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의 성령론을 통하여 자세하게 성령님의 역사와 인간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본래 적인 능력
여기에는 인간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가 필요하다. 이러한 의무 수행의 능력은 본래적으로 주어진 재능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부패한 편견과 습관으로 인하여 죄악 속에서 말씀을 주셨고 근면함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추구하며 배우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주어진 것이며 또한 은혜의 외적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나 말씀을 듣는다고 모두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복음을 필요로 한다. 복음을 들을 때에 정중한 행동이 일어난다.
인간은 믿음을 소유할 수 없고 말씀을 멀리하고 멸시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현실적인 안전만 추구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근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계시되고 선포될 때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주셨고, 그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향한 의무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성경을 따라 살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이성(reason)을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 이하의 것은 없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요인을 주셨다. 이것에 의하여 인간은 날마다 대단히 유익한 것을 소유하게 된다.
이성적인 능력들을 부지런히 영적인 문제에 적용시키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외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을 받는 유익을 얻는다. 이러한 사람은 탁월하게 된다. 목적을 가지고 부지런히 영적인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고 배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성장이 있게 된다.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이 전파되어도 중요한 원인이나 기회가 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파멸되는 것같이 멸망 받는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말씀에 대하여 열심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허위된 모든 무능에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다. 저들은 단순한 것을 아는 것뿐이고, 아는 바를 고백해야 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게으름, 음란, 세상을 사랑하는 것, 죄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 회개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돌아서는 것, 자신에 대하여 불평을 터뜨리는 것 등을 자행하도록 항상 강요받고 있다.
외적으로 부지런하다고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내적인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사람의 심령이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경우 그들에게 유효한 은혜를 주신다.
일반적으로 내가 언급하는 대상은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과 은혜받기를 게을리 하는 자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명령과 제도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 말씀에 의하여 인간영혼에 내적인 영향을 주는 사역
1. 말씀은 사람의 영혼에 내적으로 역사하여 중생의 길로 인도 한다.
- 여기에는 조명(illumination), 자각(conviction), 개혁(reformation)이 있는데,
첫 번째로 이러한 사실이 마음속에 일어난다.
둘째로는 양심과 사랑이 새롭게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고,
셋째로는 인생이 새롭게 되며 회심이 일어난다.
2. 조명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분명히 성경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 성경은 성령님의 깨닫게 해주심이 없이는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 성령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우리 마음속에 모아주고,
-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제하여 주시며,
- 참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3.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이 어떤 신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들이 경배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4.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에게는 두 가지 지식에 도달한다.
순서상으로 말하자면,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 알게 해주는 지식이 먼저 온다.
- 그 다음에 죽은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다른 내적 지식이 더해진다.
5.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해
-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세계의 근원이요
- 또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창시자요
- 통치자로서 뿐만 아니라,
- 중보자의 위격으로 나타나신 구속주로서 알게 되는 것이다.
6. 성경의 목적은,
- 세계를 지으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이 성경에 명백하게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 우리가 미로에 빠져 불확실한 신성을 찾아 헤매지 않도록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내용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
7.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망각에 빠지는지,
- 그리고 각종 오류에 얼마나 심각하게 기울어지는지,
- 또 새롭고 허망한 종교 따위를 계속해서 지어내려는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자.
8. 그러면 우리는 망각으로 인해 파멸하지 않고,
- 오류로 인해 소실되지 아니하며,
- 사람들의 방자함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 하늘의 교훈을 증거하는 문서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조명(illumination)
이 명칭하에서의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빛(light)과 지식(knowledge)은 영적인 것(spiritual things)이다.
여기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조명은 이성적인 기능에 의하여
계시의 교리를 알고(know)
이해하고(perceive)
깨닫는 것(understand)인데
이것은 이성의 꾸준한 기능에 의하여 얻어진다.
빛(light)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계념과 타고난 이해력에 무엇인가가 더해지는(superadded) 것이다.
본래 타고난 인간은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인간의 이성은 부패된 죄성 때문에 저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영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임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effect)이다.
성령은 말씀에 의하여(by) 역사한다.
조명이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간의 단순한 본성에 커다란(a great) 것을 더해주는 것이다.
또한 조명이란 우리의 본래적 능력에 성령님의 활용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명이란 인간의 본성에 분명하게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의의 도를 안다”(벧후2:21)고 하였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겔33:31, 사49:4, 요8:59, 행13:41,45,46)
죄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의 길뿐인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롬1:17).
그리고 조명은 본래적인 단순한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진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찬성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조명을 받은 사람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몇몇 사람들은 말한다.
저들의 믿음이란 다만 계시된 진리에 대해서만 외적으로 지지를 하는 정도이다. (마술사 시몬이 있고(행8:12),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요2:23-24, 요7:31).
그리고 조명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기쁨도 준다.
이 기쁨은 기쁨을 주는 말씀을 받을 때 온다.
때를 따라서 조명의 빛 속에는 기쁨이 있어서 우리들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조명의 근원은 결코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요5:35).
이와 같이 조명을 받아 밝아진 사람들은 말씀과 함께 다양한 결과를 얻는다.
이것은 성령의 영향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자연적인 인간의 소양을 가지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때때로 조명은 대단히 다양한 은사들을 또한 더하여 준다.
따라서 조명이 있는 곳에는 향상이 있고, 이것은 더욱 활용되어 마음에 놀라운 영향력과 결과를 얻게 해준다.
그래서 조명은 영적인 것들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렇다고 조명이 중생케 하는 데는 만족하지 못하다.
조명 뒤에는 중생을 위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중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화(enlightened) 되었지만 회개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먼저 중생이 일어나야 회심(conversion)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와 단계가 있을 때 빛을 받은 영혼이 구원의 은혜(saving grace)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a gift of God)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사는 악용이 되기도 한다.
(2) 자각(conviction)
죄의 자각(conviction of sin)은 말씀에 의한 또 다른 결과이다.
이일로 참된 회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여기에는 다음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과 위엄과 심판을 생각할 때 죄책감은 불안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
전에는 경시하고 조롱하던 것을 이제는 심령의 무거운 짐으로 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과 고통을 갖도록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말씀에 의하여 감동을 받고, 말씀에 따라서 살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 방향과 안전한 정도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자연인은 죄와 그 비참함 때문에 슬퍼하거나 비탄에 빠지는 일이 없으나
조명을 받아 죄의 자각까지 나오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비통해 한다.
세상적인 근심은 사망을 가져오지만(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가져온다(고후7:10).
세상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지만(롬8:15),(육적인 두려움 - terrify, horrify )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을 받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영적인 두려움 - 경외-빌2:12)
죄로 인한 부끄러운 마음은 외적으로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죄의 고백(confession)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기도와 금식 등으로도 표현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적법한 수치심에 대한 진정한 표현이다.(왕상21:29)
이러한 일로 심령이 낙심만 하지 아니한다면 -(육적인 두려움을 통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 가롯 유다)
이 심령은 죄의 형편과 상황에서 그의 생각과 요구와 질문과 계획이 오직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행2:37; 행16:30)
(3) 개혁(Reformation)
가끔 계속해서 삶의 개혁이 일어난다.
더러운 귀신이(unclean spirit) 자기가 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여 다시 돌아갔다.
그 결과 더 악한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형편이 그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마12:43-45).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20).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혁된다.
그렇다고 중생의 사역이 이 사람 속에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비록 사람들 속에 선한 심정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과적으로는 유익한 것들을 잃고 손실도 보고 더 큰 죄악에 빠져 병들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러한 경우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삶의 목적과 계획을 위한 빛과 확신에 대하여 개성이 되지 않고, 자신감도 잃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온다.
주님께 나와서도 참여도가 약하고 믿음이 약해지고 심령이 부패하게 되고 나중에는 흔적도 자취도 남지 않고 만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에 압도당하여서 정욕에 지고 격렬한 유혹에 패하고 죄짓고 그들의 심령은 초창기보다 열배 이상 더 악한 상태로 떨어진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의 사역이 그들에게 분명히 나타나, 현저하게 삶에 개혁(reformation)이 일어나고 예배에 참석도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이 육욕적인 마음으로 기울어져서 악습을 시작하게 될 때 그의 마음은 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마음으로 준비되지 못한다.
- 다니엘 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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