만큼 오해된 말도 없을 것이다. 이 구호를 잘 못 오해하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든지 혹은 ‘믿음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다른 영적 덕목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의 “오직”은 그 성격 상 배타성을 지닌다. 즉 “오직 믿음”은 행위를 배제한다. 그러나 이 배타성도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제한적인 영역에서 배타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핵심을 이야기하면,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칭의에 관한 한 믿음은 배타성을 가지며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고려의 대상 혹은 원인도 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칭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오직”만 있을 뿐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을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선행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를 믿음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이나 교회가 전하는 말을 믿고 싶은 열망도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로마교회는 형성된(formed) 믿음과 미형성된(unformed) 믿음을 구분하고 지식없는 미형성된 믿음도 일종의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로마교의 믿음관에 대항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에 대한 그 유명한 자신의 정의를 내린다. 믿음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졌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인쳐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오직 이 참된 믿음만을 통해서 획득된다;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참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의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가들이 믿음이라고 이야기라고 할 때는 항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전자는 헛된 믿음 혹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전혀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다음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오직 믿음’을 이렇게 온전한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신칭의가 선행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칭의, 선행, 믿음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선행의 전제가 되고, 믿음은 칭의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그와 동시에 선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칭의, 선행, 믿음이 아주 밀접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학자들은 선행을 칭의와 어떤 인과론적인 관계에까지 ‘격상’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결론들을 칼빈에게서 직접 찾으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원종천 교수의 경우에는 칼빈이 선행을 칭의에 있어서 열등적 원인(inferior cause)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교수는 칼빈이 그 용어를 사용한 문맥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칼빈이 열등적 원인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우월적 원인들도 언급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용어를 빌려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리 구원의 효과인(efficient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질료인(material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다; 수단인(instrumental cause)는 성령님의 조명, 즉, 믿음이다; 최종인(final cause)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우리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앞에서 언급된 4가지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라도 될 여지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은 [앞에서 말한 원인들] 주님으로 하여금 선행을 열등한 원인(inferior causes)으로 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주님께서 자비로 영생의 기업을 위해 정하신 자를, 당신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을 통하여 소유하도록 인도하신다.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그는 앞에 나오는 것을 뒤에 나오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때로 영생을 선행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왜 선행을 열등한 원인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순서를 정하실 때 선행이 있고 나서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선행 때문에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비해서 단지 순서상 먼저 발생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칼빈은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 자신이 한 말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덧붙인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참된 원인이 고려될 때에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에 피난처를 두지 말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을 묵상하도록 명하신다.” 적어도 이 말에서 확실한 것은 칼빈이 언급한 “열등한 원인”은 “참된 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로마서 6장 23절을 인용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주님의 은혜는 영생이다.” 여기서 칼빈은 질문을 던진다. 사망의 원인이 인간의 죄라면, 영생의 원인은 인간의 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생의 원인은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칼빈이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불렀을 때는 구원과 선행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원종천 교수는 또한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를 루터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이것도 사실에 그렇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우리의 순종을 “부분적 원인”이라고까지 부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것이 쓰여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의 견해가 크지 않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의 순종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부분적 원인이다. 필수적인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원인이거나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지구는 필수적이지만 의롭게 하지 않는다. 만약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 . . 어거스틴이 한 말은 진리이다: "당신 없이 당신을 창조하신 분은 당신 없이 당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때문에 우리는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루터가 선행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았다. 특히 선행의 필수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터는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 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선행이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요소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행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말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선행은 단지 구원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이다.

3. 성화와 선행: 존재(being)과 행위(doing)

이신칭의에 대한 비판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교리가 성화에 대해서 무관심을 초래하고 그 결과 선행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초래한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선행은 주로 성화에서만 다루어지고, 실제적으로는 선행과 성화가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거나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더욱이 선행과 관련되어 칭의와 성화가 논의될 때, 이 둘은 대립되는 개념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성화를 강조하면 선행을 격려하게 되지만, 칭의를 강조하면 선행을 소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우리가 보았지만, 우리가 이신칭의를 제대로 이해할 때, 선행을 절대로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이 점에서 선행과 성화는 좀 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선행은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영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정의하기에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우리의 성품이 죄에서 벗어나 점점 더 하나님처럼 닮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보통 죄에 대해서 죽고(mortification)과 의에 대해서 사는 것(vivification)이라고 표현된다. 성화는 우리의 성품이 변하는 것이고 선행은 성화의 은혜를 받은 신자가 행한 행동 중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개념상으로는 전혀 다르다. 성화는 사람의 성품에 대한 것이고, 선행은 사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내적으로 변화되는 것과 그 사람이 외적으로 행한 행위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성화와 선행을 올바르게 구분할 경우, 우리는 성화와 선행의 인과 관계를 보다 분명히 보게 된다. 만약 선행이 성화가 되는 조건이라면, 성화를 강조하게 될 경우 신자는 성화를 얻기 위해서 선행도 힘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행이 성화의 결과 혹은 열매라면, 신자가 성화를 위해서 반드시 선행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성화는 선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화를 강조한다고 해도, 신자는 자신의 품성의 변화를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선행에 대한 노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 역시 똑같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이 성화의 은혜 역시 우리의 행위나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얻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화에 대해서 강조한다면 신자들은 성화를 얻기 위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구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선행과 관련하여 성화는 성도가 죽을 때까지 점진적으로 겪게 되는 과정이며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점은 선행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선행과 성화는 물론 분리될 수 없다. 내적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만이 선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완전한 성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는 성화의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이 행한 행위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인가? 이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여전히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가 하는 행위가 실재적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룩한 행위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죄로 인해 오염된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화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화를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에 대한 강조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화의 교리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의롭다고 간주할 수 있도록 하는 잠재적 선행만을 행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성화를 통하여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죄로 인해 오염이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지 않다면 우리가 그런 행위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성화만으로는 선행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선행으로 이끄는 확실한 동력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행위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 확신은 물론 그런 부족한 선행을 선행으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에서 나온다. 선행과 성화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신칭의는 신자로 하여금 선행을 무관심하게 보도록 하기 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선행을 하도록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화와 칭의가 선행을 격려함에 있어서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선행의 구체적인 행위는 오직 성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선행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 또한 중요한데, 내면의 동기는 오직 성화의 은혜를 통해서 발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와 신자의 행동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다고 하더라도 오직 신자의 행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칭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칭의/성화와 선행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할 때, 칭의는 선행을 소홀히 하게하고, 성화는 선행에 힘쓰게 한다는 이분법적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중 은혜인 칭의와 성화를 얻는다. 성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는 상태로 거룩하게 되고, 칭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이중 은혜를 받은 신자는 성화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실제적인 선한 행위를 하며 하나님은 칭의의 은혜로 그것들을 선행으로 간주하신다.

4. 선행의 필수성: 올바르게 성도들에게 성화를 격려하려면,

앞에서 보았듯이, 선행은 칭의와 성화 모두의 결과이다. 성화는 구체적인 선행을 가능하게 하며 칭의는 우리가 하는 선행이 하나님이 받으실만 한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선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설명하지만, 왜 선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신자는 칭의와 선행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냥 저절로 선행을 하게 된다고만 말하면 선행에 대해서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이 점에서는 로마교의 입장은 매우 선명하다: 신자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과 더불어 선행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입장은 선행은 칭의와 성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고 칭의를 얻는 것도 아니고 성화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로마교와 개신교의 차이가 선행의 필수성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여야 하겠다. 둘 다 선행의 필수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선행이 필수적인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로마교는 그 이유를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에서 찾았고, 개신교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행을 왜 꼭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전형적인 개혁주의의 답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6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제86문: 우리의 공로가 조금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또한 선행을 해야 합니까?

답: 왜냐하면,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그의 형상을 닮게 하시어,
우리가 모든 행위로써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찬양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또한 우리 각 사람이
그 열매로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경건한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에 따르면, 선행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자신을 닮게 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리가 행위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둘째, 우리의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고 그 믿음을 이웃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요약하면, 선행은 구원을 얻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도 중요하지만, 구원 받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선행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선행을 더 강조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라는 질문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는 질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 선행의 필수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이 고백서에 따르면, 선행을 통하여, 신자들은 “자신들의 감사를 표시하고, 그들의 확신을 강화시키며, 그들의 형제들을 세우고, 복음의 전도를 돋보이게 하고, 원수들의 입을 막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선행은 사람이 자신의 제일 된 목적을 수행할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특히, 성화와 칭의가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반면, 선행은 불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복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적어도 그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복음이 방해 받지 않도록 한다.

개혁주의 신조의 대표적이 두 신조만 간단히 참고하더라도, 개혁신학이 얼마나 선행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그 필수성까지도 강조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문제는 선행이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떻게” 필수적인가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을 거부하였지 필수성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개혁신학은 선행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견해가 선행을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 보다 선행을 ‘덜’ 강조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행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거나 부차적으로 간주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5. 선행에 대한 올바른 격려

우리는 앞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가 행위를 모든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신칭의에서 말하는 믿음은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믿음과 선행과의 관계는 너무나 명확해 진다. 믿음은 원인이고 선행은 결과이다; 믿음이 뿌리라면 선행은 열매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칭의, 성화, 믿음, 선행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설정 할 필요가 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화와 칭의의 은혜를 동시에 얻는다. 이 이중적 은혜에 의하여 신자는 상태에 있어서 그리고 신분에 있어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된 신자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선행이라고 할 수 없다. 성화와 칭의는 오직 신자로 하여금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부여하였을 뿐이다. 실제적인 선한 행위는 믿음으로 시행된다. 따라서 선행은 믿음의 직접적인 열매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선행을 강조하는 것과 실제로 선행을 행하도록 하는 것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서, 선행은 좋은 것이며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신자가 누가 있겠는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로마교회와 개신교회들을 비교해 보았을 때 과연 선행을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교리를 믿는 로마교회 교인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 개신교인들보다 더 선행에 힘쓴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어느 교회가 선행을 실제로 많이 행하는가를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가들의 글을 통해서 볼 때, 로마교회는 교리적으로 타락하였을 뿐 아니라 도덕이나 행실에 있어서도 많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선행에 힘써야 할 수도원 마저도 거룩한 삶과는 많이 동 떨어져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가난한 이웃을 섬기기 보다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선행의 강조는 선행을 격려하기 보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좌절감을 준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독신은 아주 귀한 선행지만 그것이 신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하며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자유라는 선물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반대로 개신교회는 어떠한가? 보편적으로 개신교회들이 로마교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신칭의의 교리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개신교회들이 성도들의 도덕적 삶에 덜 관심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특히 권징을 교회의 3대 표지 중의 하나로 받아들인 개혁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였던 칼빈도 권징의 중요성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목회하였던 제네바 교회에서는, 목사와 구별되는 다스리는 장로들이 성도들의 영적인 삶을 부지런히 살폈다. 개신교의 칭의 교리가 성도들의 선행을 덜 격려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맞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특히 종교개혁 시기 동안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구원에 있어서 선행의 필수성을 가장 강조하였던 중세 말기야말로 어떻게 보면 도덕적으로 가장 낙후된 시기였다.

선행을 올바로 강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선행이 믿음의 열매라는 명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선행을 강조한다고 해서 선행이 교회에서 잘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에게 선행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선행의 원인인 믿음을 이야기 하여야 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에 있어서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노력한다고 신자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믿음의 외적인 수단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믿음을 직접 일으킬 수 있지만, 외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 17) 일반적으로 은혜의 수단을 말씀과 성례로 보지만 기도 역시 종속적인 의미에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은 무엇보다도 선행이 무엇인지를 신자들에게 가르쳐준다. 특히 십계명은 신자들이 행하여야 할 선행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다. 무엇보다도, 말씀은 그 자체로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일으킨다. 또한 성례는 말씀과 달리 그 자체로 믿음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신자의 믿음을 굳게 한다. 한편,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 기도에 열심인 것은 좋으나, 그것이 말씀에 의해 지도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기도가 “믿음의 주된 실천”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열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기도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선행을 격려하기 보다는 자신과 가정, 좀 더 나아간다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복을 구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다.

결국, 신자들에게 올바로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단지 성화를 강조하거나 선행이 중요하거나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혁주의 신조에 따르면,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선행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온전히 설교하여 성도들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설교는 성경에 굳건하게 뿌리 박혀 있어야 하는데, 이 성경이 신자에게 주로 가르치는 바는 신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단지 순서상 믿음이 행함에 선행할 뿐이다.

결론

간단히 요약하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윤리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가들이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인식일 것이다. 단지, 칭의나 성화와 같이 몇 가지 교리에 한정하여 강조한다고 해서 신자들이 선행에 힘쓰지는 않을 것이다. 세속화, 인본주의, 유물론, 실용주의가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신자들이 진정으로 선행에 힘쓰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통전적으로 가르쳐져야 한다.


한국 개신교가 이전과 달리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이 상황을 신학자들은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 원인을 찾는 것에도 보다 신중해야 하며,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종교개혁이 이룬 유산을 비판할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성화, 칭의, 믿음, 선행의 관계는 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정의되고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 본 논문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고 생각한다. 1) 개혁 신학에 있어서 선행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2) 칭의는 선행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을 격려한다; 3) 선행과 관련하여 성화와 칭의는 대립되는 관계로 보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성도들에게 선행을 실제적으로 격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외적인 은혜의 수단들, 순수한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말씀에 따른 성례를 실시하고, 말씀에 근거한 바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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