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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결정적인 구분(1부완결)

baromi 2012. 7. 18. 12:38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결정적인 구분

유효적 부르심과 회심 사이는 순간적인가? 아니면 얼마큼의 기간이 있는가?

 

현재 카페에서 진행되고 있는 투표결과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라마드님이 댓글을 달아두었습니다. 제가 부르심과 회심 사이에 모든 과정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 같다는 것에 표를 던지신 분들에게 그렇게 회심하신 것에 대해서 간증을 무명으로라도 올려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해서입니다.

 

lamad 13:22

누가 어떻게 올려도 연속적이라고 해석할 것을 장담합니다.왜냐하면 유효적 소명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말씀이 효과적으로 반응할때만 유효적 소명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자체가 유효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봅니다. 단순이 말씀을 듣는 것은 외적 소명입니다. 저는 이부분에서도 해석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댓글을 단 것이 아래와 같습니다:

 

holyjoy 13:47

라마드님 잘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효적 소명을 받은 이후에 회심까지가 순간적이냐 아니냐라는 문제가 결정적이겠지요.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개혁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제가 바빙크의 견해를 올려두면 참고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열린 마음으로 보시면 빛이 많이 비춰질 것입니다. ^^ 라마드님이 진정으로 개혁신학의 주장하는 바를 수용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말입니다.

 

저로서는 이 문제야말로, 연속적 중생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하는 그 주장의 핵심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세계 3대 개혁주의신학자의 한 명으로 알려진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나오는 주장을 요약하면서, 바빙크야말로 순간적 중생론이 아니라, 연속적(elongated) 중생개념을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 * * * *

 

바빙크는 그의 개혁교의학 제 4권 50장에서 [소명과 중생], 51장에서 [믿음과 회심]이란 주제를 다룹니다(부흥과 개혁사, 2011년). 그의 스타일이 언제나 그렇듯이 심층적이고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어가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종잡기 힘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내하여 읽게 되면, 그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바빙크의 정리가 탁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선교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등장했던 초기에 사람들은 믿음과 회개가 죄의 용서와 영생의 유익들에 이르는 길을 연다는 단순한 순서를 따랐다”(64쪽)고 합니다. 성인들인 경우에는 반드시 믿음과 회개가 언제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칼빈도 심지어 여기에서 출발했고 구원의 길에 있어서 중생을 믿음 뒤에 두었다”(64~65쪽)고 바빙크는 강조합니다.

하지만, 개혁파신학을 강조하는 바빙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언제나 유아들, 곧 믿는 신자들의 자녀들의 구원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말을 이어서 곧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서 영구한 자리를 획득하게 되고 숙고하게 되자, 이러한 순서에 대해 두 가지 반대가 일어났다. 첫 번째 반대는 이방인으로 여겨질 수 없고 유아기에 실재적으로 믿고 회개할 수 없는 신자들의 자녀로부터 비롯되었다....이제 만일 믿음과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능력으로서의 믿음과 행위로서의 믿음, 수동적 의미의 회개와 적극적 의미의 회개, 또는 다르게 표현하면 중생과 회개(믿음) 사이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구원의 서정에서도 전자를 후자 앞에 두지 않을 수 없다”(65쪽).

 

곧, 신자들의 자녀들의 구원문제를 염두에 둘 때, 믿음과 회개의 능력조차도 없는 그들의 중생이 믿음과 회개로 인해서 되어진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신학자들과 성도들은, 중생의 문제가 회개와 믿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시작하고, 그 둘 사이에 대한 관계들을 오랫도록 검토해 왔습니다. 바빙크는 이런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성인들과 아이들의 성인들과 아이들의 경우 모두 시간적이 아니라 확실히 언제나 논리적으로(if not temporally than certainly always logically) 믿음과 회개에 선행했다”(70쪽)[여기서 번역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영어원문을 올려둡니다: Hence both in the case of adults and children, regeneration in the restricted sense preceded - if not temporally than certainly always logically - faith and repentance. 이 문장을 “모두 시간적이 아니라 확실히 언제나 논리적으로”라고 박태현목사는 번역해서 바빙크가 중생이 믿음과 회개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그 순서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지만, 영어문장을 보면 확실한 것처럼, 시간적인 순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직역하자면, “확실하게 언제나 논리적으로 앞서는 것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닐지라도”, 중생이 믿음과 회개를 앞선다는 것이 바빙크의 기술한 문장의 뜻입니다. 언제나 항상 논리적으로 앞서지만, 시간적으로 앞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곧 성인들의 경우나 아이들의 경우에 중생이 회개와 믿음에 앞선다고 하는 것이 바빙크가 말하고 있는 개혁파신학의 중생론의 욧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개혁주의 중생론의 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인정하는 것처럼, 칼빈과 같은 이가 믿음과 회개 뒤에 중생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파전통은 중생을 믿음과 회개의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과 개혁파전통에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바빙크에게 있어서도, 이런 중생론에 있어서 긴장을 모두 잘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전통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입니다. 바빙크는 그 책 79쪽에서 이것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구분합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이 믿음보다 앞서는 경우의 중생을 말하고(중생->믿음), 넓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이 믿음(회개)보다 앞서지 않는 경우, 곧 믿음과 회개 이후에 오게 되는 중생(믿음->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초기에는(선교적 상황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믿음->중생)을 사용해 왔다면, 이제 정착된 상황에서는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더불어서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중생->믿음)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중생개념을 개혁파전통에서는 모두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앞서는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뒷서는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 이 두 개의 중생개념 모두가 다 성경적임을 개혁파 전통에서 인정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성실하게 따라 오신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앞서기도 하고, 혹은 중생이 믿음(회개)보다 앞서기도 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한다면, 결국 “중생->믿음(회개)->중생”이라는 것이 개혁파중생개념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좀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주장을 소위 “좁은” 개념의 중생과 “넓은” 개념의 중생개념을 동시에 사용하는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혁파신자들 사이에서 해오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해 온 개혁파전통은,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곧, 중생->믿음)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고 고백해 왔고(요1:12참고),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곧,믿음->중생)으로 오직 믿음(회개)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다양한 성경말씀(예,요3:16)을 있는 그대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진실로 개혁파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것입니다. 이 중생론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 * * * *

 

“중생->믿음(회개)->중생"-이렇게 보면 헷갈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생개념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자니, 이 두 개념의 중생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심리인지라 이 두 개의 개념을 좁은 개념, 넓은 개념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도식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좁은)중생->믿음(회개)->(넓은)중생"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좁다 넓다는 것이 굉장히 임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좁다”함이 도대체 무엇이 좁다는 것일까요? “넓다” 함이 도대체 무엇이 넓다는 것입니까? 혼동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이런 공간적 비유의 임의성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중생1, 중생2라는 식으로 임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제가 그것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중생1->믿음(회개)->중생2”.........,이렇게 해놓으니, 제가 지금 좁은 중생이니 넓은 중생이니 하는 용어도 부정하지 않고 그 개념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까? 제가 지금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개혁신학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그런 분이 있으시다면 저의 글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시고, 바빙크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좁은 중생과 넓은 중생의 구분으로 인하여 개혁파에서는 좁은 중생개념만 인정하고 넓은 중생개념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인양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혹시라도, 바빙크가 한 말, 곧 “이 단어의 더 좁은 의미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79쪽)는 말을 읽고는 하는 말이라면, 너무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마시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바빙크의 설명에 계속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바빙크는 이 좁은 의미로서의 중생개념이 개혁교회에서 확정되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럴만한 이유입니다. 바빙크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 좁은 의미의 중생, 곧 “중생1”은 생명의 생성(genesis)과 발생(origin)만을 가르키는 용어이지, 그 생명의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놓치자 않아야 할 중요한 발언을 바빙크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의학이 이 개념을 영적 생명의 이식에 제한한다면, 교의학은 성경이 일반적으로 중생이나 위로부터의 출생, 하나님에게서의 출생을 말하는 것보다 이 개념에 더 좁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교의학은 소리만 인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박길현목사가 번역한 이 글을 다시금 더욱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Accordingly,when dogmatics restricts the term to the implantation of the spiritual life, it is giving it a more restricted sense than that in which Scripture usually speaks of "regeneration" (or "birth from above" or "birth from God") and must therefore be on its guard not to cite it by its sound alone."

 

제가 강조해서 드리고 싶은 말은, 좁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생”(“위로부터의 출생”, “하나님으로터의 출생”)이라는 단어가 가르키는 개념보다 더 좁은 개념이어서 “중생”이라고 하는 "소리“만 내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좁은 개념으로서의 중생만 말하면서 그것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을 모두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학문적인 논의와 토론이나 이해를 위해서 ”좁은 개념으로서의 중생“개념을 인정하지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보다 더 진실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이 문제로 직접 돌진해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빙크가 “유효한 소명”, 곧 “유효한 부르심”(라마드님이 그렇게도 궁금해 하는 부분)을 다루게 됩니다. 바로 이 좁은 의미의 중생을 바빙크는 “유효한 소명(부르심)”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좁은 의미의 중생을 바빙크는 능동적 중생과 수동적 중생으로 나눌 수 있고, 이렇게 나누어서 이해해야 할 “능동적 중생”을 “유효한 소명(부르심)”(박길현목사는 “효과적 소명”이라고 번역했음)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80쪽).

 

“좁은 의미의 중생”을 또 “능동적 중생”과 “수동적 중생”으로 구분하게 되니까 퍽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계실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효과가 있도록 능동적으로 역사하시는 부분이 있고, 그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인하여 효과가 있게되는 부분이 있으니 이 둘은 구분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활동이고, 다른 한 면은, 그 능동적인 하나님의 활동이 사람에게 수동적으로 미치는 면을 말하는 것이고, 그 둘 중 하나님의 능동적인 측면인 “능동적인 중생”을 “유효한 소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유효한 소명(능동적 중생)에 의해서 오게 되는 변화가 수동적 중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동적 중생이란, 인간의 내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효한 소명에 의해서 인간에게 내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중생, 곧 좁은 의미로서의 중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유효적 소명(곧 능동적 중생)의 결과 그 효과에 의해서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변화가 있는데, 이것이 좁은 의미의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유효적 소명(능동적 중생)에 의해서 수동적 중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동적 중생과 수동적 중생 모두가 좁은 의미의 중생이니까, 수동적 중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가르킵니다. 곧 유효적 소명에 의해서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빙크가 좁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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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가 문제입니다. 이 설명만 들어보면, 유효적 소명은 곧 좁은 의미의 중생이니까 유효적 부르심 이후에 순간적으로 중생하게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보는 것이 바빙크를 제대로 읽는 것이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바빙크의 주장을 결론짓는 것은 바빙크의 중생개념을 너무나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이어서 바빙큰 바로 93쪽의 [447]-[448]절에서 “수동적 중생”을 장황하게 설명하되, 그 결론은 바로 [448]절의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고, 살아 활동하고 자라나며, 때가 되면 믿음과 회개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이것도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영문을 올려둔다: “For that reason it cannot sin or die, but lives, works, and grows, and in due time manifests itself in deeds of faith and conversion.이 문장을 보면, 번역자는 회심으로 번역해야 할 conversion을 ‘회개’라고 번역하고 있다. ‘회심’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은 바로 이 문장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장 곧 51장이 ”믿음과 회심“이란 장이 오기 때문이다. 51장의 제목은 역자가 정확하게 번역했다.)

 

바빙크가 51장, 곧 소명과 중생을 다루는 곳, 그것도 정밀하게 다듬어서 “유효적 소명”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결론내리는 최종 문장을 다시 한 번 더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고, 살아 활동하고 자라나며, 때가 되면 믿음과 회심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생명이 “때가 되면”(in due time)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아직 좁은 의미의 중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 생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빙크의 말의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바빙크가 앞부분에 주의를 주면서 정리한 것에 대해서 환기시켜 봅시다. 첫째, 좁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중생이라는 의미보다는 더 좁은 의미이다. 지나치게 좁다는 뜻입니다. 둘째, 바빙크가 “좁은 의미의 중생은 생명의 생성(genesis)과 발생(origin)만을 가르키는 용어이지, 그 생명의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을 때, 생명의 “생성”과 “발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의 의미로 제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생명의 “성장”과 “발전”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종교개혁 시대에 사용되던 넓은 의미의 중생과는 보다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정착시켜 가면서 갖게 되는 딜렘마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빙크와 개혁교회에 직면한 고민스러운 현상은 성경이 생명의 생성이나 발생만 아니라 성장과 발전도 또한 담고서 중생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중생->믿음(회개)->(넓은) 중생”이라고 구분을 시켜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생”이란 단어 하나만으로 이 “중생”의 성경적 현상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을 강조하고 정착시키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중생을 모두 다 잘 설명했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는 바빙크는 최종 결론에서 “그러므로 생명은....때가 되면 믿음과 회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때가 되면"이라는 말을 넣은 것은, "유효적 소명"으로 인하여 생명이 잉태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이 스스로를 드러내는데는 "때가 되면"이라는 단서를 붙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이 아니고, 연속적인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런 용어를 바빙크가 우발적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51장, [믿음과 회심]을 설명하는 장에서 이런 면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결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강조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곳을 몇 군데 지적하고, 이 글을 마무리 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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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의미의 중생은, 즉 새생명의 원리의 주입으로서 중생은 또한 시간상 믿음에 선행할 수 있다”(137쪽).

 

"여기에 영적 생명이 맨처음부터 가장 완벽하게 발전하기까지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견지하기 위한 가능성이 놓여있다. 왜냐하면,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개혁파에 따르면 단지 믿는 힘으로서 은사도, 자유의지의 회복도, 세례로 인한 중생, 즉 샘영의 혁신으로서 중생과도 본질적으로 다르고, 나중에 뒤따르는 인격적 동의와 수용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온전한 의미에서 즉각적인 중생으로, 원리상 사람 전체를 포함하고, 처음에는 그의 모든 능력과 힘들을 새롭게 하며, 나중에는 모든 면에서 믿음과 회심, 성화와 선행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 확증하기 때문이다.“(138~139쪽)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거듭나게 한 사람을 갑자기 혹은 점차적으로 믿음과 회심으로 이끌 수 있으며, 자신의 기뻐하는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는 언제나 동일한 은혜롭고 전능한 하나님이다[빌2:13]”(140쪽).

 

“중생 가운데 심긴 영적 생명이 말씀과 성령의 영향 아래 지성의 측면에서 믿음, 지식, 지혜 등으로 발전하듯이,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은 동일한 가르침과 인도 아래 의지의 측면에서 회심 가운데 드러난다”(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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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절들 중에 제일 마지막 구절을 옮겨놓은 것은, 비록 이 구절 속에 시간적 요소를 명시하는 표현이 없지만, “발전”이란 단어에서 시간적 요소가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빙크가 믿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다루고 또한 회심을 다루는 것도 처음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중생”이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발현, 곧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빙크가 비록 “연속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어 그 씨앗이 싹이 되어 나오거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유효적 부르심에서 순간적으로 중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어서 “연속적인”(elongated, 혹은 연장적이라고 번역되어도 좋음)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바빙크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신자들의 자녀들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빙크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을 보아서 분명합니다. 바빙크가 언급하는 개혁파교육학에 대한 언급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적인 양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 여떤 힘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혁파 교육학은 재세례파 교육학과 감리교 교육학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자연과 은혜 사이의 연관성을 견지하며, 실재적인 은혜언약과 세례에서 출발하고, 영적 생명의 일치와 유기적 성장을 믿으며, 하나님이 믿음과 회심을 전적으로 언제나 갑자기 마음 속에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통상적으로 심리학적이고 교육학적인 방식을 따라 점차적으로 주입된 생명으로부터 나와 발전하게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한다”(139쪽).

 

너무나도 중요한 다른 주제로 논의가 넘어가기 전에, 이번 글을 전체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렸으면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 중생론의 문제는, “중생->믿음(회개)->중생”이라는 성경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중생의 개념이 단순하지 않고 이렇게도 복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회개)의 앞에 오는 중생과 그 뒤에 오는 중생이 똑같은 중생이란 말로 표현되면 헷갈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이해의 편의나 논의의 효율성을 위해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앞의 것을 “좁은 의미의 중생”, 뒤의 것을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개혁파에서 정리해왔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파성향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이 정착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빙크의 견해에 의하면, “회심은 중생, 믿음, 그리고 전적인 갱신을 포함”(171쪽)하기 때문에, 믿음 이후에 일반적으로 오는 것으로 알려진 회심과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이 혼용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을 회심과 동일시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믿음(회개)->중생”의 도식은, “(좁은)중생->믿음(회개)->(넓은)중생”이나, “중생1->믿음(회개)->중생2”이나, “유효적 부르심(좁은 중생)->믿음(회개)->회심”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것을 “잉태”, 혹은 “수태”라고 보고, 그 수태된 씨앗이 싹이 나는 것을 “출생”이라고 본다면, 이 도식은 “수태->믿음(회개)->출생”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고, 또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초기중생”이라고 표현해서, “초기중생->믿음(회개)->출생”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표현이 바로 피터 마스터스의 연속적 중생론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용어표현상의 차이일 뿐이지 모두 다 개혁주의 중생론의 논의를 이해하면 너무나도 동일한 신학적 전통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본질입니다. 중생의 본질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자들의 유아들의 경우에서처럼 유효적 부르심이 있고 나서 곧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게 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면, 그 사람의 중생은 순간적 중생입니다. 개혁파중생론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바빙크가 신자들의 자녀들의 문제를 그렇게도 심도있게 다룬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신자들은 자녀들의 죽음 앞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효적 부르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유효적 부르심 곧 좁은 의미의 중생을 통해서 주입된 생명의 씨앗이 시간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생명으로 드러내는 때가 있게 된다는 것이 개혁파중생론입니다. 씨앗이 싹이 되어 자랄 때에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생명의 씨앗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적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순간적 중생론입니다. 이런 시간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 연속적(elongated) 중생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연속적 중생론은 유효적 부르심을 받은 뒤에 순간적으로 중생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시간적 과정을 거쳐서 중생하게 된다는 것이고, 순간적 중생론은, 유효적 부르심을 받은 즉시 순간적으로 중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뿌려져서 싹이 자라는 시간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옳다고 보느냐 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이들의 판단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이 옳다고 보십니까?

 

 

사족 하나만 덧붙입니다: 이런 순간적 중생을 연속적 중생론에서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신자들의 자녀들의 경우에 제한하게 되는 것은, 유효적 부르심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경우에는 전인적 성장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회개)의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가능성을 그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릴 때에 죽는 경우에 믿음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씨앗 속에 믿음의 씨앗이 온전하게 심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녀들은 개혁파신학에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사랑의 판단인 셈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라면서,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거절하고 악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아닌 한에 있어서는 이 사랑의 판단이 계속됩니다. 여기서 이 사랑의 판단문제와 관계된 교육학적 문제가 대두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자녀양육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설교의 문제이고, 양육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교회론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더욱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 본고의 2편에서는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대비적인 측면에서 바로 이 교육학의 문제, 설교나 양육, 전도의 문제와 관련해서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끝.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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