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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시 읽는 천로역정(김헌수목사)

baromi 2011. 6. 29. 12:15

다시 읽는 『천로역정』
김헌수  

 

어떤 작품은 종종 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한 시대와 그 시대를 넘어 널리 읽혔던 작품은 지난 시대정신의 축약이기에 다시 풀어놓을 필요가 있고 또 우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다시 읽는 것이다.


‘다시 읽는 『천로역정』’은 , 따라서, 과거로부터 배우려는 동정적(sympathetic)읽기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비판적인 읽기를 요구한다. 번연의 개인 생활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 『천로역정』을 개관하고, 이 책과 이 책이 읽힌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우리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이다.

 



1. 번연의 생애와 다른 작품들


번연(1628-1688)은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를 배운 후 아버지로부터 땜장이 일을 물려받았다. 16세부터 3년간 크롬웰의 의회파에서 군복무를 했고 1649년에 재세례파 출신의 여인과 혼인을 했다. 그전에는 상당히 방탕했던 그가 지참금 대신 두 권의 유명한 청교도 저서를 가져왔던 부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근처의 베드포드(Bedford) 교회의 서너 명의 빈민층 여인이 중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중생의 문제와 씨름한다. 옛날의 방탕한 생활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쉽게 극복하지 못하던 그는 베드포드 교회의 목사인 기포드(John Gifford) 목사의 직접적인 도움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에 힘입어 이 문제를 해결해 간다. 1653년에는 기포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1654(55)년에는 교회 근처로 이사하여 활동적인 회원이 된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은 이 무렵이었고, 그의 변화는 마을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55년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네 아이를 남겨둔 채 소천하고 또한 그의 영적 아버지였던 기포드 목사도 세상을 떠났다.


목사를 잃은 베드포드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했는데, 이들은 번연에게도 설교를 부탁했다. 상당한 망설임 끝에 설교를 시작했던 그는 점차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1660년 크롬웰의 공화정이 끝나고 차알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성공회가 다시 국교(國敎)로 되었고 청교도를 포함한 비국교도의 집회가 금지 되었다. 번연은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설교를 했기 때문에 3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가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면 3개월 후 석방되었을 것이나 그 서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1672년까지 12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성경을 탐독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1666년) 등을 썼다.


1672년 관용령(Tolerence Act)으로 번연은 석방되어 베드포드 교회의 목사로 취임한다. 그러나 1673년에 관용령이 취소되었고, 1676-77년에는 6개월 동안 재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천로역정』을 마무리하였다. 이때 오웬(J. Owen)은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또한 『천로역정』을 읽은 후 이 책의 출판을 적극 권했다. 이 책은 1678년에 출판되었고 그의 생전에 12판을 거듭할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 이에 힘입어 1680년에는 『천로역정』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악인의 생애와 죽음』을 저술했고 1682년에는 『거룩한 전쟁』을 출판했다. 그는 약 60권의 저서를 남겼다.

 


2. 『천로역정』


『천로역정』은 기독도(Christian)가 장망성(將亡城)에서 출발하여 천성에 이르기까지의 경험을 알레고리적인 인물들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주인공 기독도가 번연 자신임은 그의 생애와의 관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죄의식과의 갈등과 거기에서의 해방, 그리고 해방된 후 고난을 받고 있는 자신의 삶이 주인공 기독도에 투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에게 지침을 제시하는 전도자는 기포드 목사임도 알 수 있다.


번연 자신이 상당히 오랜 기간 죄의식과 싸웠기 때문에 사람은 율법이나 선행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책 전체의 주제로 잘 부각시킨다. 첫 장면에서 기독도가 등에 커다란 짐을 지고 등장하는데 이 짐은 단순한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몸을 떨고 울었으며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슬픈 목소리로 “어찌할꼬?” 하며 부르짖는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생명을 찾아 길을 떠나지만 절망의 늪에 빠져서는 등의 그 짐 때문에 몸이 더 늪 속으로 깊이 빠진 일도 있고, 또한 등의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 세속 현자(Mr. Worldly Wiseman)의 감언이설에 속아 도덕과 예의를 의지하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를 통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해석자(Interpreter)의 집에서, 율법은 물을 뿌리지 않고 먼지를 쓸어내려는 것이고 은혜는 물을 뿌려서 방을 청소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통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지만 깨끗하게 되는 일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배운다. 기독도의 그 짐은 결국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를 바라볼 때 벗겨진다. 땜장이로서 등에 온갖 도구를 지고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일을 하던 번연으로서는 등에 있는 그 짐의 무게와 고통이 다른 누구에게보다도 더 현실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사실은 다음 장면들에서도 계속된다. 소망(Hopeful)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의 죄의식이나 그것을 벗으려는 자신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은혜라는 사실이 더 밝히 드러난다. 또한 책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자를 대표하여 무지(Ignorance)를 등장시킴으로써 번연은 책의 주제가 무엇임을 분명히 밝혔다.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였지만 번연은 반법주의자(Antinomian)는 아니었다. 기독도는 갈보리 언덕에서 등의 짐을 벗으면서 두루마리와 새 옷을 받았는데 그는 두루마리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진실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지식”을 얻었다. 이 지식은 마음을 움직여 행동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역사적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번연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또한 행동이 따르지 않고 말만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수다쟁이(Talkative)를 등장시킨다. 믿음에 대한 갑론을박을 전개하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그 변화가 나타날까요?”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결정적으로 수다쟁이의 본색을 드러내고 물러가게 한다. 번연은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정당하게 지적하였다.


율법에 대한 번연의 태도는 이 점에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구원을 얻는 자는 새로운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함을 정당하게 이야기하였다. 번연의 율법주의와 반법주의의 양극단을 피하려는 노력은 십자가의 짐을 벗은 다음 장면에서 두 극단적인 부류를 등장시키는 것에도 잘 나타난다. 7번째 장면에서 번연은 천박(Simple), 나태(sloth), 거만(Presumption)을 통해 누워서 잠이나 자고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동시에 허례(Formalist)와 위선(Hypocracy)을 등장시켜 올바른 문(그리스도)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율법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재천명한다.


따라서 『천로역정』은 믿음에 의한 칭의뿐 아니라 은혜에 의한 성화를 주제로 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등의 짐을 벗은 기독도가 여러 가지의 실수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더욱 깨달아 나가는 과정은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천로역정』에서는 해석자의 집에서 들은 해석이 순례의 길에 대한 등불 역할을 하는데, 거기에서 들은 이야기 중의 하나는 사탄이 벽난로의 불을 끄려고 물을 붓지만 그 난로 뒤에서 어떤 사람이 기름을 붓는 이야기이다. 뒤에서 기름통을 들고 기름을 붓고 계신 분은 그리스도이고 기름은 사람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은혜를 상징한다는 해석을 듣고 기독도는 다음 길을 떠난다. 이런 점에서 은혜에 의해 구원도 얻고 순례의 여행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책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여러 가지의 『천로역정』 읽기


『천로역정』은 번연의 생전에 이미 12판이 인쇄되고 10만 권이 팔렸다. 이러한 호응을 얻은 이유는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1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번연의 생애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 소박한 메시지와 그의 양심적인 삶 때문에 그의 설교도 큰 인기가 있었다. 그의 사후에도 『천로역정』은 20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다.


여기에서 책으로서『천로역정』이 수용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로역정』은 번연의 작품이지만, 일단 그의 손을 떠나서는 다른 모습을 지닌다.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사회에서는 다른 어느 모습을 지닌다. 다른 사람들이 읽은 것을 살펴보는 것은 그 책을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또한 지난 시대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도 될 것이다.


첫째는 번연을 정통적인 청교도의 대표적인 인물로 보면서 읽는 것이다. 이것은 청교도의 정의와 관련된 매우 복잡한 문제이어서 다른 지면을 요구하므로 여기에서는 그 복잡한 논의는 접어두고, 번연이 칼빈주의적 사고 체계를 신학적 논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청교도라고 부르는 입장만을 살펴보겠다. 포레스트는 번연이 예정론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택함, 소명, 칭의, 성화, 영화의 관점에서 책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칼빈주의적 사고 체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천로역정』에 예정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언급들이 있음은 사실이다. 기독도가 목자에게, “그 길이 위험합니까, 안전합니까?” 라고 묻자 목자는 “안전하게 되어 있는 자에게는 안전합니다(Safe for those for whom it is to be safe). 그러나 죄인은 여호와의 도에 거쳐 넘어질 것입니다”(호 1:9)라고 대답한다. 또한 소신(Little Faith)의 구원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는 부분도 예정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후대에 논의된 예정론을 칼빈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정론에 대한 논의에서 보통은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로 ‘구분’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어느 한편을 강조한다. “정통 칼빈주의”의 경우는 전자를, 아르미니우스 파의 경우는 후자를 강조한다. 그러나 전능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찾아오셨을 때에는 인간 편에서는 항상 감사와 찬송과 순종의 반응이 있었을 뿐이었지 예정과 자유 의지의 문제를 사변적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 되겠지만 감사와 순종의 반응이 없는 예정론 논의는 결코 칼빈 선생님이 가르친 주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유효한 소명”(10장), “칭의”(11장), “양자”(12장), “성화”(13장)로 나누어 고백한 후 인간의 그에 대한 반응을 “구원의 믿음”(14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15장), “선행”(16장), “성도의 견인”(17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18장) 등의 순서로 고백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목사와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을 하나의 사변적인 체계로 제시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진술한 후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에 대한 인간의 감사와 순종의 반응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 세기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긴장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후대의 부족한 안목으로 번연을 칼빈주의적 청교도의 대표라고 하는 것은 칼빈주의 교훈을 잘 계승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두어야 할 위치보다 한 단계 낮추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번연의 독서는 매우 제한되었고 칼빈의 책을 직접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칼빈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일 것이다. 번연은 영국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대에 살았다는 점에서 넓은 범위의 청교도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칼빈주의적 청교도의 대표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족한 주장일 것이다.


둘째는 묵시적인 독서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신대륙에 새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을 바라는 묵시적 견해가 편만해지면서 『천로역정』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거칠고 적대적인 세상을 지나 산 위의 빛나는 도성으로 여행하는 기독도의 환상은 미국인들의 유토피아적 꿈과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과 잘 일치되어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을 매료하였다. 그런데 남북전쟁(1861-65)으로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꿈이 깨어졌을 때 미국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지상에 건설될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천년왕국으로 바꾸었다. 후천년설의 낙관적 견해가 전천년설의 비관적 견해로 바뀐 것이다. 번연의 『천로역정』은 비관적 견해가 팽배할 때에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사실 번연 자신이 그러한 시대적 격변기에 살았었다.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려던 올리버 크롬웰의 시도가 1660년의 왕정복고로 실패로 끝난 후 번연은 감옥에서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천년동안 역사 위에서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고 책을 썼다. 이러한 시대적 유사성에 더하여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명확한 도식을 갖고 있었던 그의 책은 특히 선교의 열정이 들끓던 19세기 동안에는 더욱 많이 읽혔고, 200여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도 미국 선교사 게일에 의해 1895년에 번역되었으며, 이성봉 목사는 부흥회에서 『천로역정』 예화를 애용하였다. 이성봉 목사의 세대주의적 『천로역정』 읽기에 이르면, 번연에게서 볼 수 있는 은혜와 율법 준수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사라진다. 대신 종말론적 천년왕국이 반법주의적 경향과 함께 득세한다.


셋째는 마르크스주의적 읽기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계급혁명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하층민이었던 번연이 널리 읽힌 사실을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명제와 관계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주장은 번연을 한 개인으로서 보지 않고 시대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점에서 시야를 넓혀주는 점이 있다. 그러나 번연이 목회한 교회가 하층민으로 구성된 교회였다든지 번연의 주요 설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였다든지 하는 식의 주장은 그들의 논리가 요구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번연은 자신을 그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급진주의자들과 구분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왕정복고 후에도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차알스 2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라리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였지 혁명적인 주장을 전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의 결과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는 빈민뿐 아니라 전직 관료들도 여럿 있었다.

 


4. 다시 읽는 『천로역정』


번연은 그 당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청교도와 공유하는 것이 많이 있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주의와 퀘이커의 내적 조명(inner illumination)을 비판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점, 행위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잘 소화하여 소설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 점, 교회와 성례의 영적인 특성을 바르게 지적한 점, 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바르게 인정한 점 등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과 더불어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정당한 태도일 것이다. 호리지차(毫釐之差)가 후대에는 천리지차(千里之差)를 내는 경우가 있기에 그가 주장한 것뿐 아니라 주장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천로역정』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로 생각할 점은 율법의 한계와 효용을 바르게 이야기했지만, 율법을 개인주의적으로만 접근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상에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반법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 둔 사실이다. 기독도는 믿음(Faith)에게, 모세는 “어떤 사람이든지 용서해 주는 법이 없고 그의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량도 모르는 사람이지요”라고 말한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인도된다는 진리는 바르게 말하였지만, 모세의 십계명이 구원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활의 원칙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새로운 마음과 주께 대한 사랑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진리는 가르쳤지만, 율법을 하나님 나라의 사상에서 이해하지 않고 개인주의적으로만 접근하기에 신자가 율법을 지킨다는 사실이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김홍전 목사님의 『십계명 강해』에서 잘 드러낸 것처럼 모세의 율법은 “개인적인 윤리의 대강”만이 아니며(40쪽), 이스라엘의 민족 사명을 위해 주신 것이고, 이것을 넘어서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이 점에서 모세의 율법은 “영화의 세계까지 관여” 하는 것이다(48-50쪽). 물론 믿음은 개인의 것이고 이 점에서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고백한 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거룩한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신비이고, 말하자면 신비의 극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율법에 대한 개인주의적 접근과 하나님 나라 사상의 부재는 번연의 종말론과 직결된다. 『천로역정』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사상이 없다. 그의 작품은 천당 아니면 지옥이라는 도식으로 특징 지워졌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도는 천성을 향하는 길에서 되돌아오는 겁쟁이 (Timorous)와 불신(Mistrust)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그곳은 곧 유황불로 타 버릴 멸망의 도시로 예정된 곳이니 결국 난 죽게 될 것이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거기선 안전할 것이니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세상이 영구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것이 신자의 바른 태도이다. 그러나 그 탈출은 세상 밖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오히려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드러내고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오직 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17:15). 번연이 이러한 종말관을 가진 것은 오랜 투옥 생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 소망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고, 믿음은 순교를 당하고 소망은 기독도를 격려하면서 함께 천성에 이르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랑이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비(Charity)라는 여인이 교회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성(Palace Beautiful)에서 등장하지만 단지 부분적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성도간의 거룩한 사랑의 현재적 자태는 별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교회를 꽃들이 만개하는 정원으로 비유한 데가 있지만 여전히 미래적인 기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하였다. 편지를 하면서 신약의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8-10)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행인과 나그네 같은 자들”에게 권하였다(벧전 2:11). 여기에 행인과 나그네 됨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신약의 성도는 한 면으로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자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에 침투한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므로 이 세상에서는 행인과 나그네이다. 한편으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 사명을 신령하게 물려받았음을 상기시키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그 신령한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행인과 나그네로서 순례의 여행을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신자의 나그네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들어왔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염세적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왕권 실현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점을 무시하면 고전적 자유주의나 해방신학의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셋째, 번연의 다소 치우친 종말론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통치를 드러내는 교회에 대한 정당한 위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번연은 순례의 여정에서 주님이 마련해 놓은 쉴 곳을 몇 군데 이야기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성이다. 번연은 기독도가 죄짐을 벗고 난 후에 그 성에 도달하고, 또 문답을 거친 후에 그 성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의 베드포드 교회의 가입 의식과 유사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순례자는 식사를 하면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성에는 과거의 예언이 성취된 기록들과 미래의 소망에 대한 책이 있고, 또한 투구와 갑옷 등 순례의 길에 필요한 무장들을 제공한다. 기독도도 여기에서 무장을 갖추고 순례의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성은 모든 사람이 거쳐 가도록 순례의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큰 길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믿음’의 경우는 그 성을 들리지 않고 순례의 여정을 갔다. 말하자면 그는 외형적 교회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구원의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원인이 없지 않을 것이다. 크롬웰 치하에서 여러 종류의 교회 정치 체제가 등장했고 그에 따른 논쟁이 왕정복고 후에도 식지 않았으며, 번연은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투옥 생활을 했었다. 그에게는 그런 논쟁이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나는 장로교도 성공회도 침례교도 아닌 기독교인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목사 델의 주장처럼 ‘단지 장로교 제도를 세우기 위해 감독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러한 정치 체제에 대한 논쟁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신령한 면, 즉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번연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 이해하고 제도적인 면은 경시하였다. 제도적인 박해를 받던 시대적 상황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소명 받은 목사의 설교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한 성도의 교제는 선포되는 말씀이 없이는 결코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설교자로서 활동을 하고 또한 ‘전도자’ 없이는 손에 들고 읽는 책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번연으로서는 신비주의자들처럼 내적 조명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에서 천지가 창조된 것처럼 정당하게 소명을 받은 자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사실에 대해 마땅히 하여야 할 만큼 강조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고후 4:6).


넷째, 이러한 교회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례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성신의 중생케 하는 능력이지 물세례라는 외적 형식이 아니며, 침례냐 세례냐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영적 특징을 강조한 그는 성례가 은혜의 수단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구원의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즉 세례는 ‘개인적 의무’라는 데 만족했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외형적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쓸모없는 논쟁에 휩쓸리기보다는 자제하는 것이 지혜롭고 기독교적일 것이다. 그러나 논쟁에 휩쓸리기 싫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다 강조하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일 것이다. 세례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회에 연합됨을 명백히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경시하고 세례를 개인적인 의무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부족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번연의 부족한 점은 그가 이야기한 점 - 성례의 영적 특성 - 이 아니라 바로 이야기하지 않은 점에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밑에 언약 사상의 경시나 부재가 깔려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침례냐 세례냐의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수단보다는 ‘언약’에 대한 이해에 있다. 물론 번연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에 대해서는 바르게 이야기를 하였고 또한 그의 여섯 자녀 중 세 자녀에게는 유아 세례를 주었지만, 믿는 자의 자손을 통하여 언약이 전달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가르쳐야 할 만큼 가르치지 않았다. 논쟁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번연은 논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논쟁보다는 삶을 강조했다. 기독도가 온순(Pliable)에게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면 훨씬 좋겠고”라고 이야기 한 것이 바로 그의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따뜻한 마음의 복음주의자”(warm-hearted Christian)라고나 할까? 그러나 좋은 마음은 그 자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어떤 틀을 빌려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리한 논쟁에 물렸을 경우에 번연과 같은 입장을 갖기 쉬운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러한 반작용의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다른 입장을 빌려 자신의 착한 의도를 표현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로역정』을 읽을 때 강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언약의 관점에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은 단지 그림자이고 천성만이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즉 오랫동안 교회에 악영향을 끼친 그릇된 이원론의 틀을 빌어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 책을 덮으면서


번연의 책을 이모저모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책은 역시 다시 읽을 만하다. 그가 적극적으로 말한 점에서도 그렇고, 또한 말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읽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에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책의 논리를 제시하느라고 번연이 섬세하게 다룬 것을 생략하기도 했지만, ‘허영의 시장’에서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묘사는 요즈음처럼 물질적인 풍요에 빠져 있는 세대에서는 더욱 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또한 ‘허영의 시장’에서 ‘믿음’이 순교를 당하는 것에서 세상의 정체를 잘 드러냈다. 외적인 풍요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영광을 함께 받을 것이다. ‘허영의 시장’에서 순교를 당한 ‘믿음’을 통해 번연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세상의 정체와 고난 가운데서 취해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의 특장(特長)과 함께 이 책의 부족한 점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 특히 개인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언약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통치에 대한 이해가 빈약한 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개인주의적 율법 이해나 빈약한 종말론이 교회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도 주의해서 생각할 대목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성경의 진리가 교묘하게 감취어져 있고 그 가려진 틈새로 교회를 향해 거세게 도전해오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서는 이 책으로써 당대의 아볼리온(Apollyon)과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교회사적 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때 교회사적 검토를 한다는 것은 『천로역정』만이 아니라 교회사 자체를 검토한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교회사적 검토를 할 때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은 “정통 칼빈주의”라고 하더라도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여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다른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도 되새겨야 하며, 번연과 같은 “따뜻한 마음의 복음주의자”를 어떻게 포용하고 인도할 것인가의 문제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드러내는 일은 이 점에서 주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엄위에 기초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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