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영상/천로역정

[스크랩] 천로역정강해(3):전도자를 만나게 되는 노은혜씨

baromi 2011. 6. 29. 12:18

 

천로역정강해(3):

전도자를 만나게 되는 노은혜씨

딤후4:1~5

 

 

내가 또 다시 보니, 마치 어디로 떠나 버리고 싶은 듯이 그는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더니 갈 곳을 정하지 못했는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때 전도자(Evangelist)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오더니 “당신은 왜 울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선생님,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성경책을 읽어보니, 나는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기도 싫고 심판을 받기도 원치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히9:27; 욥16:21,22;겔22:14).

 

 

그러자 전도자가 말했다. “이 세상의 생활은 여러 가지 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기를 꺼려하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내 등에 지워진 이 무거운 짐이 나를 무덤보다도 더 낮은 곳으로 떨어뜨려 저 토페트(Topet:예루살렘 근처의 쓰레기장. 지옥의 상징)에 빠져 버리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지요(사30:33). 나는 감옥생활도 감당하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심판을 받고 무서운 형벌을 당하는 것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이런 일들을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겁니까?”라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대답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자 전도자는 양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3:7)고 적혀 있었다.

 

 

이 글을 읽은 후 그 사람은 전도자를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어디로 떠나야 할까요?” 하고 물었다. 전도자는 손을 들어 저쪽으로 뻗은 넓은 평야를 가리키면서 “저쪽에 좁은 문이 보입니까?” 하고 물었다. “안보이는데요”하고 그 사람이 대답하자 전도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밝은 광채는 보입니까?”시119:105;벧후1:16).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 광채를 바라보면서 똑바로 올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좁은 문이 나타날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누군가 나와서 당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본문:유성덕역, 리더스다이제스트:2009)

 

(강해설교) ******************************************************************************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실 때에 그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첫번째 역사를 “각성”이라고 합니다. 이 “각성”(혹 깨어남)으로 사람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근심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7장10절에 보면 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세상근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근심은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다른 근심이 있어요. 그것을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이 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근심이 없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깨어나게 할 때에 이런 근심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공부는 이런 근심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이런 근심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런 근심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하는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이렇게 각성되어 일어난 사람이 고민과 근심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을 모르는 천로역정의 첫장면을 살폈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으로 어깨위에는 무거운 짐을 졌습니다. 이 짐은 실제로 진 세상의 짐이 아니고, 마음의 짐입니다. 마음에 무거운 납덩이 같은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놓여있다는데, 나 자신을 보니, 내 힘으로는, 그 진노에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근심이 되어서 방황하다가 가족들에게도 말하였지만, 가족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미친 자 취급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안정이 안됩니다. 

 

 

 

그러다가 오늘 장면이 시작됩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전도자를 만납니다. 실은, 이 남자(“노은혜씨”)가 이런 근심을 한 자체가 이미 앞서서 이런 전도자를 만났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각성이 일어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믿음과 회개를 하게 되지요. 우리 모두가 그런 전도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순례자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자들입니다. 디모데후서5장7절에는 이런 명령이 디모데에게 주어집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런 전도자의 직무가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없다면, 아직 구원의 문제를 알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구도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명할 때에,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때가 이를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천로역정공부를 하면서, 인생의 방황 중에 있는 각성한 사람을 만났을때 전도자가 어떻게 전도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전도자들은, 여기서 사영리를 꺼내어놓고 예수님을 소개하고는 그 자리에 결단, 영접하게 합니다. 이런 전도방법이 현대교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것을 “결심주의(Decisionism)식 전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의 전도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서 소개하지 않고, 또한 어깨의 죄의 짐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가 있느냐 하는 해법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어떻게 합니까? 첫 번째는, 왜 울고 있느냐 질문하고, 둘째, 이 세상이 수많은 죄악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왜 순례의 길을 떠나지 않고 여기에서 머뭇거리고 있는가 질문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까, 세 번째, 어떻게 합니까? “양피지 두루마리”를 하나 주는데, 무슨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임박할 진노를 피하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3장7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말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지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에게 책망조로 주어졌지만, 지금 천로역정의 순례자에게는 따뜻한 권면으로 주어집니다. 그러고선 전도자는 어떻게 합니까?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까, 빛이 비취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라고 합니다.

 

 

이런 번연의 권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소개해서 강조하면 안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도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천로역정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고 마지막까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현대교회의 전도와는 다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순례자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좁은 문을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하는 삶의 전폭적인 변화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하면 그저 구원이 아닙니다. 그 구원 속에는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는 수고와 헌신, 그리고 충성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14:28,31). 번연의 전도자는 바로 이것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대로 주저 앉아 있으라고 합니까? 밝은 빛이 보입니까? 묻고는 보인다고 하니, “당신의 눈에 보이는 불빛을 따라 계속해서 곧 바로 올라가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밝은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상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고 다윗이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 빛을 구하게 되면 그 빛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겠습니까? 바로 좁은 문으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정리합니다. 각성된 자를 참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도자가 되어 이렇게 각성된 자들을 참된 믿음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럴때 우리는 현대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값싼 복음을 제시하는 어리석은 전도자들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단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고, 좁은 문을 걸어야 하는 생활이 뒤따른다는 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바입니다. 전도자의 이 말을 듣고 순례자는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빛이 비취는 곳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도대체 이 순례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될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토론문제)***************************************************************************

 

1) 전도자는 누구입니까?(딤전5:17)

 

2) 그 남자는 죄에 대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롬6:23;히9:27)

 

3) 전도자의 질문들은 전도자가 무엇을 하는 자임을 알려 줍니까?(행20:28)

 

4) 그 남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시1:5)

 

5) 전도자는 어떻게 처방을 내렸습니까?(마3:7)

 

6) 전도자는 그 남자에게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까?(눅13:3;마7:13)

 

7) 그 남자의 눈에 좁은 문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욥9:11)

 

8) 불빛을 따라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시119:105;벧후1:9)

 

(52주스터디 천로역정, 김홍만, 생명의 말씀사:2011)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