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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 존 칼빈

baromi 2015. 10. 18. 23:14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The Life of True Christian)

 

 

 

 

 


* 본문은 존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 중 일부를, 좀 더 쉽게 설명한 지침서인 The Golden Booklet of the Life of True Christian을 편역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인내함

I.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아부인보다 더 어렵습니다.

1.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수준 즉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청하신 수준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도의 회중 가운데 영접을 받은 모든 성도는 힘들고 어렵고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찬 생활을 각오해야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연단하시는 것은 거룩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는 먼저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시작하셨고, 모든 자녀들에게도 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항상 기뻐하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관대하고 부드럽게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는 지속적인 십자가였습니다.

 


2. 사도는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고난을 피해야 합니까? 사실 주님의 복종은 우리에게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를 닮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주님이 모든 악의 수렁을 피하여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감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3. 바울은 "우리가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게" 되면 "부활의 능력"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하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 말입니까!

 

우리가 역경으로 고난을 받을 수록,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더욱 확고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교제로 말미암아 역경 자체는 우리에게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크게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마16:24, 마3:17, 17:5, 히5:8, 롬8:29, 행14;22, 빌3:10.

 


II. 십자가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1.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질 것을 강요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증명하셔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실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과장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당연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하게 만드는 온갖 어리석고 헛된 육적 확신에 빠져서 마치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와같은 허망함을 억제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극도로 연약함을 경험으로부터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모욕, 궁핍, 친척의 죽음, 질병, 또는 여러 가지 참화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 밑에 파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된 우리들은 고난의 짐 아래서도 우리를 든든히 서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도움인 주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부르짖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2.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위대한 성도들조차, 자신의 용맹과 담력에 대하여 과장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생의 환난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더 깊은 지식의 길로 인도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생각은 다윗의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번영이란 너무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고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그가 의존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는 결코 넘어질 수 없다는 망상 속에서 자신을 신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다윗같이 위대한 선지자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번영 중에 있을 때에는 잘 견디고 인내하지만, 역경이 그들의 인내를 부수어 뜨리면, 그들은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영적 질병의 증거들에 의해서 경고를 받은 경고 받은 신자들은 생의 참담함 속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한 어리석은 확신을 박탈당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견고한 요새이신 하나님의 보호가 가까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시 30:6,7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III. 십자가는 우리를 소망하도록 만듭니다.

1.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만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환난 중에 신자를 도와 주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내할 때 그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약속대로 도와주신 것을 성도에게 증거해 줍니다.이와같은 사실은 그들의 소망을 견고하게 해 줍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얼마나 큰 은택의 강물이 흘러넘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덕에 대한 거짓된 견해를 버리고 우리를 아첨하는 자리로 잘못 인도하는 외식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자연적이고 치명적인 교만은 무너저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하게 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넘어지거나 절망 중에 침몰해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승리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약속을 성취하실 때는 미래를 위해서도 진리를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2. 비록 이것이 유일한 이유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시련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IV. 십자가는 복종을 가르칩니다.

1. 주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다른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내를 훈련하시고 복종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주님이 주신 복종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감취어지고 쓸모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은혜를 이런 방법으로서 나타내시고 시험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 속에서 강직하고 견고한 은사를 밝히 나타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라는 표현은 그의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거절하지 않는 사실로부터 그의 헌신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금이 용광로의 불로 연단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환난으로 연단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2.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탁월한 은사인 인내의 은사를 계발하기 위한 연습의 필요성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인내를 결코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덕들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서 그것들이 모호하고 쓸모없게 되지 않도록 방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을 단련하시는 최선의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시련이 없다면 인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또한 그들은 십자가에 의해서 순종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네카는 "하나님을 따르라"는 격언으로서 인내로 역경을 이겨나가도록 사람을 권하는 것이 고대의 관습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 말로 고대인들인이 암시한 것은 사람이 어린아이같은 겸손으로 징계를 받아드릴 때만이 하나님이 지워주는 멍에에 참으로 순복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만일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순종에 길들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V. 십자가는 우리를 징계합니다.

1. 우리가 부드러움과 관대함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육이 얼마나 강렬하게 주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런 복종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인의 고삐에 잘 순종하던 말을 마음대로 먹게 내버려두자 점점 사나워지고 길들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마침내 주인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불평하셨던 것들이 우리 각자에게 계속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찌우고" "기름으로 덮여 있을 때"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 하나님을 발로 차버립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생각하고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너무 배은망덕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관용이 계속해서 우리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겁게 순종할 수 있도록 징계로 통제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가 부를 얻을 때 교만하지 않고, 명예를 가질 때 자만하지 않으며, 번영과 건강의 복을 받을 때 무례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의 육적 교만을 대적하고 통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다양한 도구들 중에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유용하고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독같은 질병으로 고난을 받거나 심각한 치유를 받아야 할 필요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십자가로 훈련을 받는 것을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신령한 의사는 모든 환자의 건강을 돌보십니다. 그는 어떤 환자에게는 부드러운 약을 주고 다른 환자에게는 충격적인 치료법을 사용하실 뿐이지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VI. 십자가는 회개를 가져옵니다.

1.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약점을 예방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허물을 고쳐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즉시 과거의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그와같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2. 그러므로 혹독한 고통 속에서라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유익을 증진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우리를 또 다른 성경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12:5,6)

 

우리가 아버지의 채찍임을 인정한다면 악행으로 강퍅케 된 절망적인 사람들을 반역적으로 닮기보다는 유순한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돌이키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8)

 


3.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큰 관심을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인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극히 사악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지적해 줍니다. 불신자는 불치의 사악함으로 오래 전부터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징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고귀하게 출생한 자녀와 같이 회개와 교정으로 유익을 얻습니다.지금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잠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VII. 박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합니다.

1. 우리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탁월한 위로의 원천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봉사자라는 증거로 단장되는 놀라운 영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복음을 방어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의로운 목적들을 지지하기 때문에 반대를 받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사탄의 거짓과 맞서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거나 혹은 불의와 손상에 맞서 선량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증오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우리의 소유, 우리의 평판이 위협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헌신할 때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입으로 우리를 가장 복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가난 그 자체는 고통이요. 추방, 경멸, 수치, 투옥도 고통입니다. 모든 재난 중에도 죽음은 최후, 최악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면 모든 일은 합력하여 우리의 행복과 번영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거짓 견해에 동조하기 보다 그리스도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언제나 사도들처럼 기뻐하게 됩니다. (행5:41)

 


2. 그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무죄한 가운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가운데 악인의 악행에 의해서 재산을 약탈당하고 궁핍하게 되었다면 그것 때문에 하늘에 있는 참된 부요가 증가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국에서 추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문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도피하여 그리스도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난과 수치로 뒤덮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학살을 당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림자 같이 지나가는 이 세상의 즐거움보다 영원한 가치를 과소 평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마2:10, 행5:41)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VIII. 박해는 영적 기쁨을 가져옵니다.

1. 성경은 우리가 의로운 목적을 수호하기 때문에 모든 학대와 불행을 겪는 우리를 위로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같은 고난이나 십자가는 신자에게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와같은 역경들을 자아포기와 영적 기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극도로 배은망덕한 행위라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리의 고난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고상하고 자립적인 마음에 대한 거만한 공격은 백번 죽는 것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핍박뿐만 아니라 환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서 "악한 보고와 선한 보고"를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2. 더욱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쓰라리고 슬픈 감정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슬픔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비통함으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아무런 인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 속에 고난이 없고, 질병 속에 고민이 없고, 모욕 속에 고난이 없고, 죽음 속에 공포가 없다면, 이런 고난을 대범하게 여기는 것이 무슨 용기나 덕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고난들 하나 하나는 저마다의 쓰라림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키기 때문에 신실한 성도는 아무리 많은 수고가 따르더라도 슬픔을 저항하고 극복함으로서 참된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은 예민하게 자극을 받을 때 인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무절제한 폭발을 하지 않도록 억제시켜 줄 것입니다.

 

슬픔과 서글픔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 위로 속에서 안식할 때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벧전4:14 딤전4;10 고후6:8)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IX. 십자가가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1. 바울은 신자가 자연적인 슬픔을 거스려 싸우는 싸움을 이처럼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인내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아무런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대의 스토익 철학자에 의하면 마음이 큰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제거해버리고 역경이나 영화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차가운 돌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교만한 지혜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그들은 일찍이 사람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인내를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형태의 인내를 찾으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의 삶에서 인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2. 오늘날 크리스찬들 가운데는 고민하고 울고 외로움 가운데 슬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스토익 파들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극단적인 견해는 실제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몽상가들, 그래서 허구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옵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말씀과 모범으로 정죄하신 잔인하고 가혹한 철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웃의 참화뿐 아니라 자신의 참화를 앞에 두고 애통하며 슬퍼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도 달리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기뻐하겠으나 너희는 울며 애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슬픔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4. 만일 그가 모든 눈물을 정죄하셨다면, 자신의 몸으로부터 피눈물을 흘리신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모든 두려움이 불신앙으로 매도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절망케 하고 놀라게 한 근심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만일 모든 슬픔이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이 "죽기까지 고민하였다"는 고백을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요16:20, 마5:5, 눅22:44. )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X. 십자가는 복종을 배우게 합니다.

1. 헌신된 자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한 슬픔에 대한 자연적 경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내를 향한 그들의 소원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인내가 지나쳐 무감각하게 되어버리고 그래서 자신을 무감각한 벽돌처럼 만들면 가장 강하고 용기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종작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성경은 역경으로 심한 고난을 당할 때 부서지지 않고 그 고난에 압도당하지 않는 성도들의 인내를 예찬하고있습니다. 또한 극심한 고난을 당하지만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하고, 근심으로 짓눌리고 지쳐도 하나님의 위로로 인하여 기뻐 뛰는 성도들을 예찬합니다.

 


2. 동시에 우리의 본성적 감정은 경험에 적대적인 것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에 대한 열정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난관을 무릎쓰고 애를 씁니다.
이와같은 갈등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21:18)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억지나 혐오감을 가지고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순교는 별로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큰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해도 자기의 인간적 감정을 벗어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가 자기 앞에 준비된 피의 죽음을 생각했다면 두려움에 압도되어 빨리 도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서 부르셨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이런 두려움들을 억누르고 주저함이 없이 아니 오히려 기쁨으로 순복할 수 있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한 큰 경외심과 무한한 복종으로 채우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반대되는 경향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닥쳐오고 마음에 큰 시련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내해야 합니다.역경은 언제나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는 치료를 위해서 애통하며 부르짖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에 짓눌릴 때는 외로움과 슬픔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명예를 당하거나 멸시를 모욕을 당했을 때는 마음에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친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해서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4.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음의 위로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슬픔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뜻에 순종하자"슬픔, 탄식, 눈물의 고통 속에서라도 우리는 위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폭풍이 우리의 머리위로 지나갈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21:18)

 


XI.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1. 지금가지 우리는 십자가를 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의 인내와 크리스천의 인내의 차이점을 간단히 증거하겠습니다.

 

극소수의 철학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높은 경지의 이해에 도달하였습니다.

 

심지어 그와같이 이해하는 사람들도 포기가 필요악이라는 것이라는 이유 외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 순종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만일 우리가 필요성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로부터 도피하자마자 복종을 중단할 것입니다.

 


2. 성경은 다른 빛, 즉 첫째 공의와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 둘째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가난이나 추방이나 투옥이나 책망이나 질병이나 가족의 죽음이나 그외에도 여러가지 참화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일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짓는 무수히 많은 죄는 지금까지 긍휼로 내리신 징계보다 훨씬 더 많은 징벌을 받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적 충동이 우리에게서 최선의 것들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방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육체가 굴복되고 우리는 멍에에 길들여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불평이나 반역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우리는 필요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냉혹한 말장난에 더 이상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이 그릇되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생동감 있고 효력있는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인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시는 바로 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을 증진시키신다고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만일 역경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역경을 인내로 잘 감당하면 우리는 필요성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에 복종하는 셈이 됩니다.

 

이와같은 논의의 결론은 우리가 십자가를 더 많이 질수록 영적 기쁨이 더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에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뒤따릅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오직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에서만 솟아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섭섭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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