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중생론에 대한 대륙개혁파와 영미 청교도들의 또 다른 대조(번역완료)

baromi 2013. 12. 29. 16:40

                                                                        Joel R.Beeke,

Assurance of Faith: Calvin,English Puritanism,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Peter Lang: 1991, p.368~370.

 

(홀리죠이사족: 조엘 비키는 화란출신이면서도 영미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영미청교도와 대륙 특별히

화란의 개혁신학에 밝은 분으로서 그 둘을 병합 조화시켜보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연중론/순중론 토론에 참고가

될 자료여서 아래와 같이 제공하고 번역합니다)...옮기시는 분들은 이글까지도 함께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한국교

회에 이런 자료가 제공되는 것은 아마도 이곳이 처음일 것 같군요. 이것은 기억되어야 할 일이 아닐까요? ^^

 

 

p.368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English Puritans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divines on assurance

far outweigh their differences.....

 

 

 영미청교도들과 화란2차종교개혁때의 신학자들이 구원의 확신문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유사점은 그들간

의 차이점을 훨씬 넘어섭니다....(홀리죠이사족: 유사점들이 더욱 많다고 하는 점에 주목해서 순중론자들은 연중론

에 대해서 애정의 눈길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문제를 다루는 이 조엘 비키의 글은 확신

만 아니라 중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빛을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을 제시하는 아래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p.369.

Nevertheless, there are differences between the English Puritans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divines,

at least in general emphases. The following represent the most significant.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청교도들과 화란2차종교개혁신학자들간에는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일반적으로 강조

되는 바에 있어서 말입니다. 다음 몇가지 점들이 가장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As a whole, the English Puritans tended to emphasize the marks of grace by contrast with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divines, who stressed the steps of grace more than their brethren across the channel. In this

respect, it appears that the English had more impact on the Dutch than vice versa. Jacobus Koelman,

a notable Second Reformation divine and translator of numerous Puritan works, confessed that "books concerning

the practice of godliness are rare; consequently, we are dependent upon England since the theologians there

are very well exercised in this respect."

 

전체적으로 볼때, 영미청교도들은 은혜의 표시들(the marks of grace)에 대해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화란2차

종교개혁신학자들은 바다건너편에 있던 형제들보다는 은혜의 단계들(the steps of grace)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영미파들이 화란파에게 미쳤던 영향이 그 반대 영향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야코부스 쿨만은 화란2차종교개혁당시

유명했던 분으로서 청교도들의 작품을 여러편 번역하여 화란에 소개하였는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경건에 관한

책들이 (우리 화란쪽에는 너무나) 드뭅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들이 이 점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들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The Dutch were prone to schematize God's work of grace slightly more than the English. A higher premium

was sometimes placed on the Spirit's more advanced steps of grace. Thus, for example, the Dutch tended to

stress the Spirit's immediate internal witness, and to distance this witness from the syllogisms, more than

did the English. The sealing of the Spirit was commonly regarded as a special work above and beyond the

normativity of faith. Justification in the court of conscience received more attention among the Dutch as an

experience of assurance being sealed rather than as a metaphor of how assurance is received. More frequently

than the English, the Dutch distinguised justification and adoption, viewing the former as a judicial act of the

Father as Judge and the latter as a paternal act of the Father as Father.

 

화란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영미파보다 약간 더 도식화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더욱더 진전된 은혜의

단계들에 더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화란파에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증거에 대해서 강조하고

이런 내적 증거를 영미파에서 삼단논법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보다는 거리를 좀 두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신앙의 일상성을 훨씬 넘어서서 특별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양심의 법정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화란파들 사이에서 더욱 주목받아서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받는가 하는 것에 대한 메타포로서보다는

구원의 확신이 인쳐지는 것으로 체험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영미파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화란파는 칭의와 입양을

구분하였는데, 칭의는 재판장으로서의 성부의 법정적 행위이시고, 입양은 아버지로서의 성부의 부성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This higher esteem for advanced steps in grace among the Dutch divines, with its corollary of less emphasis

on more normative steps in grace, is a major reason why the English Puritans had greater expectation of various

degrees of assurance than their Dutch brethren. Assurance by means of the promises and syllogisms held more

 hope for the English than the Dutch. No English Puritan taught, as Teellinck did, that scarcely one in ten even

rises to these forms of assurance.

 

이렇게 화란신학자들 사이에서 은혜의 더 진전된 단계들에 대해서 더 귀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은혜에 있어서

 더욱 정상적 단계들에 덜 강조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영국청교도들은 화란형제들보다 여러 가지 정도의 확신에

대해서 더욱더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약속들과 삼단논법들의 수단들을 통해서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

화란파에서보다도 영국 청교도들에게 더 희망적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텔링크가 가르쳤던 것처럼, 열명 중에서 한 명조차도

이런 형태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가르친 청교도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These emphases by the Dutch lent themselves to stressing assurance as a sovereign gift whereas

the English emphasized assurance as a solemn duty. Hence the English often provided elaborate directions,

even entire treatises, on how to obtain assurance and why the believer must strive for it.

 

화란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렇게 강조된 것은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강조하는데 힘을 기울이게 한

반면, 영국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엄숙한 의무로서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청교도들은 때로는 글 전체를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왜 그 확신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정교하게 지침들을

제공하는데 바치곤 하였던 것입니다.

 

Accordingly, the Puritan stress was on the "act"(actus) of faith; the Dutch, on the "habit"(habitus) of faith.

Many divines in both groups, however, aimed for essential balance between the habitus and the actus of faith.

They recognized that if the habitus were neglected, the danger of voluntarism would be present; if the actus

were minimized, a lethargic brand of antinomianism, which viewed faith as something to have rather

than to exercise, would result.

 

따라서, 청교도들의 강조는 믿음의 “행위”(act, actus)에 있고, 화란파는 믿음의 “습관”(habit, habitus)에 있었습니

(홀리죠이역주: 이 주제는 이미 여러번 논의가 되었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양무리마을카페에 이 용어들로 서핑하면

자료가 제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양 그룹의 많은 신학자들이, 믿음의 이러한 “습관”과 “행위” 사이에 본질적인 균형을

잡는 것을 목표하였습니다(홀리죠이역주: 이것이 연중론적 노력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들은 모두 만약 믿음의 습관이 무시되면 인간의 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의 위험에 빠져들게 되고, 그 반면에

믿음의 “행위”가 무시되면, 반율법주의라는 치명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되어서, 결국 신앙이란 것을 “실행하는”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 “지니고 있는” 어떤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홀리죠이역주: 이런 염려가 연중론/순중론 토론에도 있다는 것을 보면 참 희안하기만 합니다. 균형을 잡으려는

연중론을 알미니안주의의 위험을 갖고 있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토론에 대한 무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눈이 뜨여지기를 기도합니다).

 

In corroboration of this, the English underscored the necessity of the fruits of assurance more than did the

Dutch. In terms of the syllogisms, the Dutch leaned more toward the syllogismus mysticus; the English,

 toward the syllogismus practicus. Moreover, an underlying emphasis on the activity of faith influenced

the English toward a greater evangelistic thrust and a greater use of sense perception in describing

assurance of faith than was true of the Dutch.

 

이런 점들과 더불어서 영국청교도들은 확신의 열매들이 필요함을 화란신학자들보다 더 강조하였습니다. 삼논논법의

용어로 말하자면, 화란신학자들은 신비적 삼단논법(syllogismus mysticus)에 기울어졌다면, 영국청교도들은 실제적인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게다가, 신앙의 활동성에 대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동기가

그 밑에 깔려서 영국청교도들로 하여금 복음전도활동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였고 신앙의 확신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감각적 지각(sense perception)을 더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화란신학자들과 비교해서 말입니다.

 

 

These varying emphases of the English Puritans and Second Dutch Reformation divines, however,

should not be exaggerated.

 

 

영국 청교도들과 제2종교개혁 신학자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강조점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점들은 그러나 결코 과장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번역을 마치면서 홀리죠이사족 둘: 하나, 이런 차이점들이 결코 과정되어서 안된다는 것을 이러한 영미파의

중생개념과 대륙파의 중생개념이 전혀 이질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통적인 요소를 인정하면서

보면 두 입장이 조화되고 통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통합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연중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라도 통합시켜 보시는 분들이 이런 글을 읽으시면서 나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사족, 바로 윗글에 나오는 삼단논법은 확신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영미청교도들과 화란대륙쪽에서 모두

사용하던 것임을 조엘비키박사가 논문의 본론에서 심도있게 다룹니다. 화란쪽을 "신비적"이라고 한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만을 강조하면서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기 때문에 신비에 돌리고자 하는

연중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 너무나도 쉽게 이해됩니다. "실제적"이라고 한 것은, 보다 더

경험적인 요소와 실제적인 열매를 강조하고 있는 영미계통의 경향을 보면 쉽게 이해되겠는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경향을 통합시키는 것이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연중론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양지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영미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어떻게 넘어서서 성경의 계시된 진리에 복종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의 관심은 이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아가서, 우리 조선의 최고의 철학이라는 주자학의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을 미흡한 바를 어떻게 성경의 중생론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본성이해가 극복할 수 있느냐에까지

이어집니다. 제현들의 많은 관심 기대해 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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