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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론에 대한 논쟁은 과연 중생론 논쟁인가... 중생론에 대한 교리사적 시각 논쟁인가...

baromi 2014. 1. 10. 09:11

<중생론 논쟁>인가.. <교의사적 시각 논쟁>인가.... 

중생에서의 <의식영역>은 성화의 영역이 아닙니다. 

칼빈의 경우 중생을 성화까지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중생과 성화를 구분하게 됩니다. 
이때 중생과 성화를 구분하게 될때에 오늘날 표현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의미의 중생을 중생으로 했지, 넓은의미의 중생을 성화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교도들은 회심사건 전의 <의식영역>을 상세히 연구했고..
칼바르트의 교리사적 영향을 받은 경우 청교도의 이러한 부분을 칼빈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보았고, 조엘비키와 같은 신학자들은 칼빈에게서 벗어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연중론과 순중론의 이 논쟁은 <중생론> 논쟁이 아닌 
<중생에 대한 교리사적 시각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칼바르트의 교리사적 시각이냐.. 조엘비키와 같은 교리사적 시작이냐.. 
이 차이에 대한 논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에 대한 서술에서 과거의 개혁주의에서 쓰던 용어를 채용하는데 있어서 칼바르트의 교리사적 거부감이 그대로 표출이 되기 때문입니다. 리차드멀로교수가 쓴 "칼빈이후 개혁신학"에 이러한 시작적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으니.. 그 책을 참고해서 입체적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3. 세 번째 접근법은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이란 냉소적인 글귀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정통주의 시대의 개혁주의신학이 예정론적 체계를 가졌다는 슈바이처, 헤페, 베버, 비처의 주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신학의 예정론적 발전이 곧 칼빈의 신학에서 이탈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 접근법은 두 번째 접근법의 결과로서 계시, 성경, 율법과 복음의 관계, 신학 안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할과 관련된 신정통주의 신학적 전제들에 일관되게 기초하고 있다. ‘스콜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해와 그것에 대한 신학화된 해석도 이 접근법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보이는 접근법은 키켈, 암스트롱, 홀, 토렌스, 그라플란드, 홀트롭, 슬리드레그트 등의 연구논문에서 뚜렷하게 발견된다.



4. 네 번째 접근법은 헤페, 베버, 비처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만, 주로 예정론과 기독론에 관한 칼빈의 관점에 대한 20세기적 재평가를 통해 다듬어진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주장하는 학자들(브래이, 맥클렐란드, 도넬리,갓프리,레담) 은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시작을 칼빈 외에 베자나 버미글리 같은 다른 인물들 안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주의 시대의 문헌들 중에서 ‘신학의 예정론적 체계’를 보여주는 문헌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으며, 결국 단일한 중심교리 증거를 찾기보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다른 자료들에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연구모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접근법의 기초를 제공한다.



바빙크 교의학의 내용 중 성화가 아닌 <중생과 회심에 대한>부분에 대한 글들을 제가 밑에 계속 올렸었습니다. 그 글을 참고하시면..


p60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 즉 중생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중생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며, 이것은 칭의다. 다른 한편으로, 중생은 삶의 변화이며 회심이라고 불린다. 인간이 거듭나는 순간, 즉 회개하고 믿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하나님을 거룩하고, 의로운 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과거에 짓눌렸던 허물과 정죄의 의식에서 해방된다.

---> 위 글에서 대부분 <순간> <순간> 이라는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거듭나고 회개와 믿는 모든 과정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적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점진적=성화>라는 도식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빙크의 말을 계속 들어보면 <순간>이란 말이 그러한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간>은 두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바로 원리적 의미로서 <순간>이고, 시간적 의미로서 <순간>입니다. 이 두 용도를 적절하게 적용해야지만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리적 순간을 실제적 순간으로 모두 통일되게 적용해버리면 그야말로 오류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원리적 순간은 실재적으로 시간적으로 <순간>과 <점진성>을 둘다 포함해야 됨을 바빙크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무의식 영역에서 의식영역으로 옮겨지는 <순간>인지.. 의식영역자체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인지도 꼭 알아보시고 실재에 적용해야 합니다.   


무의식영역(좁은 중생)<순간>의식영역




P65
이런 연유로 많은 교의학자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생을 믿음과 회개 뒤에 두고 중생을 믿음과 회개에 다소 의존시키고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구원이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인이 여전히 교회 갈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쓸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은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능동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가능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인간은 부르심이나 세례 가운데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 이 두 활동은 두 측면에서 본 하나의 사건, 동일한 사건… 하지만 중재를 위한 이 모든 제안들이 헛된 시도들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과 분리되지 않을지라도 구분된다면, 사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호작용의 끝에 마지막 결정은 누구에게 놓여 있는가? 결국 누가 문제를 결정짓는가? 만일 인간이라면 원칙적으로 펠라기우스가 옳은 것이며, 결정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인 결정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권세에 있다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편에 서고 수동적 인간에 선행하는 중생(내적은혜)을 수용한다. 

--> 이 부분은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중생과 믿음과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p103 
이 생명은 모든 자연적인 생명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또한 이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며, 처음부터 활동했고, 성령의 교제 가운데 지속되고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고, 살아 활동하고 자라나며, 때가 되면 믿음과 회개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 역시 여기서 말하는 회개와 믿음 역시 성화가 아닙니다. 


51 믿음과 회심

p105

중생 가운데 이식된 영적 생명은 증대되고 성장하기 위하여 양육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연적 생명과 일치한다….


p139-140

하지만 개혁파 교육학은 재세례파 교육학과 감리교교육학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자연과 은혜 사이의 연관성을 견지하며, 실재적인 은혜언약과 세례에서 출발하고, 영적생명의 일치와 유기적 성장을 믿으며, 하나님이 믿음과 회심을 전적으로 언제나 갑자기 마음속에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통상적으로 심리학적이고 교육학적인 방식을 따라 점차적으로 주입된 생명으로부터 나와 발전하게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에서 믿음이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사로 묘사되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경건한 자들은 언제나 믿음을 하나님의 은사로 기꺼이 감사함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거듭나게 한 사람을 갑자기 혹은 점차적으로 믿음과 회심으로 이끌수 있으며, 자신의 기뻐하는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는 언제나 동일한 은혜롭고 전능한 하나님이다. 

--> 위의 바빙크의 글만 보더라도 좁은의미의 중생에서 회개와 믿음사이의 <의식적영역>이 성화의 영역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중생의 시작인 좁은 의미의 중생>은 무의식영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단독사역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의식영역에서 일아난 중생이 의식영역으로 발현되는 순간은 <즉각적>으로 의식영역으로 발현되지만.. 의식영역에서 회개와 믿음의 열매를 맺기까지는 인간의 지성적, 인격적인 자연적 특성상 바빙크의 말대로 자연적인 과정(급격히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점진적이라 말함)을 거치게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재 존재하는 <중생과 회심사건>사이의 실제하는 <의식영역>은 성화의 <의식영역>이 아님은 이미 교리사에서 잘 보여주고 있고, 이미 중생과 성화를 구분하고 있기에 이러한 적용 오류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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