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론(임시적 용어)을 듣는 모든 분들이 늘 자연스럽게 질문하던 것이 바로 아래의 질문과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바빙크가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구원이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될 수 있는가?’
바빙크 (p64~65)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순서상 믿음과 회개보다 앞서게 되었다. ….
만일 중생이 전적으로 믿음과 회개로부터 분리된다면,
중생은 인간의 의식과 의지와는 전적으로 독립된 단지 영적 능력의 주술적 주입으로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연유로 많은 교의학자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생을 믿음과 회개 뒤에 두고 중생을 믿음과 회개에 다소 의존시키고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구원이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인이 여전히 교회 갈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쓸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은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능동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가능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인간은 부르심이나 세례 가운데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
이 두 활동은 두 측면에서 본 하나의 사건, 동일한 사건…
... 하지만 중재를 위한 이 모든 제안들이 헛된 시도들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과 분리되지 않을지라도 구분된다면, 사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호작용의 끝에 마지막 결정은 누구에게 놓여 있는가?
결국 누가 문제를 결정짓는가?
만일 인간이라면 원칙적으로 펠라기우스가 옳은 것이며,
결정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인 결정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권세에 있다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편에 서고 수동적 인간에 선행하는 중생(내적은혜)을 수용한다.
---> "수동적 인간에 선행하는 중생을 수용" 한다...
연중론이 이러한 인간의 수동적(하나님께 찔림 당하는, 혹 요구를 받는) 반응(애씀)은
꼭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중생(좁은)을 한 자에게 일어난다.. 라고 늘 주장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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