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스크랩] 리가 권한 "오~ 주여" 라는 주술같은 반복적 부르짖음은 "완결된 그 영"을 받는 실질적 방법임.... (원글 1차 자료 추가)

baromi 2012. 1. 29. 07:23


제가 순종의종님에게 리가 "오 주여"라고 주술적으로 반복해서 권한 부분이 혹시 있냐고 물으니 
폴님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더군요...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리가 그의 책에 아예 대놓고 주술적으로 오 주여 라고 세번 반복해하라고 가르치고 있군요.. 
(지방)교회에서는 저런 가르침이 주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봅니 다. 
동시에 리가 어떤 사상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본체와 위격을 상상하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paul77 03:40 new
<"오~ 주여" 라고 주술처럼 반복적으로 부르짖음..> 이라는 표현은 이번에 <우리가 틀렸었습니다>라고 
공개 사과했던 미국 CRI 쪽에서 처음 나온 말입니다. 그것을 정동섭교수가 한글로 옮겨 현대종교에 싣고
또 그런 영향을 받아 최목사님이 통합측 보고서에 적은 것이지요.

그 말을 했던 원조는 미안하다 잘못되었다 라고 이미 사과했으니
그말을 무턱대고 옮겨왔던 이를테면 짝퉁 쪽에서 원조처럼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입니다.

이런 왜곡과 비방이 하도 반복되고 또 어이가 없어서
이젠 이런 설명도 피곤합니다.....



  로빈슨크로소 07:04 new
우리는 성경 구절들을 읽으며 “오 주여”라는 두 단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성경 전체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나와있지만 우리는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을 달콤하게 기쁘게 기도하며 찬양하며 부르는 실행을 자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오 주 예수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호흡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달콤하고 생명을 주고 위안이 되고 신선해지고 강해지고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회복의 귀한 항목입니다.
  로빈슨크로소 07:05 new
당신이 이름을 부를 때 내쉬고 들어마심이 있게 된다. ‘오, 주 예수여!’라고 할 때 내 쉬고 들어마심이 있게 된다.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시오, 아들을 거쳐 영이 되셨다. 성경 안에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나 신약의 헬라어에서 영이란 단어는 공기, 바람과 같은 단어이다. 우리는 ‘오-’라고 할 때 내쉬는 것이다. 이렇게 내쉴 때 들어마시게 된다. 무엇을 들어마시는가? 주님을 들어마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곧 공기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기분 나쁘게 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 주여’라고 세 번 부를 때 기분 나쁜 것이 사라진다. 속에 있는 나쁜 공기들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로빈슨크로소 07:06 new
좋은 산소를 들어마시고 탄산가스를 뱉어내고 또 산소를 들어마시고 탄산가스를 뱉어낼 때 속이 상쾌하게 된다. 한 번 시도해보라. ‘오, 주여, 오, 주여’ 자, 편하지 않은가? 이러므로 주를 호흡해들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구약 성경에 그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당신이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들어오신다. 성경에서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지만 작은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큰 것을 가리킨다.”(하나님의 경륜 P 26-27).
위의 글은 근거가 복잡하게 섞이고 혼잡되어 떠돌아 다니는 "오 주여" 반복적 부름에 대한 글들 복사해온 것.. 



밑의 글들은 지방교회 분이 운영하는 개인홈피인데, "오 주여" 반복적 부름에 대한 근거 있는 글들 복사해온 것...



http://www.callingonthelord.or.kr/quotes/quotes.html  --> 출처 (개인이 영문판을 번역한 것 같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위트니스리의 사역에서 인용

  1. “나는 이다”이신 여호와의 이름 부르기

우리가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방식대로 그분을 섬겨야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의 헛됨과 사람의 약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오 주여, 나는 고집을 버려야만 합니다. 나는 당신의 방식대로 당신을 위해 살며 당신을 경배해야만 합니다. 주여, 내 인생은 헛됩니다. 나는 약하고 죽을 운명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공허하고 자신이 부서지기 쉬움을 볼 때 우리는 자연히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4장 26절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했다. 인류의 제 삼대인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깨지기 쉬움과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히브리어로 “주”라는 단어는 여호와이다(창4:26, 출3:14 참조).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주로 창세기 1장에서 그분의 창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로 창세기 2장에서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사람과 친근한 관계가 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창세기4장 26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부르지 않고, 그들과 심히 친근하신 분, 그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분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신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분이다. 부서지기 쉽고 죽어야할 운명임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영존하시는 분인 여호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름이다. 심지어 이 부름은 인류의 제 삼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길 안에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부서지기 쉬우며 죽어야 할 운명이고 우리의 인생이 공허할 뿐임을 깨달을 때, 자연히 우리는 깊은 속으로부터 기도할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중요한 씨로 간주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일이다.

    1. 주의 이름 부름의 정의

먼저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나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지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는 다름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 부르는 것은 기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도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부름은 단지 기도만이 아니다. “부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외치다” 또는 “호소하다”, 즉 “부르짖다”를 뜻한다. 헬라어로는 “사람을 불러일으키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를 뜻한다. 바꿔 말해서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한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며 영적인 호흡을 체험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호흡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애3:55-56). 이 구절들은 부름이 또한 부르짖음과 호흡임을 나타낸다.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호흡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실행이다. 부르짖을 때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깊이 호흡하게 된다. 부르짖고 호흡함으로써 우리는 내쉬고 들이마신다. 들이마심은 항상 내쉰 다음에 있다. 내쉼으로써 우리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는다.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을 때마다 주님의 적극적인 것들이 당신을 채울 것이다. 화내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화가 나오려고 할 때 당신은 억누르려고 노력하지 말고 다만,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라. 그런 다음, “주 예수여, 나는 지금 화를 내겠습니다.”라고 짧게 기도하라. 이렇게 한 후에도 여전히 화를 낼 수 있는지를 보라.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 예수를 들이마신다.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님을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죄 있고 악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내쉬고 적극적인 모든 것들-주님의 풍성-을 당신 안에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심슨(A.B. Simpson)은 주님을 호흡함에 대한 찬송을 썼다. 그 중의 일부를 읽어보자.

주여 내게 성령 부어 마시게 가르치며

주의 품에 죄와 자아 쏟게 도와주소서


나의 슬픔 뿜어내고 죄악 내쉬고

나는 깊이 들이마셔 주의 풍성을


자아 생명 뿜어내야 당신으로 충만돼

나의 약함 거절하고 주의 은혜 마시리

1963년에 나는 이 찬송을 미국에 있는 몇몇 성도들에게 소개했다. 어느 날 이 찬송을 부른 후에 어떤 성도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찬송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들이마셔, 들이마셔, 뭘 들이마신다는 것입니까?” 그는 약간 마음이 상했다. 몇 년 후 우리가 찬송가를 출판한 다음에 바로 그 성도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찬송가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주님을 호흡함에 대한 그 찬송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호흡하는가?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호흡한다. 예레미야가 말했듯이,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외쳐야 할 뿐 아니라 부르짖기까지 해야 한다. 그는 깊은 구덩이에서 부르짖었다. 우리가 낮아질 때마다, 곧 우리가 “구덩이”아래에 있을 때마다 이러한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주님을 더 영접할 수 있도록 주님께 부르짖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

이사야도 또한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여호와를 찬송할 것은...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2-6).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부르짖고 외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4절에 언급된 부름과 어울린다.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면 된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수 있는가? 그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4절에서 찬양과 부름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며, 6절에서는 소리를 높임과 부르짖음이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부르짖고 외치는 것임을 증명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외쳐 본 적이 없다. 만일 당신이 주님 앞에서 외쳐본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풍성하게 주님을 누릴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분 앞에서 외쳐 보라. 만일 당신이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외쳐본 적이 없다면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은 너무 좋습니다.”라고 외치면 외칠수록 당신은 자신에게서 해방되고 주님으로 채워 질 것이다. 당신은 삼층천에 있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고 외치라고 말했다.

주님을 부르는 것에 관해 내 자신의 간증을 하겠다. 나는 남침례교회에서 자랐다. 구원받은 후 말씀을 추구하기 위해 나는 엄격한 형제회 모임에 수년 동안 머물렀다. 그들은 항상 침묵했다. 그들은 심지어 집회 중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았다. 나는 형제회 교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들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것을 인해 주님께 감사 드린다. 나는 주님과 말씀을 사랑했지만 생명의 합당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내가 받은 유일한 도움은 성경의 흑백 문자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1931년 8월의 어느날, 내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 영이 내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자신을 보라. 너에게는 많은 지식이 있다. 너는 예언과 예표들은 알지만 네가 얼마나 죽어 있는가 보라.” 즉시 깊은 속에서부터 나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의식했다.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내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 나는 길에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며 그날 오후와 저녁과 밤 시간을 고통 중에서 자신을 억제하며 보냈다. 우리 집은 작은 산기슭에 있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해방했다. 나는 외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속에서부터 “오, 주 예수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주님을 보았다. 아무도 주님을 부르라고 내게 가르치지 않았고, 성경에서 그것에 관해 읽은 적도 없었다. 나는 자연히 그렇게 행동했다. 나는 “주님을 누림”이나 “영을 해방함”과 같은 단어를 몰랐지만 내게는 그 둘 다의 실제가 있었다. 나는 내 영을 사용했고 해방했으며 분명히 주님을 누렸다. 그 후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주님을 불렀다. 주님을 부름으로써 나는 주님으로 채워졌다. 아침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나는 하늘에 있었으며 온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발아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배경으로 인해 나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실행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십 이 년후인 1943년에 나는 중국에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투옥되었다. 어느 날 그들은 나를 핍박하며 때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나는, “오, 주 예수여!”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때리기를 멈췄다. 그러나 나의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이것을 매일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이것을 일상 생활에서 실행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사 년 후인 1967년에 주님을 부르는 이 문제가 로스앤젤레스에 나타났다. 그 당시에 나는 말씀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주님을 부름에 관한 말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결과 나는 그것이 고대의 성도들의 실행이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성경 색인(Concordance)을 통하여 나는 주님을 부름에 관한 수많은 구절을 발견했고 주님을 부르는 다양한 방면들을 알았다. 그 당시에 나는 주님을 부르기를 실행할 뿐 아니라 그분을 부르도록 남을 가르치고 돕는 데 있어서 견고해졌고 강화되었다. 1967년부터, 주님을 부르는 것은 주의 회복의 한 항목이 되었다. 그것이 주님을 접촉하는 가장 좋은 길임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에 나는 극동 지방을 방문하여 이것을 성도들에게 가져갔다. 나는 수천 명의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방되었고 풍성해졌음을 간증할 수 있다.

    1. 주님을 부른 역사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을 발명했다고 생각지 말라. 이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거나 주의 회복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주님을 부르는 것은 인류의 제 삼대부터 시작되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는 제 삼대였다. 하와는 둘째 아들에게, “공허함”을 뜻하는 아벨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런 다음 아벨의 동생인 셋은, 인생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그의 아들에게 에노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셋은 그의 아들을 에노스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에노스는 인생의 부서지기 쉬움을 깨달은 후부터 영존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약하고 부서지기 쉬움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만 “오, 주 예수여”라고 불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른 역사는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되며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창12:8), 이삭(창26:25), 모세(신4:7 원문참조), 욥(12:4 원문참조), 야베스(대상 4:10, 원문 참조), 삼손(삿16:28), 사무엘(삼상12:10), 다윗(삼하22:4, 원문 참조), 요나(욘 1:6, 원문참조), 엘리야(왕상 18:24), 엘리사(왕하 5:11), 예레미야(애3:55)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다.(욜2:32, 습3:9, 슥13:9). 성령에 관한 요엘의 예언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만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면으로 요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다른 면으로 그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을 예언했다. 하나님의 부어주심에는 그분을 부르는 우리의 동역이 필요하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날 성취되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의 실행이었다. 그것은 오순절날 시작되었다(행2:21). 오순절날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으며 초기의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받았다. 그들이 부른 것은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심에 대한 반응이었다. 스데반도 또한 주의 이름을 불렀다.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행7:59).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다. 만일 주님이 늦게 오심으로 우리가 죽는다면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고 싶다.


신약의 모든 믿는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실행했다(행9:14, 22:16, 고전1:2, 딤후2:22).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다(행9:14). 이것은 초기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를 부르는 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이자 증거였다. 따라서 다소의 사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로 그들을 식별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불렀다. 오늘날 매일 주님께 기도하는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이웃과 친구들과 학교의 동급생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이 부름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될 것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길은 이런 길이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그는 주님께 사로잡혀서 눈이 멀었다.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작은 제자를 사울에게 보내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 아나니아의 말을 들어보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침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불러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원문참조) 영어의 문법에 의하면 “불러”는 “씻다”를 수식한다. 사울은 어떤 죄를 씻어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한 죄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했으며 의도적으로 다메섹에서 이렇게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을 매우 악한 자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울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예수를 부르는 자들을 결박하는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를 씻는 가장 좋은 길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돌이 켰다는 것이 모든 믿는이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했던 사람이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22장 16절을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너의 죄를 씻으라”가 “침례를 받고”를 수식한다고 생각한다. 문법에 의하면 그런 뜻이 될 수 없다. 이 구절에는 두 항목, 곧 “침례를 받고”와 “너의 죄를 씻으라”가 언급된다. 헬라어 단어“카이(kai)"는 영어에서 “그리고(and)"로 번역되어 둘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침례 받는 것과 죄를 씻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울은 침례를 받았으며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죄를 씻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핍박했던 다소의 사울은 주님께 사로잡혔다. 그럴 때 주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침례받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죄를 씻으라고 말했다. 만일 사울이 침례만 받았다면 많은 신자들은 그가 참으로 돌이 켰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아나니아여, 당신은 그렇게 잠잠한 신자에게 침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침례를 주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형제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사울 형제님, 당신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했습니다. 성도들은 당신을 악하게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결박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에서 당신의 죄를 씻는 가장 좋은 길은 “오, 주 예수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자가 자기 형제들 중 한 명이 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가 돌이 켰다는 증거였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부르는 것”을 강조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2-13).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전서에서도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1:2). 또한 디모데 후서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영적인 것들을 좇으라고 말했다(딤후2:22). 이 모든 구절에 의해 우리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널리 실행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초기 시대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 오랫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무시되어 온 것은 얼마나 유감인가! 나는 오늘날 주님이 이것을 회복하기 원하시며 우리로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이것을 실행케 하셨음을 믿는다. 

    1. 주님을 부르는 목적
      1.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한다.(롬10:13). 가령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기 시작한다 하자. 당신은 그가 아주 조용하게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구원받도록 그를 도울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기도하도록 그를 도울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돕는다면 그의 구원의 체험은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조용하게 기도하도록 돕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받게 하지만 그렇게 풍성하지는 않다. 큰 소리로 부르는 길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풍성하고 더 철저하게 구원받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자신을 열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한다. 

      1. 근심, 환난, 슬픔,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해서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심에서 구출받고(시18:6, 118:5) 환난에서 구출받고 (시50:15, 86:7, 81:7) 슬픔과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함이다(시116:3-4).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도 어떤 환난이나 질병을 만날 때에는 자신이 주님을 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생활에 환난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칠 때 아무도 당신에게 주님을 부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연히 부를 것이다. 주님을 부름은 우리를 구출하고 해방한다. 우리는 근심과 환난 중에 있을 때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욱이 시편116편 3-4절은, 주의 이름을 부름이 우리를 고통, 슬픔, 사망, 음부와 같은 소극적인 것들로부터 구출한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 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주님을 불러야 한다. 

      1. 주님의 긍휼에 참여하기 위해서

시편 86편 5절은, 주는 선하시고 사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분을 부르는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풍성한 긍휼에 참여하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부를수록 긍휼을 더 누리게 된다. 

      1.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또한 시편 116편은, 우리가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3절). 이 한 편의 시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네 번 언급된다.(2, 4, 13, 17절). 여기서 부르는 목적은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사12:2-4) 

      1. 영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을 받기 위한 것이다(행 2:17, 21). 성령으로 채워지는 가장 좋고 쉬운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영은 이미 부어졌다. 우리는 다만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을 영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대여섯 번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은 영으로 채워질 것이다.

      1. 만족함을 위해 영적인 물을 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기 위해서

이사야서55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주님을 먹고 마시는 길은 무엇인가? 이사야는 6절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만족함을 위해 영적인 물을 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는 길은 주님을 찾아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1. 주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

로마서 10장 12절은, 주님을 부르는 모든 자들 위에 그분이 부요하시다고 말한다.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주님은 풍성할 뿐 아니라 생명 주는 영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며 유용하시다(8절). 영이신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그분은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는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당신이 예수를 부를 때 그 영이 온다.

고린도 전서는 그리스도의 누림에 관한 책이다. 12장에서 바울은 그분을 어떻게 누리는가에 대해 말한다. 주님을 누리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12:3, 1:2).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 주는 영이신 그분을 마신다(13절). 15장 45절은 주님이 지금 생명 주는 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마다 그분은 영으로 오신다.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만일 그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내게 올 것이다. 주 예수님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하신다. 그분은 항상 유용하시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그분은 오신다.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를 부를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가까이 함을 얻은 위대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히브리어 참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분은 가까이 하신다(시145:18). 당신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주님의 임재를 누리기 원하는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상의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나 일을 할 때 그분을 부르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부를 때 그분은 당신을 가까이하시며 당신에게 부요하시다. 

      1. 스스로 분발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분발할 수 있다. 이사야64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우리는 실망하거나 침체되어 있을 때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향상되고 분발할 수 있다. 

    1. 주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이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딤후2:22). 근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순수한 입술로 불러야 한다(습3:9, 히브리어 참조). 느슨한 말 보다 더 우리의 입술을 더럽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느슨한 말로 인해 우리의 입술이 순수하지 않다면 주님을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입술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열린 입이 필요하다(시81:10, 7절참조). 우리는 입을 크게 벌려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단체적으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디모데 후서2장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시편88편 9절은,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매일 매시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호흡을 멈추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호흡이 멈출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 더우기 시편 116편 2절은, “내가 평생에 그분을 부르리로다”(원문참조)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는 더 많은 주님의 백성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는 이 실행을 시작하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그것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최상의 길임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의 회복의 한 항목이 된 이후로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질책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이 당신에게 가깝다고 말합니까?”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다. 당신 안에 숨(호흡)이 없는가? 당신 안에 이미 숨이 있는데 왜 여전히 호흡하는가? 이 질문의 논리는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데 주님을 불러야 하는 것과 일치된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건전한 논리일지 모르나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아무도 호흡에 대해서는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 숨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호흡할 필요가 없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계속 호흡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불러야 하며 그분을 더욱더 들이마셔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당신은 그렇게 큰 소리로 부릅니까? 우리 하나님이 귀머거리입니까? 그분이 우리의 조용한 기도를 들으실 수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은, 주님이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을 크게 불러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논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보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에 있는 “심한 통곡”은 분명히 조용한 기도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는 자들에 대해 불평한다면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는지 그분께 물어 보아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닌데 왜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셨는가? 더욱이 요한복음에서 최소한 두 번 그분은, 혼자 계시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다(16:32, 8:29). 아버지께서 계속 그분과 함께 계셨는데 왜 그분은 아버지께 심한 통곡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었는가? (Back)

(위트니스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333-346)

  1. 주님의 이름 부르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부름은 기도의 한 종류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도가 아니다. 부르다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외치다, 호소하다, 부르짖다이다. 부르다의 헬라어의 의미는 사람을 부르다, 이름을 불러 사람을 부르다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들릴수 있게끔 이름을 불러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조용할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려야 한다.

구약의 두 선지자들이 주님을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볼 수 있게 도와줬다. 애레미야가 말하길 주님을 부르는 것의 의미는 그분께 외치고 영적 호흡을 체험하는 것이라 했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애3:55-56). 또한 이사야도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외치는 거라 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2-6).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 능력, 노래인가? 어떻게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수 있는가? 그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고 찬송을 부르고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4절에 언급된 부르는 것에 배합한다! (Back)

    1. 구약에서의 주님의 이름 부르기

주의 이름을 부른 역사는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되며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창12:8), 이삭(창26:25), 모세(신4:7 원문참조), 욥(12:4 원문참조), 야베스(대상 4:10, 원문 참조), 삼손(삿16:28), 사무엘(삼상12:10), 다윗(삼하22:4, 원문 참조), 요나(욘 1:6, 원문참조), 엘리야(왕상 18:24), 엘리사(왕하 5:11), 예레미야(애3:55)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다.(욜2:32, 습3:9, 슥13:9). 성령에 관한 요엘의 예언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만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면으로 요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다른 면으로 그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을 예언했다. 하나님의 부어주심에는 그분을 부르는 우리의 동역이 필요하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날 성취되었다. (Back)

    1. 신약의 믿는이들에 의해 실행됨.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의 실행이었다. 그것은 오순절날 시작되었다(행2:21).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주의 이름을 불렀다(행7:59). 신약의 믿는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실행했다(행9:14; 22:16; 고전 1:2; 딤후2:22).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다(행9:14). 이것은 모든 초기의 성도들이 예수를 부르는 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요 증거였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된다면, 우리의 부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임을 표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부르는것”을 강조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2-13)고 말한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전서에서도 주님을 부름에 대해 말한다.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1:2). 또한 디모데 후서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영적인 것들을 좇으라고 말했다(딤후2:22). 이 모든 구절에 의해 우리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널리 실행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초기 시대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 오랫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무시되어 온 것은 얼마나 유감인가! 나는 오늘날 주님이 이것을 회복하기 원하시며 우리로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이것을 실행케 하셨음을 믿는다. (Back)

    1. 부르는 목적

우리는 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롬10:13). 조용하게 기도하도록 돕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지만 그렇게 풍성하지는 않다. 큰 소리로 부르는 길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풍성하고 더 철저하게 구원받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자신을 열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한다. 시편 116편은, 우리가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3절). 이 한 편의 시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네 번 언급된다(2,4,13,17절). 전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사12:2-4).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불러 본 적이 없다. 만약 당신이 주님을 불러본적도 없고 주님 앞에서 외쳐본 적도 없다면 나는 당신이 주님을 풍성한 방법으로 누렸는지 의심스럽다. “그 이름을 부르며!...소리를 높여 부르라”(사12:4, 6). 그분 앞에서 소리치는 것을 시도해 보라. 주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인지 소리쳐본 적이 없다면 한번 해 보라. 당신이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내게 너무 좋습니다”라고 외치면 외칠수록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서 더 해방되고 주님으로 채워질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방되고 풍성해지고 있다.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심에서 구출받고(시18:6, 118:5) 환난에서 구출받고(시50:15, 86:7, 81:7) 슬픔과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함이다(시116:3-4).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도 어떤 환난이나 질병을 만날 때에는 자신이 주님을 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생활에 환난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칠 때 아무도 당신에게 주님을 부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연히 부를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풍성한 긍휼에 참여하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부를수록 긍휼을 더 누리게 된다(시86:5).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을 받기 위한 것이다(행2:17, 21a). 성령으로 채워지는 가장 좋고 쉬운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영은 이미 부어졌다. 우리는 다만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을 영접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서 55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주님을 먹고 마시는 길은 무엇인가? 이사야는 6절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만족함을 위해 영적인 물을 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는 길은 주님을 찾아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12절은, 주님을 부르는 모든 자들 위에 그분이 부요하시다고 말한다.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주님은 풍성할 뿐 아니라 생명 주는 영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며 유용하시다(8절). 영이신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그분은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는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고린도 전서는 그리스도의 누림에 관한 책이다. 12장에서 바울은 그분을 어떻게 누리는가에 대해 말한다. 주님을 누리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12:3, 1:2).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 주는 영이신 그분을 마신다(13절).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만일 그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내게 올 것이다. 주 예수님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하신다. 그분은 항상 유용하시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그분은 오신다. 당신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주님의 임재를 누리기 원하는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상의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나 일을 할 때 그분을 부르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부를 때 그분은 당신을 가까이하시며 당신에게 부요하시다.

또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분발할 수 있다. 이사야 64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우리는 실망하거나 침체되어 있을 때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향상되고 분발할 수 있다. (Back)

    1. 부르는 방법

어떻게 우리는 그분을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딤후2:22). 구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순수한 입술로 불러야 한다(습3:9). 느슨한 말보다 더 우리의 입술을 더럽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느슨한 말로 인해 우리의 입술이 순수하지 않다면 주님을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입술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열린 입이 필요하다(시81:10). 우리는 입을 크게 열고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단체적으로 부를 필요가 있다. 디모데 후서 2장 22절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시편 88장 9절은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게다가 시편 116장 2절은 “그러므로 내가 평생 그분을 부르리로다“(원문참조)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Back)

    1. 실행의 필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다.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실행해야 한다. 결코 우리의 영적 호흡을 멈춰서는 않된다. 우리는 더 많은 주님의 백성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는 이 실행을 시작하기 바란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알고 그분의 부활능력안으로 이끌리어 그분의 즉각적인 구원을 체험하게 되어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과 함께 하나됨 안에서 걷게 되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시간에도 “주 예수, 오 주 예수”를 부르자. 만약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하다면 이것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훌륭한 방법임을 보게될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주님의 이름 부르기, 영문판 p.1-11)

  1. 구약에서의 주님 부르기
    1. 셋과 에노스-주의 이름을 부름

아마 셋과 에노스의 이름은 당신에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셋과 에노스는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이지만 성경은 그들을 하나로 간주한다. 아벨이 살해당한 후 생명 노선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노선을 잇기 위해 셋과 에노스가 일어났다. 이 두 세대는 현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창4:26). 그들은 기도했을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불렀다. 만일 당신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원본을 읽는다면 당신은 “부르다”라는 단어가 다만 기도할 뿐 아니라 “부르짖다”라는 뜻임을 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만 “부르는”방식의 기도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도가 조용하고 심지어 침묵과 같다. 그러나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는 하나님은 접촉하기 위해서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시므로 우리의 말을 잘 들으실 수 있다고 말하며 논쟁하지 말라. 심지어 주 예수님 자신도 산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셨다(히5:7). 셋과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께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해 본다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했다(롬10:12). 당신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가령 당신이 새 신자로 하여금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지도록 돕는다하자. 그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내 구주로 취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이것도 좋은 기도이지만 그는 강하게 주님을 부르는 것이 더 좋다. 만일 그가, “오 주 예수여! 나를 위해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의 영은 활발하게 될것이며 그는 생생하게 주님을 접촉할 것이다.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분을 부르는 이것은 점차 상실되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무시하며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떠날 수 없다. 평화롭고 문제가 없을 때에 당신은 냉정하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체면이 깍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 가령 자동차 사고를 당했거나 갑작스런 병이 들었을 때 당신은 자연히 “오, 주여!” 라고 하며 그분을 부를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그들이 주님을 부를 것이다. 문제가 닥칠 때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를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로 그분을 누리는 것이며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먹는 것이다. (Back)

    1. 아브라함-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아브라함은 노아보다 더 뛰어나다. 로마서 라이프 스터디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주입되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이끌어 내셨다(행7:2).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외에도 하나님은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창12:7, 17:1, 18:1).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힘에 의한 믿음의 거인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똑같이 약했다.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듭거듭 나타나셨으며 그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살 수 있도록 신성한 요소를 아브라함 안에 옮겨 부으셨고 주입하셨다. 아브라함의 체험은 우리에게, 충전된 후에는 잘 작동되지만 얼마 후에 다시 충전시켜야 하는 건전지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따른 아브라함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어 그에게 거듭거듭 나타나심으로써 인도하셨다. 내가 전에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어떤 지도나 지침을 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따라 행했다. 만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어떤 방향이면 아브라함은 다만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풍성을 누렸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주의 이름을 불렀다(창12:7-8).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야곱 또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이 세 세대가 똑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의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분을 생명나무로 누렸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을 때 나타나셨으며 약 반나절을 그와 함께 계셨고 심지어 그와 함께 음식을 드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워졌다고까지 말한다(약2:23).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이야기하셨으며 친구로서 함께 음식을 드셨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주님을 그렇게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분깃은 창세기 18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체험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계시록 3장 20절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잡수실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는 주님과 잔치할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 반 나절 동안 주님과 식사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과 잔치할 수 있다. 우리는 아침식사, 점심식사, 저녁식사때에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분깃은 아브라함의 분깃보다 더 높고 풍성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명나무로 누렸다. 생명나무란 무엇인가?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유지시켜 주는 생명의 공급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렇게 누렸다. (Back)

    1. 이삭-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접촉했다. 그도 또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았으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창26:2, 24-25). 그는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는 길을 물려받았다. (Back)

    1. 야곱-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부르심 받은 족속 중의 셋째 세대인 야곱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는 방식으로 살지 않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접촉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주님에 의해 처리받은 후 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배웠다(창35:1, 9, 48:3). 이 길은 그가 물려받은 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에 의해 인도받은 길이었다. (Back)

    1. 사무엘-기도하고 주를 따름

사무엘은 구약에 있는 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다. 성경은 사무엘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코 범치 않겠노라고 했음을 말한다(삼상12:23). 사울 왕이 하나님께 득죄한 것을 듣고 사무엘은 슬퍼하며 온 밤을 주님께 부르짖었다(삼상15:11). 그러므로 성경은 사무엘을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라고 말하며(시99:6),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렘15:1). 이 모든 것은 사무엘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부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서 있는 사람이었음을 계시한다. 주의 임재 안에 서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는 주님을 누렸으며 생명나무이신 그분께 참여했다. 이런 동기와 누림은 그를 인류 역사상 놀라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Back)

(위트니스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영문판 p.184, 186-188, 192)

  1. 우리의 입을 사용하여 주님을 부름

    1. 그 풍성을 누리기 위해 주님을 부름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절). 당신에게는 당신을 위해 하늘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오거나 음부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사람이 필요치 않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셨고 음부에서부터 올리우셨다. 그분은 성육신되셔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셨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음부에서부터 올리우셨다. 그분은 가셔야 할 곳은 다 가셨다. 이제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에게서 멀지 않다. 바울은 그분이 당신의 입에 있다고 말한다(8절).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는 입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로마서 10장은 입으로 “주 예수”라고 시인해야 함을 말한다(9절). 단지 마음만 훈련해서는 안 되고 또한 입을 사용해야 한다.

여러분 중 다수가 입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신은 많이 기도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입으로 예수를 부르고 외쳐 본 적이 있는가? 다만 주 예수께 기도만 하지 말고 입을 사용하여 주 예수를 시인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 10장에 있는 “입”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기 바란다. 여러분은 입을 사용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로마서 10장은 그분을 믿거나, 그분을 경배하거나 그분을 묵상하거나 그분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부요하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한다(12절). 주님을 불러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기독교가 놓친 것을 교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후 당신은 주님께 당신의 실패나 죄들을 자백해야 하고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문제를 놓쳤고 여전히 놓치고 있다.

부르는 것과 기도의 차이를 설명하고 싶다. 우리 집에 불이 났다면 누군가에게 가서 “선생님,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물이 부족합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집에 불이 붙은 어떤 사람은 “불이야!불이야!”라고 소리칠 것이다. 이것이 “오 주 예수여! 주 예수!”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땅에 엎드러졌을 때 그는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소리쳤다. 그 후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가셔서 사울을 방문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나니아는 염려하며 주님께, “그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행9:14)라고 말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을 때, 그는 날마다 주 예수를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하기 원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땅에 엎드려져,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말했다.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고 말씀하셨다. 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오셨다.

만일 우리가 실제하고 참되고 살아 있는 사람을 부른다면, 우리에게 올 것이다. 예수는 살아 계시지 않는가? 참으로 그분은 계시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모든 풍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다.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10:12-13).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주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의 일생을 통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구원받는 것은 단순히 지옥가는 데서 구출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구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인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의 충만한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라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함의 누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Back)

    1.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걷기 위해 주님을 부름

주님을 부르는 실행은 신약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에도 있다. 이사야 12장 2절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과 노래라고 말한다. 3절은 그분이 구원의 우물이시며 우리는 기쁨으로 이 우물들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이 물을 기르는지를 말한다. 4절은 우리가 주님을 찬양해야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6절은 우리가 소리치며 외쳐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물을 마실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우리가 조용히 주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사야 12장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노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구원의 우물들이시다. 우리는 명상하거나 침묵함으로 이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소리치고 외침으로 이 우물들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로마서 10장에 따르면,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의 누림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입을 훈련하여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또한 이사야 12장에 따르면, 구원의 우물들에서 생수를 긷는 길은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그리스도를 누리는 살아있고 실제적인 길, 영문판 p.30-32, 33)

  1. 부름으로 그 영을 받음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영은 완결된 영으로서 “날(raw)"영이 아니다. 그 신성한 영은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능력과 함께 완결되었다. 이 완결된 영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조제해 주신 바로 그 한 포(dose)의 약이 되었다. 우리는 다만 “오 주 예수. 오 주 예수”라고 주님의 이름을 계속 부름으로 이 한 포의 약을 먹어야 한다. 어떤 약은 고혈압을 위해 조제되는데, 이 약을 먹고 조금 지나면 혈압이 내려간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위해 이러한 효능있는 한 포의 약을 먹어야 한다. 이 한 포의 약은 복합된 영이다.

우리는 “오 주 예수”라고 부름으로 이 약을 먹을 수 있다. 외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주님을 반복해서 부른다면 우리의 화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살전5:17). 기도하기 위해 우리는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영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바버(M.E. Barber)자매님은 찬송에서, “주의 이름 호흡함이 참 생명을 마심일세”라고 말했다.(한국복음서원 찬송가 65장 2절).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예수의 이름을 들이마실 때, 우리는 생명의 영을 마신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 영안에서 호흡하는 것이다(애3:55-56).

오늘날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하나님의 완결된 영인 그는 신성, 인성, 예수의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복합되었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풍부하다. 그분은 풍부하게 풍성하시고 넘치는 공급을 갖고 계신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접촉하고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인격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은 “네, 저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른다면 그 영은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그것은 그 영이 인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전1:2). 어떤 형제 자매들은 집회중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너무나 위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형제가 교수라면, 그는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의 위엄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보다 쉽다. 나이 든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주님을 부를지 모르나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를 부르지 않으면 우리의 약, 한 포의 약이신 그 영을 취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최고의 약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영을 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Back)

(위트니스리, 주의 회복의 다섯가지 중점, 영문판 p.40-41)

  1. 부름으로 분배하심을 받음

기독교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단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만약 여러분중 몇 명이 이것을 결코 해본적이 없다면 오늘부터 해보라고 격려하겠다. 아침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세 번에서 여덟 번까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아침 일찍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부드럽게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을 실행함으로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주님을 부름으로 신선한 분배를 받는다. (Back)

(위트니스리, 내재적인 조망, 영문판 p.20)

  1. 부름으로 순환하는 영을 누림

피의 순환은 우리의 신체적인 몸에 매우 중요하다. 이 순환은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자양분을 나르며, 또한 우리 몸으로 하여금 보양을 받게 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몸 안의 순환을 촉진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신체적인 운동을 할 필요성이 있을 때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몸 안의 순환을 촉진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신체적인 운동을 할 필요성이 있을 때도 있다. 이것은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로마서 10장 12절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요해지신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면 부를수록 우리 영이 더욱 더 해방되며 우리가 더욱 더 치료되고 강하게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주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를 매우 건강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침묵하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다면 우리는 매우 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오 주 예수여! 오 주여!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하고 십 분 동안 부른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부요해지실 것이다. 우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힘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느8:10).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비결을 배웠다.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하시다. 부르는 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심지어 큰 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가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합당한 상황에 있을 때에는 큰 소리로, “오! 주 예수여! 아멘!”하고 불러야 한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강화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 영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순환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순환하는 영은 신성과, 인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영이다. 이 복합적인 영 안에 있는 풍성은 측량할 수 없다. 이 영이 우리 안에서 순환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린다. 이 순환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다. (Back)

(위트니스리, 장로직분(2), 영문판 p.115-116)

  1. 약함에서 주님을 부름-에노스

하나니은 그분의 이름이 에노스에 의해 불리워지도록 하기 시작하셨다(창4:26). 우리는 또한 이것에 대해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에노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그것은 에노스에 의해 시작되었거나 그에 의해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에노스를 감동시키시어 그분을 부르게 한 것이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부서지기 쉬운, 죽어야 할 운명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노스는 매우 부서지기 쉽고 약하고 덧없는 존재였기에 그는 자신에게 신뢰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를 자극하여 자연스럽게 “오, 여호와여! 오, 여호와여!”라고 부르게 하셨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진리와 실행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아주 약하고 덧없음을 느낄 때 자진하여 “오, 주여”라고 부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빠졌을 때마다, 우리가 아주 연약하고 덧없으며 무력함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오, 주여!”라고 불렀다.

실제로 우리가 아주 연약하고 무력하게 느낄 때 영 하나님은 우리를 속에서부터 자극하여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부르게 하셨다. 이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모든 적극적인 실행들은 항상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어떤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는 사실상 발명자가 아니라 모방자들이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발명가이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발명하셨으므로 그분이 일으키시는 분이시오 발명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자극하심을 뒤따르는 사람들이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황을 처리할 수 없는 많은 때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불렀으며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하여 그분을 신뢰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 중국 본토에서 나는 일본 침입군에 의해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나의 온 존재를 다하여 절대적으로 그분을 신뢰하였다. 그 당시에 일본 침략군대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사소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들의 손 안에 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주님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 안에서 내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나를 자극하여 그분을 신뢰하게 하셨다. (Back)

(위트니스리, 하나님의 역사, 영문판 p.57-58)

  1.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 주님을 부름

만약 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누리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림에 대해서 간단하고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고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다(고전 15:45b, 원문참조). 그 다음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디에 계시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영안에 계시다(딤후4:22).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우리의 영안에서 내주하시는 영이심을 깨달아 우리의 영을 사용해 “오 주 예수여”라고 그분을 불러야 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느낌에 그분은 객관적이고 멀리 느껴진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길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안의 느낌이 있다.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훌륭하다.(사도행전 2장 21절 1번 각주 참조). 로마서 10장 12절은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한다. 우리가 그분을 부른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부요하시다. 그분의 풍성은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만 우리가 누릴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모든 풍성안에서 누리기 위해 그분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런 경배를 발명해 내었겠는가? 만약 그리스도가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경배도 하나님을 누림도 없었을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U하나님의 역사)

  1.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먹고 마심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릇들이고 만유를 포함한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것이 성경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비유된다는 것을 보기 원한다. 이사야 55장 1절과 6절은 먹고 마시는 길이 주님을 부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사야 55장 1절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소 난해한데, 이는 이 구절이 물로 나와서 먹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물에 먹기 위해서 나오는가 마시기 위해서 나오는가? 어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기를 먹인다. 작은 아기들이 젖을 마실 때 그것은 또한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마시는 것에 포함된다. 우리는 물에 나와 사서 먹는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가 포도주와 우유를 산다고 말한다. 포도주와 우유는 둘 다 액체이지만 음식의 영양분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는 것은 영양소를 위해 무언가를 먹는 것이다.

6절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주님을 찾으라고 권고한다.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물에 나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물이시고 찾는다는 것은 나아오는 것이다. 마시고 먹는 것은 그분이 가까이 계시는 동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는 것은 물에 나아오는 것과 같다. 그분을 부르는 것은 마시고 먹는 것과 같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채우는 길이다. 영적인 것들은 정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주님이 주신 그림자들이 영적인 것들을 설명한다. (Back)

    1. 합당한 영적 소화를 위한 필요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예수를 먹어야 한다. 그러나 먹은 후에는 또한 잘 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소화불량이 있길 원치 않는다. 소화불량은 먼저 위통을 일으키고, 그 다음엔 위궤양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위암을 일으켜 죽게 할 수도 있다. 제대로 소화하지 않고 먹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또한 합당한 방식으로 그분을 소화해야 한다. 합당하게 소화한다면 당신이 먹은 음식은 당신의 육신의 각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음식물에는 통과할 통로가 필요한데, 소화불량은 음식물을 위한 통로가 없음을 의미한다. 음식물이 통과할 수 없으므로 문제가 발생한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영적인 느낌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몇몇 사랑스런 성도들은 먼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기도로 말씀을 읽는 것을 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그들의 입맛과 이것에 대한 식욕을 잃는다. 이것은 주 예수를 담은 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당신 안에 일어난 것이다. 소화불량이 생기고 주 예수가 통과하실 통로가 없다. 주 예수를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먹은 후, 우리는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모든 속 부분을 당신께 열도록 나의 온 존재를 지키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교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우리에게 아주 실행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부른 후, 나는 그분이 당신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이 당신 안으로 들어간 후 당신은 아마 그분에게 그다지 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작은 부분만을 그분께 열고, 대부분은 그분께 닫혀 있을지 모른다.

주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실제적인 분이시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당신 속에 들어가셔서 당신을 채우신다. 당신이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동안 이 실제적이고도 살아 계신 예수님은 당신의 천연적인 존재를 만지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은 “주님, 이 부분만큼은 저를 만지지 마십시오. 당신이 계신 곳에 머무르십시오. 당신은 나의 손님이시고 당신은 거실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개인적인 내 침실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소화불량을 의미한다. 영적인 음식이신 주님이 당신 안에서 통과되실 길이 없다. 음식이 당신 속 부분 안으로 들어갈 자유로운 길이 없다. 그러므로 소화불량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에는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 교리적인 가르침들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주님을 먹고 주님을 누려야 한다. 가령 내가 저녁 식사에 당신을 초대하여 당신이 음식을 먹고 누리도록 허락하는 대신, 음식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끔찍할 것이다. 우리는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실제적인 영양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라고 단순하게 그분을 부름으로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들어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부른 후, 주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움직이시며 우리 속에서 우리를 만지신다.

주님을 부른 후 젊은 형제는 결국 그가 머리를 자른 방식이 처리 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만일 그가 이 느낌에 반응하는 것이 느리다면, 이것은 그가 주님이 통과되시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주 예수를 부른 후 만일 안에 어떤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이든지 그것은 주 예수님이 움직이고 계심을 의미하고 당신 안에 소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이 속의 느낌을 따라가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느낌을 따라간다면 당신은 기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높은 입맛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화력이 더 놓은 식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속의 느낌과 싸운다면 이것은 소화불량을 가져온다. 그러면 당신은 기도로 말씀을 읽는데 그렇게 간절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속의 느낌에 반응하고 따라간다면 주 예수에 대한 당신의 입맛은 돌아오게 되고 당신의 영적 소화력은 좋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부요함이 당신의 세포들이 되고 이 세포들이 당신의 유기적인 조직 안에 자라게 된다. 이것은 당신을 신성한 생명 안에 자라게 하고 주님 안에서 당신을 강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서 있는 것을 쉽게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주님 안에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한 사람이 넘어지기는 어렵다. 이것은 장성한 사람들이 먹은 영적인 음식으로부터 모든 영양소를 동화시키는 좋은 소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Back)

(위트니스리, 그리스도를 누리는 살아있고 실제적인 길, 영문판 p.43-44, 45-47)

  1.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복합적인 영의 기름부음을 받음

로마서는 거룩케 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과 영화롭게 됨에 대해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그 영의 기름부음에 의해 수행된다. 그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고후3:17).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로마서 10장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위해 하늘로 가거나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기 위해 음부로 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6-7절).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입에 있다(8절). 그분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그 영이 되어 공기 곧 호흡처럼 우리의 입에 있다. 우리는 공기를 호흡하듯이 그분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취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복합적인 공기 곧 생명 주는 영이다. 우리는 그분을 들이 쉴 수 있다.

로마서 10장은 그분을 호흡하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12절은 그분이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한다. 주님의 풍성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밤낮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

성막 안에서의 제사장 봉사에 따르면 제사장들은 등을 켜고 향을 살라야 했다(출30:7). 등은 말씀을 상징하고(시119:105). 향은 기도를 상징한다(시141:2). 등을 켜러 올 때마다 우리는 향을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접촉할 때마다 기도해야 함을 보여준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다루는 것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말씀을 다루려면 참되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등을 켜려면 향을 태워야 한다.

기도하는 가장 간단한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얻는데, 그분의 인격은 바로 그리스도의 존재(being)와 역사의 모든 성분들이 함께한 복합적인 영이다. 말씀을 읽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기도 가운데서 함께 섞는다면 복합적인 영의 기름부음을 받아 자연스럽게 거룩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기름부음이다. 교회 생활의 각 부분에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복합적인 영이신 그분으로 더 기름부음 받을 것이다. 이 기름부음 아래, 회막과 성막과 제사장 체계의 실제가 있다.

우리는 교리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서, 꾸준히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기름부음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롭게 되고 혁신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은 항상 신선하지만 가르침음 언제나 낡은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영의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을 필요가 있다. (Back)

(위트니스리, 교회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 영문판 p.93-94)

  1. 진정한 부흥과 단체적인 본의 필요

내 부담은 나의 교통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어 동일한 일을 위해 나와 함께 부담을 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방 교회들이 있지만 본은 없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관해서 본이 없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 관해서도 본이 없다.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지만 이에 대한 본이 없다.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서 그렇게 부요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님을 부르는 참되고 살아 있는 실행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본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 부름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부요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부름으로써만이 아니라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부름으로써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부르며 그 영이신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단지 개인적으로 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단체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회에는 주님을 부르기 위해 종종 함께 모이는 열 명, 혹은 열 다섯 명의 성도들의 무리가 있어야 한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여러분이 입을 열어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을 부를 때, 즉시로 여러분은 그분의 비추심 아래 있게 된다. 여러분은 빛 비춤받게 되고 드러나게 된다. 그 때에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결점과 단점과 실수들을 보게 된다. 아내로서 여러분은 남편을 대함에 있어서 자신이 행한 실수들을 보게 된다. 남편으로서 여러분은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 전혀 영 안에 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죄들과 실패들과 실수들과 결점들과 허물들과 범과들과 악행들을 철저히 자백하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빛 가운데서 빛 비춤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철저한 자백을 할 수 없다. 누가 주의 빛 가운데서 빛 비춤받을 수 있는가? 오직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부르는 사람들 뿐이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체험이다. 그럴 때에 주님은 여러분의 영 안으로 심지어 여러분의 생각 안으로 그분의 모든 특별한 풍성을 옮겨 부으신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은 주님의 풍성에 참여하여 그것을 누리게 된다.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은 오늘날 그 영이 말씀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그 영인 말씀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여러분의 성경이 그 영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러분의 성경이 그 영이고 그 영이 여러분의 성경이다. 어떻게 이것을 얻을 수 있는가? 매일 순간순간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만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시간마다 그분을 부르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임재 안에 사는 그러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열왕기상?하에 있는 예표의 성취의 실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장로들과 교통하기 원하는 강한 부담이다. 모든 지방 교회에는 이것이 필요하다. 많은 형식적인 절차들을 고안하지 말라.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부르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여러분 자신이 그 영인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실행해야 한다. 여러분이 쉬지 않고 기도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결코 그 영을 소멸치 않고 도리어 항상 그 영을 불일듯하게 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어떤 신언도 멸시하지 않기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 장로들이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솔선해야 한다. 먼저 여러분이 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여러분이 주님과 그렇게 친밀하게 행하는 실행이 여러분의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특별히 장로들인 여러분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하나님의 계시의 최고봉에 따른 생활을 삶, 영문판 p.31-33)

  1. 부름으로 영감을 받음

예수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기 위한 것이다(롬10:13, 고전 1:2).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비결을 발견하기 전에 적어도 삼십 오 년 이상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나는 기도하는 것이 한 가지요 부르는 것은 또 다른 것임을 발견했다. 십 오 년 전에 나는 상당히 많이 기도했으며 대부분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비결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부르는 것이 기도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해보았지만 영감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오 분만 불러도 우리는 영감을 받게 된다. 한번 해 보라!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우리가 옛 방법으로 기도 했을 때에는 종종 졸기도 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결코 우리로 졸게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것은 우리를 휘저어 놓는다.

사도행전 9장 14절에서 바울은 그가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모든 성도들을 해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을 결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려고 했다. 이 구절은 그가 예수께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결박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 한 구절로서 우리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불렀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것이 알아 볼 수 있는 표시였다.


성경은 기도하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롬10:13). 가령 내가 죄인이고, 주 예수를 믿었다 하자. 당신은 나를 기도하도록 도울 것이며, 나는 “주 예수여, 나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나의 구주십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기도는 그 영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를 “주 예수여”라고 점점더 크게 부르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당신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생각하는 바를 애써 바꾸려고 하지 말라. 그 대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를 열고,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영을 열고 깊은 속에서부터 그들의 입을 사용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하라. 만일 당신이 새로운 믿는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돕는다면 그 영께서 안으로 들어갈 문이 점점 더 넓게 열릴 것이다. 헛된 말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 열 번 정도 예수의 이름을 부른 후에 당신은 하늘에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죄들은 사하여질 것이고 당신의 무거운 짐은 사라질 것이며,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은 모든 것들을 갖게 될 것이다.


심지어 여러 해 동안 믿은이들에게 있어서도 주 예수를 접촉하고, 주 예수를 누리고, 주 예수의 어떤 것에 참여하는 최선의 길은 많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께 가서 부르는 것이다. “예수여! 예수여! 주 예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면 당신은 무언가를 맛보게 될 것이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많은 때에 우리의 말들은 너무 공허하다. 다만 “예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 만일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당신은 그분을 맛볼 것이며 그분을 누릴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놀라운 이름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을 불러야 한다. (Back)

    1.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받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인격, 실제, 예수의 실현인 그 영을 받는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다(헬라어 참조).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마다, 우리는 그 영안에 있고 그 영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전통의 영향아래 있어와서 그 영을 받기 위해 반드시 금식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을 받는 것은 간단하다.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문판 p.71-73, 79)

  1. 구원의 우물들

이사야 12장에서 주로 강조된 말은 “구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며, 주 여호와는 우리의 힘과 노래이시다. 힘과 노래는 모두 체험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체험될 때, 이 구원은 우리의 힘이 되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노래와 찬송이 된다. 힘과 노래는 구원에 대한 체험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은 주 여호와(Jah Jehovah)이시다. 신약에서 우리 하나님은 예수와 그리스도로 불리우신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부를 때, 우리는 매우 친밀하게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이것을 “나의 사랑스런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더욱 달콤하게 표현할 수 있다. 신약에서 주 여호와(Jah Jehovah)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Back)

    1.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호흡하고 마심

주님을 마시는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또한 그분을 호흡해 들여야 한다. 영적 실제에 따르면, 호흡하는 것은 마시는 것이다. 바버(M.E. Barber)자매님은 찬송에서, “주의 이름 호흡함이 참 생명을 마심일세”라고 말했다.(한국복음서원 찬송가 65장 2절). 예수의 이름을 호흡하는 것이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다. “오, 주 예수여”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호흡하며, 호흡함으로 우리는 마신다.

이사야 12장은 물을 긷는 것을 말한다(3절).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마시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장 어디에 호흡하는 것이 계시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 이름을 부르라!”(영문참조)고 말한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함께 하나로 놓여져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찬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찬송하는 것이며 호흡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적 호흡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있다. 만일 우리가 육신적으로 호흡하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 내에 죽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사도행전 2장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회복역의 이 구절에 대한 각주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창세기 4장 26절에 있는 인류의 세 번째 세대인 에노스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하고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완전히 약하며, 유약하고, 깨어지기 쉬우며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에서 그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호흡해 들이며 우리의 호흡은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물을 함유하고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면 공기로 변한다. 공기는 비가 되어 땅에 물을 주고, 땅에 있는 물은 증발하여 공기로 돌아간다. 흡입할 수 있도록 물을 수증기로 바꾸는 증발기라는 장치가 있다. 증발기 안에 있는 물은 공기 속으로 들어간다. 물이 공기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공기를 마실 때 물을 얻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호흡이 또한 마시는 것임을 예시해준다. 영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고, 호흡하는 것은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을 안으로 들이마시게 되고, 적셔지며, 신선해 진다. (Back)

(위트니스리, 이사야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278, 280-281)

  1.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적을 정복함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의 아주 작은 것에서도 하나님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매일 주님을 누린다면 우리의 옷 입는 방식에서 주님의 다루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만져진 바 될 것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때 주님은, “네가 착용하고 있는 이 넥타이는 어떤 종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머리를 빗고 있을 때 주님은, “너는 머리를 어떻게 빗을 것이니”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통 안에 머물 때 그분은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서 우리를 만질 것이다. 결국 우리의 옷입는 방식이 하나님의 표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옷에서부터 대적 곧 악한 자가 굴복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옷 입는 방식을 보면 사탄의 어두움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표현이 아니면 사탄의 표현이다. 대적이 정복되거나 그가 주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Back)

    1.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가

더욱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호흡이고, 하나님의 호흡은 그 영이다. 주 예수님은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6:63). 거룩한 말씀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딤후3:16). 이 거룩한 책의 각 말씀이 하나님의 호흡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에 그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우리 손에는 그 영으로서 성경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누리는 길은 그분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부르는 생활을 할 때 모든 장벽은 깨뜨려지고, 그리스도가 당신 안으로 들어오고 당신 밖으로 나갈 온전한 통로가 될 것이다. 당신이 창문을 열면 밖의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고 안의 공기가 밖으로 나간다. 당신이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당신 존재의 창문이 열리고 공기가 들어오고 나간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누리는 길이다. 말씀을 접촉하는 길은 기도로 읽는 길이다. 당신은 주님을 부르면서 기도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읽는 것과 기도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연합시켜야 한다. (Back)

    1.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쏟아 부어진 영을 누림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2장 17-21절을 살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요엘서를 인용한 것이다. 이 부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는 말로 시작하여(17절), 다음의 말로써 끝맺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절). 이 인용 말씀의 시작과 끝을 함께 두어 보면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쏟아 부으시므로 이 영을 받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미 쏟아 부으셨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금식하고 잠을 자지 않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성령의 부어주심을 간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쏟아 부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 영을 받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한 잔의 물을 누군가에게 제시한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것을 취하여 마시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그 영을 위해 간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쏟아 부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부어 주신다고 하지 않고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육체이며, 그 영은 우리 위에 부어졌다. 음료수가 우리에게 제시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 간청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받아들이고 마셔야 한다. 17절은 음료수를 제시하고, 21절은 마시는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단지 “오, 주 예수여”라 부를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주님을 부르는 것이 당신을 적시고, 심지어 그 영으로 당신에게 넘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을 취하는 길이다. (Back)

    1. 주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마심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우리 모두로 한 영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위치에 놓여졌으므로 지금 마실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성취하셨지만 결코 우리를 대신해서 마실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든지 여전히 당신은 마셔야 한다. 마시는 길은 3절에 있다. 이 구절은 당신이 “주 예수”라 부를 때 성령 안에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이 “주 예수”라 말할 때 마시는 것이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영을 마시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자신이 아주 죄스럽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신의 죄악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팔렸지만 우리의 죄들은 예수님이 지고 가셨다(요1:29). 이후 우리는 하나님께 되돌려졌으며 마실 수 있는 위치에 놓여졌다. 당신은 자신이 아주 약하다고 말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당신이 마셔야 하는 이유이다. 그 영을 마시지 못할 이유나 구실이 없다. 당신이 범한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십자가에서 성취된 구속만큼 크지 않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성취한 구속은 당신의 모든 실패를 덮을 정도로 크다. 당신은 마실 수 있는 위치에 놓여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실패, 당신의 죄들, 당신의 약함을 잊어 버리라.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 효능 있는 피가 모든 것을 처리했다. 이것이 우리로 마시게 하셨다고 말한 이유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자든 우리로 다 한 영을 마시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마실 수 있는 위치에 놓여졌으므로 다만 끊임없이 “주 예수”를 부름으로써 마셔야 한다. 15분간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면 무언가가 발생할 것이다.


나이든 성도들은, “이 모든 것은 젊은이들에게 적당한 것이지 나에게는 맞지 않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숨쉬는 것은 모든 세대에다 똑같다. 젊은이들에게 호흡이 필요하고, 늙은이들에게도 호흡이 필요하다. 당신이 나이가 들었다면 호흡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당신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숨쉬는 것으로부터 졸업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호흡에는 졸업이 없다. 주님을 부르는 것이 당신을 더 젊게 만든다. 주님을 부를 때 그분을 당신의 새 힘으로 누리며,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사40:31)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 되었으므로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도나 주님을 부르라고 요청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십자가에 올려놓게 된다. 새로운 아기가 태어날 때, 때로 의사는 그의 엉덩이를 쳐서 숨을 쉬게 해야 한다. 가끔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엉덩이를 맞아야”한다. 주님을 부르기를 원치 않았던 한 형제가 있다. 그러나 어느날 그가 교통 사고를 당하였다. 그것은 정말로 그가 엉덩이를 맞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오 주 예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숨을 쉬지 않는다면 주님은 당신을 “찰싹”때릴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즉시 “오, 주 예수!”라 부른다. 어려움이 있거나 병들 때는 곧 주님을 부르나 이내 잊어 버린다. 우리는 온 종일 주님을 부르는 습관을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지 말라. 우리는 부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Back)

    1. 부르는 백성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의 구원을 받았을 때, 주님은 그에게 성으로 들어가면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행9:6). 그리고 주님은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가셔서 사울에게 가라고 하셨다(10-12절). 아나니아는 주님께, 이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음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14절). 아나니아는 사울이 주님의 모든 제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초기에 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표징이었음을 보여 준다.(고전1:2). 이 부름을 틀림없이 사람들의 귀에 들렸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이 표징이 되었다.

우리는 부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침묵하는 믿는이들이 아니다. 날마다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이 우리의 표시, 표징이다. 사울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하려 했을 당신 믿는이들은 자신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이는 부르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부르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이 부름이 하나의 표징이 되었다.


내가 한 지방에서 집회를 위해 머무를 때, 두 아들을 가진 형제의 가정에 있었다. 큰 아들이 세 살쯤 되었는데, 우리가 집회에 가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는 ‘오, 주여’에 갑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그의 동생도 성도들이 “오, 주여” 백성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모일 때마다 그들은 “오, 주여”로 모인다. 사도행전 2장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우리 위에 부으셨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그 영을 취하는 길이다. (Back)

    1.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말씀을 접촉함

로마서 10장은 이것이 또 말씀을 접촉하는 길이라고 한다. 그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 하늘로 갈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기 위해 음부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말씀 곧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워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어, 마치 공기나 호흡처럼 우리 존재 안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말씀은 공기처럼 우리 입에 있다. 이제 우리는 다만 입을 열어 “주 예수!”라 자백하기만 하면 된다(9절). 그 영을 취하는 길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고, 말씀을 취하는 길도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Back)

    1.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심

또 로마서 10장은 주님이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말한다(12절). 이 구절은 주님이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를 필요가 있다.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의 주방에서, 당신의 사무실에서 불러야 한다. 길거리에서도 불러야 한다. 당신이 약할 때 불러야 한다. 당신은 “오, 주 예수여, 나는 약합니다.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부른다면 이전보다 강해질 것이다. 성질이 나려고 할 때 자제하려 애쓰지 말고 다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 “오 주 예수여!”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일종의 능력, 일종의 권세가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어둠을 몰아 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상황에서도, 그것이 어둠이든 약함이든, 다만 주님의 이름을 불르라. “오, 주 예수”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것이다. 주님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13절). 지금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회복할 때이다. (Back)

    1.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부르심을 입은 성도

고린도 전서 1장 2절은 우리가 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도록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르는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부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르는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믿거나 그분께 기도만 하지 말고 반드시 그분을 불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르셨으며(9절), 그리스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능력과 지혜가 되신다(24절).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능력과 지혜로서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바로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누린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입었다(9절). 그리스도를 누리고 싶다면 그분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온 종일 주님을 부르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당신은 어둠 속에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 어둠을 쫓아내는 최선의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당신은, “오, 주 예수! 주 예수!”라고 불러야 한다. 때로 모든 방면에서 우울해질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해방될 것이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취하여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 교통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한다면, 이것이 주님을 호흡하는 길임을 볼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을 호흡하는 것이다. 이 호흡하는 것에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마심과 먹음이 호흡에 포함되어 있다. (Back)

(위트니스리,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자람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됨, 영문판 p.31-39)

  1. 영 안에서 행하는 실행적인 길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가 그 영 안에서 행해야 함을 말한다(16, 25절). 그러나 어떻게 이것을 행하는가? 오늘 우리는 그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 영 안에서 행하기란 좀 어렵다. 우리의 자녀들이나 배우자들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오, 주 예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종류의 미신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쉬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 범사에 당신은 꼭 호흡해야 한다. 호흡하지 않는다면 삶은 끝난다.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하지만(살전5:17)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쉬지 않고 호흡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범사에 우리는 “오, 주여”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오,주여”라고 말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를 항상 영 안에 지켜줄 것이다. 이것이 영 안에서 행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주님을 지속적으로 호흡하는 것을 배우라. 만약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당신이 영적인 것에 관해 읽거나 연구하는 것은 다만 생각 속의 지식이 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지식이다. 당신이 “오, 주여”라고 말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것이 당신을 영 안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의 죽음이 당신의 영을 통해 당신의 존재 안에서 효력을 가질 것이다. 당신이 읽고 알고 있는 모든 진리는 반드시 살아 있는 영에 의해 실제화 되어야 한다. 당신이 “오, 주여”라고 말할 때 자신을 살아 있는 영 안에 지키게 된다. 그러면 성경의 모든 지식이 당신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실제가 될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알고 있든지, 그것이 다만 문자로만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의 지식이 당신 자신을 죽인다. 의문은 죽인다(고후3:6). 당신은 문자로부터 영으로 돌이킬 필요가 있다. “오, 주여”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으로부터 영으로 돌이키라.


주님을 부를 때 당신은 그것을 가볍거나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분을 진정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을 부를 때 그분과 연결되어, 그분을 하늘에 속한 전기로 누리게 될 것이다. 즉시 당신에게 만유를 포함한 영의 실제가 내적으로 전달될 것이다. 당신은 생각을 사용하지 말고 영을 사용함으로써 살아 계신 주님을 접촉해야 한다. 당신이 영을 사용하는 최고의 길, 가장 간단한 길은 “오 주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열고 영을 사용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영 안으로 들어가고 영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분을 부를 때마다 신선케 되고 능력 있게 된다.

로마서 8장 6절은 생각을 육신에 두면 사망이나 영에 두면 생명과 평강이라고 말한다. 혼의 주된 부분이 생각이다. 생각은 영과 육 사이에 있다. 생각을 둘 곳이 두 군데 있다. 생각을 사용할 때 영을 떠나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을 육신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이다. “오, 주여”라고 말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오, 주여”라고 할 때마다 즉시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게 된다.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름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둔다면, 생명과 평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육으로 돌릴 때 즉시 사망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의 긍휼로 우리는 그 비결을 보았다. 각 처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고전1:2)은 너무나 놀랍고 실제적이며 효과적이다. 우리가 “오, 주여”라고 말할 때 생각을 영에 두게 되고, 내적으로 생명과 평강의 느낌을 갖는다. 신약은 우리가 영안에서 또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롬8:4b). 이것을 행하는 길은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와 주님은 실제적으로 하나이다. 끊임없이 “오, 주여”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을 영 안에 지키게 되고 영 안에서 또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Back)

(위트니스리,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자람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됨, 영문판 p.31-39)

  1. 영원히 전능한 분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었던 것을 말해주는 33절은, 또한 그가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영원한 하나님-히브리원문)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다른 특별한 칭호-여호와 엘오람-를 본다. 17장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충족케 하는 능하신 자인 엘샤다이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엘오람(El Olam)을 본다. 히브리어“오람”은 영원, 혹은 영원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 히브리어의 근원은 “숨기다”, “감추다”, 혹은 “시야를 가리다”라는 뜻이다. 베일로 가리워진 모든 것은 자연히 비밀이된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영원한 분, 비밀하고 신비로운 분인 하나님을 체험했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분은 참 실제이시다. 그분의 존재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시작이나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시90:2, 사40:28).

여기서 우리는 신약에서 발전된 또 다른 씨를 발견한다. 21장에서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4절에 계시된 분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이 생명이 바로 엘오람이다. 영원안에 계신 신비스러운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너무나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고 베 일에 싸여 있고 신비스럽고 비밀하지만, 참 실제이고 영원히 존재하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고 시작이나 끝이 없으신 신성한 위격이다. 엘오람의 칭호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시고 비밀하고 신비스러운 분, 영원한 생명이신 분을 그가 체험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아브라함은 창세기 21장에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체험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의 에셀나무인 그가 그의 신비스러운 생명이신, 감추어져 있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을 체험한 것을 온 우주에 간증할 수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 엘오람을 불렀다. 12장에서 그는 신비스럽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인 하나님이신 그분을 아직 체험하지 않았고 단지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다. 그러나 여기 21장에서 그는 많은 체험을 한 후에, 브엘세바의 에셀나무 아래에서 이삭과 함께 그의 내적 생명인, 영원히 살아 계시고 신비스러운 분을 체험했고 “오 여호와 엘오람이여!”하고 불렀다. 어느 누구도 이 신비스러운 분을 볼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의 체험안에서 그분은 그에게 실제가 되셨다. 오늘 우리 안에 계신 분은 바로 엘오람, 감추어져 있고 비밀하고 숨겨져 있고 신비스럽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다만, “오 주 예수여!”하고 부름으로써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같은 누림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한 가지 일-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 엘오람을 불렀다는 것-만을 말한다. 이 간단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일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에셀나무를 심은 것이 아주 의미 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에셀나무를 심은 것이 여호와의 이름 엘오람을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창세기 1장과 2장은 단순한 하나님의 창조의 기록이 아니라 창조의 중심인 생명나무가 있는 생명의 기록이다. 이와 같이 이 부분의 말씀도 단순히 아브라함의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살았던 근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생명의 기록이다. 그는 여호와 엘오람을 부름으로써 살았고, 그의 생명인 영원하고 숨겨진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살았다. 신약의 표현을 빌면, 그는 우물에 의해서 살며 우물의 풍성을 표현하는 에셀나무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모든 풍성을 가지고 흐르는 영원한 생명을 체험한 것이다. 생명나무가 1장과 2장의 기록의 중심이듯이, 에셀나무가 여기의 기록의 중심이다. 우리는 에셀나무가 우리에 의해 체험된 생명나무임을 말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생명나무의 표현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합당한 교회 생활은 다 우리가 삶으로써 표현한 생명나무, 에셀나무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 우리의 여호와 엘오람이신 주님을 부르는 것과 함께한다. (Back)

(위트니스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48-750)

  1. 하나님에 대한 신선한 의미

창세기 2장에 있는 생명나무가 중요하다면 창세기 21장에 있는 에셀나무도 또한 중요시되어야 한다. 설령 브엘세바에 있는 에셀나무의 중요성을 본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이다. 생명나무에 어느 정도 주목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에셀나무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과거에 우리는 생명나무는 보았지만 에셀나무는 보지 않았다. 최근에 주님이 우리에게 에셀나무의 이상을 보여 주셨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어느 날 나는 21장에 있는 에셀나무에 대한 의미를 알아야 겠다는 내적인 자극을 가졌다. 이 장에는 쓸데없는 말은 없다. 아브라함이 행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무시하면서 특별히 그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은 것에 대해서는 말한다. 우리의 의견에 의하면, 에셀나무를 심은 것은 별 의미가 없고, 단지 옛날의 조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에셀나무를 심은 것을 주님의 새로운 칭호인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연결시킨다. 21장 33절에서 접속사 “그리고”가 이 두 항목을 연결시킨 것에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었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인 엘오람을 불렀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나무를 심는 것은 주님의 이름, 특히 최근에 계시된 새로운 칭호를 부르는 것과 관계없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합당하게 주님을 불러야 하는 근거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에셀나무가 필요하다. 에셀나무의 경험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새롭게 계시된 하나님의 칭호, 엘오람이 아닌 그분의 옛 칭호 여호와만을 부를 수 있다.

21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새로운 칭호-신비롭고, 숨겨져 있고, 비밀스럽고, 여전히 참되시고, 살아 계시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엘오람을 불렀다. 하나님의 이 칭호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용어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영원한 생명을 체험했지만,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비타민을 먹었지만 그것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적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약이 쓰여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옛날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이런 신성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호와의 이름 엘오람을 불렀을 때, 그는 영원히 존재하고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이신 하나님, 참되시고 살아 계시나 여전히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제든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풍성한 흐름을 가졌을 때는 새롭게 실제화된 주님의 이름을 부른 때였다. 우리는 똑같은 주님을 불렀지만, 부르는 가운데 신선한 느낌을 가졌다. (Back)

(위트니스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54-755)

  1.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체험함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셔 우리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영이 되어 지금 우리 안에 들어오셔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신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wonder)중에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실제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으로서 순간순간 만지고 체험하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간단한 방법을 주셨다. 우리가 단지 할 것은 그분을 부르고 그러면 생명 주는 공급이신 그분을 만질 것이다. 로마서 10장 12절 하반부와 13절에서 성경은 말하길,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이 오직 초기의 구원의 체험에만 적용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각각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죄, 자아, 사람의 약함, 다른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매일매일의 구원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면에서, 주님의 풍성한 공급으로 보양되고 강건하여져서 만유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이 필요하다. 이것을 깨닫는 방법은 단순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분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하시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 후서 2장 22절에서 디모데에게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에 관한 체험은 믿는이들에게 실제가 되고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간증이 되는 것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이 무엇인가? 이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 사도행전 9장 14절에서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을 핍박하던 것을 말한다. 그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받았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처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던 자들이었음을 보여줌으로 이것을 재 확증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시간마다, 순간순간, 간단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주를 부르는 실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주님이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기쁨을 발견하고 그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깊은 속에서 그분을 부름으로 그분을 만지고 교통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영으로서 우리의 영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이다(딤후4:22). 깊은 속에서 그분을 부름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흐름과 교통을 느낄 것이다. (Back)

(위트니스리, 주님 만지는 간단한 길, 영문판 p.5-7)

  1.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삶.

어떻게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가? 당신은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부를 필요가 있다. 그분을 부르고 다만 그분에게 이것을 많이 말하라. 그러면 즉시 그분은 당신 속에서 “뛰어오르시며”, 이 “뛰어오르시는”예수님이 당신의 믿음이 되신다. 당신 안으로 분배된 믿음이신 “뛰어오르시는”예수님은 당신을 그분께 연결시킨다. 그럴 때 당신은 하루 종일 그분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그분을 이런 식으로 부를 때, 그분은 당신 안으로 분배된 믿음이 되시어 당신은 저절로 이 믿음에 의해 그분을 살게 된다.

당신은 아침에 일어날 때 그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아홉 시에 직장에서 당신은 천장을 바라보며, “주 예수여 당신은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 조금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은 또 한 번의 채워짐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즉시 당신 안으로 분배되어 당신의 믿음이 되시는 것이다. 사실상, 믿음이신 그분 자신이 당신의 믿음이 되시며, 이것은 당신을 무한하고 한량없으신 그리스도께 연결하는 연결 기관이다.

그런 다음, 점심 식사 때에 당신은, “주 예수여, 저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간단한 말로도 당신은 충분히 또 한 번의 채워짐을 얻을 수 있다. 오후에 당신은 아마 화장실에 갈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단한 말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 “주 예수여, 저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여 당신은 저로 당신을 향해 제 정신을 잃게 하셨습니다.” 이 만큼만이라도 주님께 말하면 또 다른 채워짐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하면, 그들은 큰 소리로 반복해서 주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르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충만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 부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간단히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 예수여, 당신이 아시듯이 지금 저는 무지 바쁩니다. 저는 급히 사무실에 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단지 이렇게 조금만 불러도 당신은 주입된다.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주입되는 것은 그분을 당신의 믿음으로 당신 안에 소유하게 하시며 이 믿음은 당신을 그분과 연결시키는 연결기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방식이다. (Back)

(위트니스리, 로마서 결정연구, 영문판 p.92-93)

  1. 믿고 부른 그리스도

9절부터 13절을 읽어보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주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성경에 이르되 주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말한다. “에(unto)”라는 말은 헬라어 전치사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은 결과는 의요, 입으로 시인한 결과는 구원이다. 의롭게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원한다면 주 예수를 믿어야 하고, 구원받기 원한다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그를 시인해야 한다.

로마서 9장 21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존귀와 영광에 이르는 긍휼의 그릇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릇 그 자체로는 빈 그릇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릇에는 내용이 필요하다. 로마서 9장은 우리를 그릇이라고 말하지만 그 그릇을 채우는 길은 알려 주지 않는다. 존귀와 영광에 이르는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그릇이 비어 있다면 얼마나 가련하겠는가! 우리는 채워져야 한다. 채워지는 길은 로마서 10장에서 발견된다. 그릇에는 다 입, 즉 열린 구멍이 있다. 입이 없는 것은 그릇이 아니다. 망치나 칼이나 도끼 같은 것에는 입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릇이며 그릇인 우리에게는 입이 있다. 당신에게 왜 입이 있는지 아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지기 위해 입이 지어졌다. 우리 입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지어졌다. 주님은 너무도 풍성하시다!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시편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구절이 있다(81:10). 입이 있는 빈 그릇인 우리는 주님의 풍성으로 채워지기 위해 입을 넓게 열어야 한다.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풍성을 영접하는 길이다. 주님은 그룰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그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풍성에 참여하고 그 풍성을 누린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하고 그 풍성을 누리기 원하는가? 원한다면 잠잠하지 말고 입을 열어서 그분을 부르라. 최근 몇 년 동안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계시하셨다. 10년전만 해도 우리는 이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셨음을 감사한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을 좋아하고 특히12절을 소중히 여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절은 복음을 전할 때 무수히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절을 복음 전하는 데 뿐 아니라 12절과 함께 모든 빈 그릇들을 신성의 풍성으로 채우는 데 사용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입을 넓게 열고 주님을 부른다면 신성의 풍성이 당신의 분깃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빈 그릇을 채우는 길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분으로 채워지기 위해 그분을 부르는 입이 있으며, 그분을 믿고 그분을 붙잡는 마음이 있다.

성경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먹고 누리는 길임을 밝히 계시한다. 신명기 4장 7절은 주님이 “그를 부를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신다”고 말한다(미국 표준역 1901년판 참조). 시편 145편 18절은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 곧 신실하게 자기를 부르는 모든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 말한다 (미국 표준역 참조). 시편 18편 6절과 118편 5절에서 다윗은 환난과 고통 중에 주님을 불렀다. 시편 50편 15절에서 주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86편 7절에서 다윗은 그렇게 했다. 시편 81편 7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렇게 했음을 말하고(출2:23), 주님은 그들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다(10절). 시편 86편 5절은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니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116편 3절과 4절은,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미국 표준역 참조). 같은 시편 13절은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라고 말한다. 구원의 잔을 들기 위해, 즉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이사야 12장 2절부터 6절까지에서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노래이며, 우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주님의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방법, 즉 주님을 우리의 구원으로 누리는 길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께 찬송하며, 부르짖고 외치는 것이다. 이사야 55장 1절부터 6절까지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는 놀라운 부탁이 있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들을 불러서 물로 나아오라고 하시고, 포도주나 젖이나 좋은 음식 등 주님의 양식의 풍성을 누리라고 하시며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라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길은 주님을 추구하고 가까이 있는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이사야 64장 7절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분발하여 그분을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애가 3장 55절부터 57절까지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며, 우리가 그분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호흡이요 부르짖음임을 분명히 계시한다(미국 표준역 참조). 이로써 우리가 깨닫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일 뿐 아니라, 영적인 호흡을 체험하는 것이며(출2:23), 그 호흡을 통해 우리 속에 모든 고통과 아픔과 억눌렸던 것들을 내쉰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깊은 구덩이, 곧 지하 감옥에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영적인 지하 감옥이나 구덩이, 혹은 어떤 억눌림 안에 있을 때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속에 있는 무거운 것을 내쉼으로써 깊은 구덩이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속으로부터 부정적인 것들을 내쉴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누림과 위로와 안식이 되는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주님 자신을 들이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주님의 풍성을 함께 먹는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은, “주님은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라고 말한다. 오늘 주님은 부활 안에서 우리가 영접하도록 준비되어 있고 우리가 누리기에 편리하고 풍성한 분이다. 우리는 아무 때나 다만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모든 풍성을 함께 먹고 누릴 수 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단순히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는 다르다. “부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사람을 자극시키고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소리 없이 할 수 있지만,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외치거나 들리도록 말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창세기 4장 26절에서 “부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첫째로 “부르짖음”을 의미한다. 이사야 12장 4절과 6절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소리를 높이고 부르짖는 것”임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 애가 3장 55절과 56절도 같은 것을 계시한다. 즉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주님을 불렀으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했다(삼하22:7, 미국 표준역 참조).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인류의 셋째 세대부터 시작되었다. 에노스시대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그 다음 아브라함(창12:8), 이삭(창26:25), 욥(12:4), 모세(신4:7 미국 표준역 참조), 야베스(대상4:10), 삼손(삿16:28), 다윗(삼하22:4), 요나(욘1:6), 엘리야(왕상18:24), 엘리사(왕하5:11), 예레미야(애3:55)가 모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실행했다. 그뿐 아니라 요엘 2장 32절, 스바냐 3장 9절, 스가랴 13장 9절에도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오순절날에 신약의 믿는 자들도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부어진 그 영을 영접함으로써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졌다(행2:17-21).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고 믿는 자들은 입을 열어서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영접했다. 그 영은 하나님에 의해 부어졌지만 우리는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 그분을 영접하는 길은 우리의 입을 열어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믿는 자들은 스데반처럼(행7:59) 이것을 실행했다. 이것을 실행함으로써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임을 알게 했다(행9:14).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교회를 핍박하던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믿는 자들로 인정하고 결박하려고 했다. 그는 회개한 후에, 주의 이름 부르는 자들을 핍박했던 그의 죄를 스스로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씻음 받기를 권고 받았다(행22:16).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초기의 성도들간에 있었던 보편적인 실행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말했다(고전1:2). 이것은 초기의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실행했음을 가리킨다. 디모데 후서에서 바울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권면했다(딤후2:22).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매일 주님을 불렀으며(시88:9), 평생에 그분을 불렀다(시116:2).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더 실행하여 “깨끗한 마음으로”(딤후2:22), “깨끗한 입술로”(습3:9)주님을 불러야 한다. 이것을 실행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풍성을 함께 가질 것이며 그 풍성을 누릴 것이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풍성을 가진 주님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고린도 전서가 주님을 누림에 관한 책임을 계시한다. 고린도 전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말한다(고전1:24).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며(1:30), 우리가 누리기 위한 여러 가지 다른 항목들이시다. 결국 부활 안에서 그 분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12:13). 생명 주는 영인 그분을 마시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2장 3절은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 즉시 영 안에 있게 됨을 가리킨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는 주님의 이름이고, 그 영은 그분의 인격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주님의 인격을 얻는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영을 얻는다. 그 영을 받기 위해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인 호흡일 뿐 아니라 영적인 마심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생명의 호흡으로 호흡하며 생수로 마신다. 찬송가 25장 2절은 이에 대한 찬송이다.

축복의 주 능력의 구주
내 모든 필요 채워

주의 이름 호흡함이
참 생명을 마심일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함께 얻고 누리는 길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주여, 이 일에 대해 우리를 축복하소서. 이 시대에 이것을 완전히 회복하소서 (Back)

(위트니스리, 로마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270-276)

  1. 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의 회복

언젠가 주일 아침 집회 전에, 모두가 관습처럼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일어서서 말했다. “집회에 오신 분은 누구다 네 마디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말하는 동안 나는 그 네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말하는 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다음 네 단어를 말했다:“오 주 아멘 할렐루야”. 모두 그 자리에서 이것을 실행했고 어떤 사람들은 즉시 그것에 관한 노래를 만들었다. 그때 이 실행은 성공하였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인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우리는 다른 항목을 더했다. 바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로스 앤잴레스에 엘든 홀이라는 집회소에서 모였었다. 많은 성도들이 집회소 근처로 이사를 왔다. 이른 저녁,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성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모든 이들이 불렀다. 집에서 부르고, 거리에서 부르고, 집회소에서 불렀다. 그 열렬한 상황은 상당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Back)

(위트니스리, 하나님이 정하신 길의 최근까지의 발표와 다시오시는 그리스도의 표적,영문판 p.9)

참고서적 - 주님 이름 부르기

Witness Lee.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Witness Lee. The Crystallization of the Gospel of God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4.

Witness Lee. Elder’s Training Book 10 The Eldership and the God-Ordained Way (2).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2.

Witness Lee. The Experience of Christ as Life for the Building Up of the Church.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4.

Witness Lee. Five Emphases in the Lord’s Recover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Witness Lee. The Fulfillment of God’s Purpose by the Growth of Christ in U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4.

Witness Lee. The History of God in His Union with Ma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2.

Witness Lee. The Intrinsic View of the Body of Christ.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Witness Lee. The Kings Antecedents and Statu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7.

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7.

Witness Lee. Life-Study of Roman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4.

Witness Lee. Living a Life According to the High Peak of God’s Revelatio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4.

Witness Lee. The Living and Practical Way to Enjoy Christ.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4.

Witness Lee. A Simple Way to Touch the Lord.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Witness Lee. The Up-to-Date Presentation of the God-Ordained Way and the Signs Concerning the Coming Christ.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주님 이름 부르기

이 사이트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간단한 실행인 “주님 이름 부르는 것”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정의역사목적실행 등이 함께 제시될 것입니다.

수 천년동안 인간은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이 전지 전능한 분에게 이끌리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또는 관계를 갖기 위해, 시험 당할 때든지, 기쁠때 또는 슬플 때에도, 그들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분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단순히 시험이나 재난에서 도움을 받거나 구출되기 위해 그분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한 부르짖음이 보편적이게 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인 영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초기 세대의 인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 주님을 부르는 것의 성경적 근거
  2. 주님을 부르는 것의 정의와 중요성
  3. 주님을 부르는 것의 역사
    1. 구약에서의 부름
    2. 신약에서의 주의 이름을 부름

  4.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목적
    1. 구원받기 위해
    2. 주님을 호흡하기 위해
    3. 주님을 마시기 위해
    4. 주님을 붙잡기 위해 스스로를 분발시킴
    5. 주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
    6. 주님의 긍휼에 참여하기 위해

  5.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가
    1. 열린 입으로
    2. 순수한 마음으로
    3. 단체적으로
    4. 날마다
    5. 살아있는 동안
    6. 순수한 입술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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