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드님이 후크마가 좁은 의미의 중생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러한 쪽으로 어제 보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생각해 보아도 후크마의 중생의 결론(중생과 설교가)이 연속적 중생관으로 끝맺는 것이 이상하여 판단되어, 다시금 후크마의 중생의 결론을 중심으로 다시금 후크마의 중생~회개까지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후크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생에 대해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연속적 중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즉 라마드님께서 후크마의 중생을 잘못 오해를 하고 읽으셨던 것입니다. 번역이 매끄럽게 잘 편집되지 않아서 그러한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 싶습니다만, 분명하게 후크마는 중생에 대한 글과 전체적 흐름이 "연속적 중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파란색 글은 저의 글이며,
검정색 글은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내용입니다.
제7장 중생 (p155)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p156 하단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의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과 동일시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후크마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다시 말해' 즉 다시 설명해
-좁은 의미의 중생: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 지는 것
-넓은 의미의 중생: 돌이킴을 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이라고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 "중생의 시작" 이라는 뜻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 "돌이킴을 통해 중생이 나타나는 것" 즉 회심 혹은 출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후크마는
좁은 의미의 중생론이 따로 있고,
넓은 의미의 중생론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17세기까지 오직 넓은 의미의 중생론이 있는데.. 최근 들어 개혁주의에서는 이 한 가지 중생론을 세분히 구별할 필요성이 있어서 한 가지 중생론을 둘로 나눠서 구별을 했다면서
한 가지 중생론을 1) 중생의 시작과(좁은 의미의 중생: 비밀스럽고 나타나지 않음)
2) 중생이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중생(넓은 의미의 중생) 로 나눠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후크마는 p176에 (2) 중생과 돌이킴의 관계 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의 시작이지, 중생 그 전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넓은 의미의 중생에는 돌이킴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이 시작되는 것일 뿐 중생의 전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중생이 시작된 후 나타나는 돌이킴과 구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크마는 당연히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난 후 돌이킴이 생기기에 좁은 의미의 중생과 돌이킴은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의 시작이고, 돌이킴은 중생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 둘을 후크마는 동일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후크마가 톨트총회가 "돌아서다'를 "중생과 동의어"라고 말한 것의 중생은 넓은 의미의 중생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야 후크마의 중생 논개가 일괄적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크마는 좁은 의미의 중생이 시작되자마자 돌이킴이 일어난다고 하여, 그 예로 루디아와 고넬료의 예를 들어 해석했습니다. 즉 중생이 시작되자마자 돌이킴의 열매가 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 예로 해석했는데, 이는 엄연한 성경해석적 오류입니다.
즉 후크마의 연속적 중생에 대한 설명은 올바르지만, 그 연속적 중생론으로 성경을 해석한 부분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식으로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의 시작>으로, 돌이킴을 <중생의 나타남>으로 설명하면서 <시작~나타남>이란 연속적 중생론을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생의 결론 부분인 P181~183에서 중생론을 정리하면서 중생론의 정의를 내립니다.
"새로운 영적 생명(좁은 의미의 중생:중생시작)은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여 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넓은 의미의 중생인 돌이킴)은 말씀을 통하여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라고 중생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연속적 중생론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의 중생을 마쳤기에 이제 이차적으로 넓은 의미의 중생인 돌이킴 부분과 회개와 믿음이 계속적으로 후크마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크마는 중생 부분을
먼저 기본적으로 <시작과 출생>의 개념에서
일차적으로 <중생의 시작인 좁은 의미의 중생>을 먼저 다룹니다.
그리고 다시 결론에서 <시작과 출생>의 개념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이차적으로 <중생의 출생인 돌이킴>을 8장부터 전개합니다.
그리고 돌이킴인 회개와 믿음을 9장과 10장에 걸쳐 전개합니다
참고,
7장 중생(중생의 시작부분으로서 좁은 의미의 중생 언급)
8장 돌이킴(중생의 나타남인 출생으로 언급)
9장-10장 회개, 믿음(돌이킴의 요소 언급)
11장 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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