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국내에 번역된 제네바 요리문답서들의 309문~332문까지 비교표입니다.

baromi 2016. 5. 1. 23:05

칼빈의 제네바교회 요리문답서 한글 번역본이 3권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기독교교리앱에 또 하나의 번역본이 있어서 총 4권의 번역본이 있는데요. 

한번 참고하시라고 일부분 표로 만들어 올립니다. 



첨부파일 제네바 요리문답 번역서 비교표.pdf


PDF파일로도 올리니 참고하셔서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일부분 번역의 내용이 다르기에 비교해가면서 보면 되고, 번역본 1권만 구입하는 것은 비추천합니다.



영한대역 제네바교회 요.리.문.답/김세민편역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조석만역

요한네스칼빈의 제네바교회의 교리문답/박위근,조용석 편역

제네바요리문답/푸른아카데미


46장 성령의 사역과 성례전의 관계

제309문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방법인 말씀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309문
하나님의 말씀 외에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309
말씀 이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다른 수단이 있으십니까?

제309문
말씀 이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다른 방도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설교 외에 성례를 통한 방법을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에 성례전을 더하여 실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설교에 성례전을 추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설교에 성례들을 첨가해 놓으셨습니다. 

제310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310문
성례전이 무엇입니까?

310
성례전은 무엇입니까?

제310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성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지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겉으로 드러내는 증거인데, 이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새겨지고, 그 약속들에 대한 진리가 더욱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라는 영적인 은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외적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표시로 영적 은혜의 여러 면모를 나타내시며,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시며, 우리에게 더욱 확실하게 진리를 인 쳐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례전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각인시켜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외적, 가시적 표시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형상화시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확신합니다. 


성례란 하나님의 은혜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것으로써 이 외적인 표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약속들을 보다 강력하게 새겨 넣으시기 위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들에 대해서 더 큰 확신을 갖도록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제311문
구원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우리 마음을 견고하게 해줄 만큼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지에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까?

311문
성례전의 보이는 물질적 인표(sign: 떡과 포도주)가 구원에 충분한 확신적 양심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311
가시적 표시로서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이 구원을 확신하며 견고해집니까? 

제311문
뭐라고요? 외적이고 물질적인 표시가 우리의 양심을 견고하게 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성례 그 자체로부터 효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는 물질적 인표 그 자체가 구원 얻기에 충분한 양심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인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자의 구원을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성례전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성례전을 재정하신 하나님의 뜻안에서 가능합니다. 


성례가 그 자체의 힘으로 그런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목적으로 성례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런 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제312문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새겨지도록 하는 것은 성령께서만 하시는 특별한 일인데, 어떻게 이 일이 성례에 속한다는 것입니까?

312문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 성령의 고유한 직무인데 그것이 어떻게 성례전과 관계되는 것입니까?

312
성령의 고유한 역할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마음 속에 확증시키는 것이라면, 성레전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제312문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성령님의 교유한 직무인데 어째서 당신은 이를 성례들에게 넘기고 있습니까?


성령과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이해를 돕고 양심이 안정과 평온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당연히 이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일로 인정되어야 하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찬양을 성령이 받으시도록 함으로써 찬양이 다른 대상에게 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례를 이차적인 수단으로 정하셔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사용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이 무시되지는 않기 때문에 결코 성례를 막아서는 안될 일입니다. 


성령의 고유한 직무와 성례전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감동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시며, 우리의 양심에 보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들을 새기는 것이 성령의 고유한 직무이므로 성령은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성례전은 성령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 마음에 새김에 있어서 적용하는 제2차적인 도구입니다. 


두 가지(성령의 사역과 성례전의 기능)는 지속적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며, 정신을 조명하시고, 양심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과 은사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직 성령님께서 찬양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과 는 만족할만한 수준의 다른 방식을 통하여 성레전을 사용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능력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성격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키시며 우리의 오성(五性)을 조명하시고 또 우리의 양심을 굳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모든 일은 오직 성령님 자신의 사역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그로 인하여 우리가 성령님께 찬양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좋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보다 열등한 방법(낮은 방편)으로써 성례들을 사용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성령님의 능력은 조금도 감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제313문
그러니까 성례의 능력과 효력이 외적인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고 있군요.

313문
그렇다면, 성례전의 효과는 그 외적 요소에는 없고 전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313문
성례전의 효력이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발휘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313문
당신은 성례들의 효력이 외적인 요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직 성령님께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방법으로 일하신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이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례전이라는 도구에 의하여 효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제정하신 보조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능력은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능력에 어떠한 손상도 가하심이 없이 당신께서 제정하신 방법들을 통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314문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를 하나만 말할 수 있습니까?

314문
그렇다면, 그 이유를 말해 보세요.

314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사역하시는지에 관하여 저에게 이유를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제314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살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들처럼 완전한 영적 존재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흙으로 된 육체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천상의 것들에 대한 영적인 면을 감지해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인 상징이나 거울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감각이 발휘되어 우리가 그 약속들에 대해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혜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신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사들처럼 영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들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이며 천적(天的)인 것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상징적인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헤들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정이 이에 적절히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연약한 우리를 돌보십니다. 만일 우리가 천사와 동일한 영적인 본성을 소유했다면, 영적 차원의 하나님 은총을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여 하늘에 있는 영적인 은총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며, 이는 일종의 하늘의 은총이 투영된 가시적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이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더욱 더 강화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부여잡아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천사들처럼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들을 바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육의 몸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천상적이고 영적인 은혜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해서 외적인 표시들을 사용하실 필요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약속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게 우리의 모든 감각이 이 방법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적당한 일입니다.

47장 하나님께서 성례전을 제정하신 이유

제315문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성례를 제정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성례가 없어도 충분하다거나 성례가 아예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교만으로 정죄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315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례전을 제정하셨다면, 우리가 성례전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315
누군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궁핍함을 도와 주시기 위하여 제정하신 성례전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거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손한 태도라고 정죄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315문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필요 때문에 성례들을 제정하신 이상 우리가 이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함은 오만 불손한 태도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성례가 전혀 필요 없다고 의도적으로 성례를 금지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례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임의로 성례전을 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누구든지 성례전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사용을 임의적으로 금지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그의 은총을 거부하며,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례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고의적으로 그 사용을 회피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고 또 그분의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제316문
선한 사람들이든 악한 사람들이든 구별 없이 성례를 받는데, 우리의 양심을 견고하게 해주는 성례를 통해 누리게 되는 확신 또는 진정한 평안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316문

그런데 선한 자나 악한 자가 다 같이 성례전에 참석한다면, 성례전으로 어떻게 확신적 양심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316
선인과 악인이 성례전을 통하여 양심을 견고하게 하는 신뢰와 확신을 획득할 수 있습니까?

제316문
그러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실제로 함께 성례를 받고 있는데 성례들이 어떤 은총의 확신을 줄 수 있습니까? 


비록 성례를 통해 악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된다 하더라도 악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이나 평안을 가져다주는 성례의 본질과 능력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신자나 사악한 자가 다같이 성례전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한다할지라도 그 때문에 성례전의 특징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례전의 은총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무신론자들은 이를 폐기시킵니다. 이로 인하여 성례전의 능력과 본질은 상실되지 않습니다. 


비록 불신자들과 사악한 사람들이 성례를 통해서 제시되는 은혜를 무효화 시킨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 때문에 성례의 고유한 작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317문
성례를 행함으로써 따라오는 효과는 언제 어떻게 나타납니까?

317문
그렇다면, 어떻게, 언제 성례전의 효력이 있게 됩니까?

317
어떻게 그리고 언제 성례전의 사용은 효과를 발휘합니까?

제317문
그렇다면 성례들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그 고유한 효력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면서 믿음으로 성례를 받아들일 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성례전에 참석할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례전을 수용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서 은총을 추구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만을 구하면서 믿음으로 이 성례들에 참여할 때 효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제318문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18문
그렇다면, 성례전을 시행함에 있어서 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까?

318
성레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318문
왜 우리가 성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지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례 안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또는 성례 안에 은혜를 나누어 주는 어떤 능력이 고정되어 있거나 포함되어 있다는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례라고 하는 그 표지는 오히려 우리를 곧장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찾고 모든 행복을 추구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례전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성례전에 무슨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성례전이라는 인표(sign)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인도되어 구원과 모든 좋은 것을 주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이라고 보기 떄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적 표지에 집착하여 이것을 통한 구원을 갈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시적 표시가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을 품어서도 안됩니다.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축복을 갈망하는 우리를 그분께 인도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며, 가시적 표지입니다.


저는 우리가 성례에서 구원을 찾기 위해 외적인 표시에 집착을 가져야 한다든가 또는 그 자체에 어떤 감추어진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이 표시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올바로 인도할 수 있는 보조수단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과 모든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319문
성례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라면,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도록 성례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성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더욱 확신하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319문
성례전에는 믿음이 필요한데 왜 성례전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에게 보증하며,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319
성례전을 사용하기 위하여 신앙이 요구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기 위하여 성례전이 신앙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언급할 수 있습니까?

제319문
성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당신은 이 성례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 또 우리 자신의 신앙을 굳게 할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까? 


우리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나날이 더욱더 커지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이제 막 시작된 믿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성례를 제정하셨고, 이 성례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지고 커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례를 통해 봉인된다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가르칩니다(롬3:11)


신앙이란 우리 속에 한 번 시작됨으로써 충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은 양육되어 매일매일 자라나는 것이며, 우리 속에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양육하시어 성장시키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례전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성례전을 시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심령에 새기는 일이라고 본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앙이 지속적으로 양육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신앙은 일상의 삶 속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양육하고 강화하여, 함양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성례전을 제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봉인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 안에서 한 번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신앙은 계속적인 양육과 공급을 받아야 하며 우리 안에서 매일 성장해야 하고 증가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양육하고 견고하게 하며 또한 증가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례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례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마음속에 확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 의미인 것입니다. 

제320문
그러나 다른 수다을 통해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인정받을 만한 믿음도 아니라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가 아닙니까?

320문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들이 다른 도움 없이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불신앙입니까?

320
성례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성례전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표지가 아닙니까?

제320문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례들에 의해 우리 안에서 충분히 견고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별다른 보조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결국 불신앙의 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분명히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적고 불완전한 믿음을 부여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신자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친숙한 상태로 있는 한 불신앙의 잔재들이 우리 육체에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것 외에는 불신의 잔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은 믿음에 있어서 더욱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나 불신앙의 유물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항상 성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연약한 신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연약하여 불완전하다고 해도 신앙인으로서의 신분은 상실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한, 우리의 육신 안에는 불신앙의 흔적이 잔존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신앙의 진보를 통하여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진보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성도의 믿음이 작고 연약하다는 표시입니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늘 있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신자들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신앙은 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육 안에는 언제나 어떤 불신의 찌꺼기가 항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장하며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48장 두 가지 성례

제321문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321문
기독교회에는 몇 개의 성레전이 있습니까?

321
교회 안에 몇 개의 성례전이 있습니까?

제321문
교회 안에는 몇 개의 성례가 있습니까? 


모든 신자가 행하는 성례는 두 가지입니다. 


주 예수께서 신자를 위하여 제정하신 것은 두 개입니다. 


성도가 사용해야 하는 공동의 성례전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제정하신 것은 단지 두 가지 입니다. 

제322문
그 두가지는 어떤 것입니까?

322문
그것이 무엇입니까?

322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322문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입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제323문
이 두 가지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23문
그 둘은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323
두 가지 성례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제323문
이 두 가지 성례 사이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세례는 교회에 속하게 되는 적절한 수단입니다. 전에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으나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집에 속하는 식구로 인정받는 증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찬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아버지로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세례는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받아 주심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가정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양육하며, 먹을 것을 먹이며 마음을 쓰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시며 즐겁게 하여 주시는 증거입니다

세례는 교회에 출입할 수 있는 통로로서, 이를 통하여 과거에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품으로 입양되었으며, 그 분의 식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음식을 제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세례란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관계없던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가족의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어는 가정의 좋은 아버지가 그의 가족을 양육하며 음식물을 공급하는 일에 있어서 힘을 쓰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며 즐기게 하려고 원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제49장 세례

제324문
두 가지 성레 각각의 본질을 훨씬 명확히 할 수 있도록 하나씩 알아봅시다. 먼저 세례가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24문
그 두 성례에 대해 분명히 설명해 보세요. 우선 세례의 의의에 대해 말해 보세요.

324

이 두 가지 성례전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양자를 구분하여 고찰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324문

두 성례들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이해를 얻기 위해 각각에 설명을 더해 봅시다. 우선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용서를 상징하고, 둘째는 영적인 거듭남을 상징합니다. (엡5:26, 롬6:4)


세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인표이며(요일1:7; 벧전1:19), 둘째는 우리의 영적 거듭남을 의미하는 인표입니다(벧전3;21)


세례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영적인 중생(
spiritualis regeneratio)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먼저 주님은 세례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의 용서를 나타내시며, 다음으로는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중생을 나타내십니다. 

제325문
물이 이 두 가지를 상징하기 위해서 어떤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325문
그 두 가지 의미는 물과 어떤 관계가 있기에 세례를 시행할 때 물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325
왜 물은 이 두 가지 사실과 비유하며 또 표현될 수 있습니까?

제325문 

물은 이러한 사실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실제적인 사실들과 어떤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일종의 씻어내는 일인데 우리 몸의 더러운 것이 물로 씻어지는 것처럼 더러워진 우리 영혼이 용서로써 깨끗해진다는 점입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며, 세례는 마치 몸의 부결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함과 같이 우리의 영혼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음 받은 인표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세례에 있어서 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직 물을 통하여 더러운 우리의 몸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물 세례가 의미하는) 죄의 용서는 우리의 죄로 물든 영혼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용서는 마치 씻음과 같습니다. 즉 우리의 외적인 몸이 물로 씻을 때 깨끗하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이 세례로써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326문
그런데 물이 어떻게 거듭남을 상징합니까?

326문
세례에 있어서 또 하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26
중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326문

세례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해서 말해 보십시오. 


거듭남의 시작은 우리의 본성을 죽이는 것이요, 그 끝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므로 머리에 물이 부어짐으로써 죽음이 상징적으로 제시되고, 우리가 물에 잠겨 있지 않고 단지 잠시 들어가 있다가 즉시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거듭남의 인표인데 우리의 영적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 힘이 없어지는 것이며,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인표입니다. 이에 물을 머리에 붓게 되는데 그것은 새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의 (욕망을) 절제함(mortificatio)으로 중생은 시작됩니다. 이의 목표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서, 세례를 받을 때 물과의 접촉은 죽음을 표현합니다. 이는 우리가 물속에 잠겨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떠오르기(부활하기) 위하여(emergamus), 잠시 무덤 속에 내려가 있다는 사실로 이해될 때, 새로운 생명의 의미가 파악될 수 있습니다. 

중생의 시작은 인간의 본성이 죽음을 당하는 것이며, 중생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므로 물이 머리 위에 뿌려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표시로서 우리 머리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부활이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즉 이것은 물 뿌림이 우리가 물속에 빠져 익사할 정도로 오래 계속 되질 않고 순간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통해서 나타내 줍니다. 

제327문
물이 영혼을 씻는 놋대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327문
물이 사람의 영혼을 깨끗케 한다고 생각합니까?

327
물을 영혼의 정화시키는 욕조로 생각하십니까?

제327문

당신은 물이 우리 영혼을 깨끗이 씻는 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돌려져야 할 영광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흠이 없는 모습으로 서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양심에 거룩한 피를 뿌려 주실 때 우리는 정말로 죄 씻음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이러한 죄 씻음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벧전1:19, 요일1:7)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것으로 서게 하기 위하여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요일1:7; 벧전1:19). 그 피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양심에 부어질 때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례전에 의하여 그 사실이 우리에게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의 며예를 박탈하는 것으로서, 매우 불경스러운(nefas) 행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더러운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고, 순수하게 만들어 우리를 하나님과 대면하게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에 뿌려지면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례전 안에서 확증됩니다(Obsighnationem).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깨끗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것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정결하게 설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양심에 그 피가 부어지는 때 우리에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는 것뿐입니다. 

제328문
세례의 물을 단순히 씻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합니까?

328문
세례에 있어서 물은 다만 상징에 불과한 것입니까?

328
물은 단지 속죄 행위를 형상화 하고 있습니까?

제328문

당신은 물이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실체와 결합된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거짓 약속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 용서와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고 약속되듯이 우리가 그 약속을 받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물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약속은 우리를 실망케 하지 않으며, 세례를 실행함에 있어서 죄 사함이 있으며,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형상이지만, 진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게 그의 은총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확실하게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으며,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진리와 결합(사실과 결합된)되어 있는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느 하나도 헛되이 약속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시에 죄의 용서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진다는 것과 우리가 이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제329문
이러한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329문
새 생명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329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충만하게(impletur:채우는) 주어집니까?

제329문

이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성취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타락으로 인해 은혜를 누리는 길이 막힘으로써 그들 스스로 은혜를 헛되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신자들만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례의 본질은 결코 영향받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은혜를 저버리게 되지만 신자들에게는 널리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다면, 이의 효력은 상실되지만, 반면에 신앙인들은 성례전의 효력을 체험합니다. 그럼에도 성레전의 본질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은혜의 작용을 무효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만이 세례의 유익을 얻는다고 해서 인간의 사악함이 성례로 하여금 나타나지는 그 고유한 효력을 없어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330문
우리의 거듭남은 어디에서 얻게 됩니까?

330문
새 생명은 어디서 주어지는 것입니까?

330
어느 곳에서부터 중생은 시작됩니까?

제330문

중생은 어디서 그 능력을 얻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얻게 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비롯되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타락한 본성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매장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부활의 은총으로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의 본성적 부패행위는 장사지낸바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속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한 새 생명이 주어지며 결국 부활의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옛 인간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의 악한 본성 또한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매장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숝오하며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를 통해서 우리의 옛 사람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며 우리의 죄된 본성은 장사되어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지배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제331문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이러한 은총을 우리가 어떻게 받게 됩니까?

331문
어떻게 그런 은혜가 세례에 의하여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331
어떻게 세례를 통하여 이런 고귀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제331문

세례시에 이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면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됨으로써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들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저버리지 않으면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여 효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선사될 것입니다.

세례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을 받기에 우리가 자세가 바르고 합당할 때 우리는 이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또한 그분의 성령을 받게 됩니다. 

제332문
세례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332문
세례를 바르게 시행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332
세례를 올바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332문

우리 입장에서 세례시 갖추어야 할 바르고 합당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세례에 대한 올바른 사용은 믿음과 회개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흠이 깨끗하게 제거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믿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의 삶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울러 죄 죽임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하며,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심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사악한 욕망을 없애 주심을 느껴야 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행위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버리는 훈련을 끊임 없이 하여야만 합니다. 


올바로 신앙 안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며 참회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모든 악한 욕망으로부터 정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를 만족하신다고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어떠한 방식으로 거하시는 지를 감지하여, 이웃을 위한 선행과 더불어 이를 선언하게 됩니다(declaremus). 즉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과 회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깨끗함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신뢰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끔 우리의 육신적인 욕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확신을 가져야 하며 또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 이런 삶을 드러내어 알게 해야 합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