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4-19)
『The Work of the Holy Spirit』의
제 4장 Regeneration과 제 5장 Calling and Repentance
제 4장 Regeneration
19. Old and New Terminology
이 중요한 일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조사해 보기 전에, 우리는 이 단어들의 용법을 먼저 정의해 보아야 합니다. “중생”이란 단어는 제한된 의미와 더불어서 좀 더 넓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행동으로서 깨어나게 함(quickening)을 가르키는데, 이것은 첫 번째 신적인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이며, 어둠의 왕국에서 그의 존귀하신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 중생은 출발점(starting point)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법 가운데서 태어나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에게로 오셔서, 그의 영혼 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나게 됩니다(born again). 이 변화는 우리들이 죄에 죽어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하늘의 삶을 위해서 다시 태어나게 될 때에 끝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것이 이 단어의 일반적인 용례였지만, 현재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에서 이 제한된 의미를 채용하겠습니다(which we therefore adopt in this discussion). 이 두 용례의 차이에 관해서 정리하자면, 이전에는 은혜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영혼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역사 자체는 의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역자주: 카이퍼가 여기서 분명히 중생이란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정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 두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린 아이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직접 보고 겪은 일에 대해서는 아주 어린 유아때의 일도 기억 못합니다. 만일 어린 시절에 대해서 회상해 보라고 한다면, 높은 의자에 올라 앉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시작해서는, 어엿한 소년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아가던 때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들로부터 자기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의 기억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자기 부모와 가족, 그 때와 장소들,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회상하는 것과 남들에게 들어서 회상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동일한 차잇점을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로마천주교의 방식을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자기 자신의 회상에서 이끌어 내어 묘사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새생명이 심겨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무지한 상태에서 단지 엄청난 영적 혼란기를 겪고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된 것에 대새허만 기억하다 보니, 중생(regeneration)에서부터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죄의 각인과 믿음을 가지게 된 날로부터 날자를 계산해서 그 이후 성화 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기술은, 다소 부정확한 바가 있어서, 현재의 우리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남용해서 결국 구원의 역사가 처음으로 활동하는 기원이 마치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죄인은, 말씀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그 위협과 약속으로 설득되면서, 회개하고 구세주를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덕적 설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면서 새생명의 영광스러운 원천을 희미하게 해 버립니다. 진리를 이렇게 혐오스럽도록 변질시켜버리는 것에 반대하면서, 마코비우스(Maccovius)는 도르트총회시절때부터 이미 중생(regeneration)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러한 다소 비판적인 방법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랐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중생, 오직 그러고 나서 믿음.” 그리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교리의 발전과 일치되는 바였습니다(이런 글을 보면, 카이퍼가 중생 이후에 믿음이라는 공식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계속되는 번역에 관심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주관적인 방법을 포기하게 되면 곧 생명의 첫 번째 심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무슨 일을 시작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면 분명해 지는 것은, 회개란 죄의 각인에 뒤따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이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또한 말씀을 듣는 것은 열린 귀가 필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으로 데려오시는 것으로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의식적이면서 비교적 협동적인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하나님의 원래적인 행위가 있고나서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 안에 새생명의 첫 번째 원리를 심으시는데, 그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는 이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첫 번째 은혜와 두 번째 은혜를 구분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은혜란 죄인 속에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 곧 그 죄인의 알지도 못하는 중에 일어나는 새생명의 창조를 일컫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은혜란, 중생된 사람 속에 그가 온전히 인식하면 동의한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역사를 일컫었습니다(홀리죠이: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영문을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This led to the distinction of the first and second grace. The former denoted God's work in the sinner, creating a new life without his knowledge; while the latter denoted the work wrought in regenerate man with his full knowledge and consent.이런 표현을 보면, 중생한 사람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냐 어쩌냐면서 시비를 붙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을 잠시 막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생하였는데도 아직 회심하지 않는 자, 곧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카이퍼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퍼가 개혁주의신학자가 아니든지,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든지....^^ 이 두 개중의 하나입니다. )
첫 번째 은혜은 자연스럽게도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불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완전하게 일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스코틀랜드신학자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역사를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 fides potentialis)으로 시작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이 실제로 행사되는 것(faith-exercise, fides actualis)과 또한 믿음이 능력으로 행사되는 것(faith-power, fides habitualis)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외현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제가 은혜의 첫 번째 활동을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심겨짐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생명의 새로운 원리”가 심겨짐을 의미하든지, 두 경우 모두 은혜의 역사가 믿음이나 회개 혹은 통회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먼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들을 수 없는 자들이 듣게 되고, 죽은 자들이 깨어나게 된 뒤에 일어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홀리죠이: 왜 이런 구절들이 눈에 안들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구분이 독일관념론의 영향일까요? 오, 주여!)
서로 다른 단계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전체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연속적인 단계들(successive stages)이나 이정표들을 주목해 봅시다.
1.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것은 보통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불려지는데,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이 심겨지는 단계입니다. 이 신적인 행위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속에서 작용합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예에서 모태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나 다른 심오한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우리들은 어릴 때에 죽은 유아들의 구원문제로 하여금 이런 하나님의 행위는 아주 어릴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2. 심겨진 생명의 원리를 보호하는 것. 이 단계에서는, 죄인의 의식에 관한 한,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생명의 원리를 받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실제 회심하기 전에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잃어버린 바 된 사람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초기에 이들은 때론 거룩한 기질이나 놀라울 정도의 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의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닏.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보배들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습니다. 새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수여받은 사람에 의해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수여자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 묻어 있는 씨앗과도 같고, 재밑에 숨어있는 불꽃과도 같습니다. 나무를 태우는 것은 아니지만 불길이 있기는 합니다. 지하에 숨어 흐르다가 마침내는 지표면으로 터져나오는 지하수와도 같습니다.
3. 말씀과 성령에 의한 내적이고 외적인 부르심.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행위인데, 보통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것은 귀먹은 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들을 귀가 생겨난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죽은 자가 아니고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 있지만, 여전히 누워서 딩굴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일어나는데,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만 아니라 믿음 자체, 곧 그 능력이 발휘되고 행사되는 것도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 자체로서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없고, 숨 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성령의 내적 역사하심은 신적이며 또한 상호 일치되는 작용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faith-faculty)를 활성화시켜서 그 부르심이 효과적이 되고, 마침내 (죽었다가 살아났지만)잠자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4.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죄의 확신(conviction of sin)과 칭의를 낳습니다. 이것들은 믿음의 동일한 행사의 다른 두 면입니다. 이 일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다시금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죄의 확신과 마음의 깨어짐이 먼저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깨닫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의 용감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계속되는 매 행위에 의해서 그는 더욱 깊이 자신의 비참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고, 자신의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으로부터 더욱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죄의 확신이 믿음보다 앞서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와 관계없이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는 믿는다”고 할 수 있을 때, 그는 동시에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되었었고, 또한 완전히 구원함을 받은 자, 곧 주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믿음의 행사가 회심에서 일어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그 심겨졌던 생명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믿는다”고 말하며 느끼면서도 언제 믿기 시작하였는지 회상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면, 당장에 믿음은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When a man says and feels 'I believe', and does not recall it, but God confirms it, faith is at once followed by conversion). 새생명의 심겨짐은 믿음의 첫 번째 행위 이전에 일어나지만, 회심은 그 다음에 오게 됩니다. 회심이란, 죄인이 자신의 잃은 바 된 상태를 보게 되었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에서야 옛사람이 죽기 시작하고, 새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이것이야말로 실제의 회심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원리상 사람은 단 한 번 회심하게 됩니다. 곧 임마누엘되시는 분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그 순간 말입니다. 그 후에는 날마다 자신을 변화시키며, 때로는 자신의 뜻과 성령의 뜻 사이에 오는 갈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인간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 주여 나를 돌이키소서, 내가 돌이키겠나이다”. 하지만, 중생에서 그리고 믿음의 첫 번째 행사에서 그는 수동적이지만, 회심시에는 은혜가 그로 하여금 능동적이 되게 합니다. 회심되면서 또한 회심하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치가 못합니다.
6. 성화....
7. 영화...
이것은 어떻게 은혜의 작동이 하나의 체인처럼 서로 연결되어서 함께 돌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은혜의 역사는 죽은 자를 깨우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번 심겨지게 되면, 조용히 꾸물거리고 있는 생명이 부르심에 의해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깨어나게 되면, 자신을 새로운 생명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서 자신이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어서는 새로운 그 생명이 회심에 이르게 합니다. 회심은 성화로 흘러갑니다. 성화는 죄를 섬기던 삶을 죽음에 넘기게 되면서 그 쐐깃돌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영화가 전 인격 속에서 신적인 은혜의 역사가 완결시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계속되는 것이 이전에 진행되던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했으면서도 일찍 죽은 유아들은 죽을 때에 죄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마치 흰머리를 갖고 사반세기를 산 분과 똑같이 말입니다. 두 번째 그리고 나머지까지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 첫 번째는 없습니다. 첫 번째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전체 역사는 하늘을 위해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단계들은 측량기사에게 좌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계들에 대한 지식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억압시키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숨쉬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실은 가장 건강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런 단계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중생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도 연중론은 깊이 공감합니다: 홀리죠이).
성경이 이러한 옛날의 용어에 대한 단계들의 배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답으로 제공할 수 있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see) 수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중생으로부터 은혜의 모든 작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이요, 그러고는 생명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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