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스크랩] QT 에 대하여

baromi 2011. 4. 6. 07:15

“큐티(Q.T)로 돌아가자” 온누리교회(담임 하용조 목사)

 ‘위대한 말씀, 위대한 교회 - 큐티에서 설교까지’ 사역축제가 시작됐다.

온누리 서빙고 성전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하용조 목사와 로렌 커닝햄(국제예수전도단 설립자),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가 주강사로 나선다.

29일(수) 첫 주제강의 강연자로 나선 하용조 목사는 먼저 “설교의 깊이는 큐티의 깊이”라고 말했다.

그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큐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며,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말씀에 푹 젖어야 한다”며

“설교는 화려한데 은혜가 없는 이유는 그 속에 깊은 묵상이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하용조 목사는 큐티는 날마다 해야 한다면서 “깊은 큐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설교 훈련의 기초는 큐티 훈련”이라고 전했다.

하용조 목사는 “목회설교는 강해설교”라며 “강해설교의 핵심은 큐티”라고 전했다.

하 목사는 또 큐티한 말씀을 설교로 끌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 목사는 “생명력 있는 큐티를 하자”며 “내 큐티가 살아 있나 죽어 있나를 점검해야 한다.

그는 “온누리 교회를 24년간 사역한 결과, 결론은 ‘큐티로 돌아가자’더라”며

열매 맺지 못하는 큐티라면,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자복하고 새로워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2060

 

QT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큐티 Quite Time 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없던 것인데 “영성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새로운 훈련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무슨 무슨 영성운동이니 영적각성운동이니 하여 Tres Dias 니
Alpha Course 니 G12 니 옛날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이상한 운동이 교회를 침투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운동을 주관하는 목사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장하겠지만 혼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일이 급선무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 해석의 원칙에 익숙치 못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QT 를 한다면서 성경구절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잘못
적용하고 심지어는 다른 교리를 따라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은 성경 해석의 원칙 즉 Grammatico-Historical-Theological Interpretation
의 원칙을 무시하고 Biblical Theological Method 나 Perspectivalism 에 빠져서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QT 보다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교리 공부가 좋은데 그런 공부는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공부시키는 일이 훨씬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QT 를 바로 하려면 개혁주의 목사님 밑에서 성경의 교리를 바로 배우면서

올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방금 읽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QT 가 없는 한국교회가 거의 없습니다만 한국에는 유달리 새로운 신앙형태가 늘 새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신실히 믿는 미국의 교단에는 QT 가 없습니다.

개혁주의들 믿는 교회 성도들은 매일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교리 공부에 중점을 둡니다.

교리를 확실히 알고 그대로 실생활에서 그 교리대로 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생활양식이었고 저 자신도 오늘까지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QT 에는 성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Q.T운동은 교회의 근간을 기초부터 뒤흔드는

심각한 독소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필자가 오늘날의 Q.T.에 경종을 울리는 이유는 이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진리를 객관성(기록된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찾지 않고

주관성(개인의 주관적 타당성)에서 찾자는 철학적 성향이다.
실존주의 대표적인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철학적 단편에 대한 후서'에서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객관적 진리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내면이 진리다"
이 말을 좀 쉽게 말하자면 진리는 객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존주의는 객관적 타당성에서 진리를 규정하지 않고,

주관적인 내적 동의나 감정적 동질성에서 진리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에서 진리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때문에 실존주의에서 진리는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들에게 진리는 타인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없게 된다.
이런 실존주의적 철학을 신학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을 오류가 있는 다른 일반적인 책들과 동일하게 보는 '고등 비평'을 인정한다.
따라서 Q.T. 운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근거를 객관적으로 기록된 그 말씀(성경)자체의

권위에 있지 않고, 말씀을 읽는 주체가 영적인(?) 감동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되지 않고는 성경 자체가 규정하지 않고 독자가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된 원 의미나 상황과는 관계 없이 자기의 현재 의도와 상황으로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운동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동일한 효과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관적으로 성경의 기록 의도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을 경우, 성령님은 절대로 역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심각하다.
이렇게 될 경우 성도들은 자신이 성경을 주관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을 의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만일 교회들이 성경 해석에 대한 지식이 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도록 방치한다면,

진리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http://www.hoebok.com/

 

 

오늘날 말씀 묵상의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는 QT가 지닌 몇 가지 내재적 위험성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늘날 QT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혁자들과 신실한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본의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흔히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이 정신에 관해 칼빈 선생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 정신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부터 유출되는 뜻과 의미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 헛된 상상이나 호기심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를 지양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데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거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도 않는데 그 범위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의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는 성경 본문을 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더라도 아무런 제제, 경고, 대책을 제시할만한 성경적, 신학적 안전장치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습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오늘날 유행하는 QT의 내용과 방법론을 만들어 시중에 공급하는 이들조차도 ‘오직 성경 사상’의 엄밀한 성경 이해의 기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QT 자료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빈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기만해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QT는 '전체 성경'(Tota Scriptura)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QT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분량의 성경 구절을 통해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관련된 제한된 적용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성경 전반에 걸쳐 조망되어야 할 전체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결국 자신의 형편과 이해와 수준에서 내용을 단정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몇몇 구절을 가지고서 성경 전체를 아는 양 우쭐거릴 수도 있습니다. 부분별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러한 활동은 언제나 전체 성경 안에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찾는 이라면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합하는 부분적 내용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 속에서 의미적 모순이나 갈등 없이 일관되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를 보면, 전체 성경 사상보다는 부분 성경 사상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QT를 하는 사람 중에는 성경 자체 혹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자신에게(특히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말씀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여 그 말씀만을 신주 받들듯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성과 내재성 사이에 간격을 벌인 신정통주의, 그중에서도 바르트 신학이 끼친 치명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경험에 따라 가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오직 전체 성경 안에서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늘날 QT는 신령주의와 주관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권위입니다. 성경이 정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성경은 한낱 이방 종교의 경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과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근거로 한 성경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늘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 역사적 신앙고백(신조와 교리문답)입니다. 성경 내용의 일관성과 확실성 그리고 계대성을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데에 이보다 더 좋은 신앙적 유산은 없습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역사적 개혁신학으로 공인된 신앙고백서들의 내용과 체계를 통해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성경대로 묵상하고, 성경에 따라 살도록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의 내용과 체계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성경의 내용과 체계를 바르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에, 각자의 독특한 정황에 따른 상이한 해석과 깨달음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고백한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진술과 기준에 따라 통합적인 차원에서의 성경 이해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QT는 이러한 개혁교회의 성경 이해 방식과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근래에는 무분별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 운동, 그리고 심리학적 관상신학 등의 영향으로 점점 더 성경을 주관과 내면을 만족 혹은 고양시키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도를 마치 신탁을 찾기 위해서나,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한 명상으로 설명하고, 경건이라는 말은 영성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사용되는 용어보다도 오늘날 QT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방법론입니다. 대개의 경우, QT는 실행하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하심에 따라 성경의 본의를 깨달아가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설정한 목적이나 기대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 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정보와 결과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QT를 통한 궁극적인 관심이 자아 만족과 현세적 성공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QT 자료집 안에 교묘하게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심리학적 해설과 예화 등이 이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 사상에 따라 바르게 시행되는 성경 읽기나 묵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역사를 따르는 잘못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http://blog.daum.net/kkho1105/10734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진실과온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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