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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중생론과 성령세례에 대한 정리글 모음

baromi 2010. 3. 11. 12:09

질문:(파블로: 나는 개혁되었는가(2)를 읽고)

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도록 성령으로 인도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목사님의 회심과 학문과 수고를 통하여 거룩한 기질과 습관의 차이를 선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교훈한 경건의 훈련은 단번에 주어진 거룩한 기질과는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가르쳐 주심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추가로, 중생과 회심이 동일한 것인지 알고 싶고, 중생과 소위 말하는 성령체험의 차이와 거룩한 기질과의 상관관계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바쁘신 목회일정에 누를 끼침이 되지는 않는지 조심스럽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교회와 목사님의 가정위에 넘치시기를.


*   *    *   *

 
호목사님의 답변:

저의 글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참된 믿음과 회개를 통한 회심과 중생은 거룩한 기질과 습관이 주어지는 순간이며 이 기질과 습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기초한) 도덕적인 습관의 습득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인 습관형성은 자연적인 교양인의 윤리적인 습관형성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유교철학이 강조되는 문화적 분위기에서 많이 강조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습관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습관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셈이 됩니다.

파블로님은 바로 그것을 질문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통해서 생겨진 파블로님의 의문은, 곧, 중생과 회심 이전에 비교할 수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도덕적 습관형성과 구원받게 된 사람의 새로운 습관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중생과 회심 이후에 있을 법한 차이, 곧 구원받게 된 이의 습관(newly given)과 구원 받게 된 사람의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갖게 되는 습관(continually formed)과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님의 질문을 바로 이해한 것인가요?

만일 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이해가 올바르다면, 님의 질문은 참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님의 질문에 대해서 무척이나 반갑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하고 ‘제2의 축복’이나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 것인 양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여튼, 님의 질문에 제가 이해하는 대로의 답을 드리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새로운 기질을 가지게 되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순간적으로 주어진 이 습관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란 개념을 우리는 “반복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어의 habit이라는 말은 habitation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집”, 혹은 “거주”와 연결됩니다.  곧 집밖에 있던 것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 몸밖에 있던 것이 우리 몸 안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집”에 “거주”하게 된 이 “습관”(habit)이 “집”에 “계속적으로” 거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만 끝나 버린다면 그것은 결코 “습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주어져서 “계속적”으로 “거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 사이에 있는 상호관계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에 처음 “순간적으로” 갖게 되는 “근육”과도 같다고나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근육”을 어떻게 해야만 아 어린아이의 “근육”이 강하게 형성될 것인지는 자명해 집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스스로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근육”이 나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근육”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그 “근육”은 약해질 것입니다. 생존은 할 지 모르지만,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일”은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큰 일”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권하는 권면, 곧 경건의 훈련에 대한 당위성이 요구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습관으로서의 “영혼의 근육”을 어떤 근육으로 형성해 가느냐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경건의 훈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근육(습관)이 얼마나 강한 근육(강한 습관)으로 체질화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곧 중생과 회심이 되는 순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집니다. 이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는, 법정적인 의만이 아니고 실제적인 의도 또한 주워집니다. 법정적인 의가 주어지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이것을 “칭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법정적인 의”가 주어질 때에 “동시에” “실제적인 의”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법정적인 의가 주어지는 것이 칭의라면 실제적인 의가 주어지는 것은 “성화”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성화가 오는 것처럼 이해합니다만, 저는 그것이 동시에 시작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리고 싶군요. 한번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이런 설명을 드리게 되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제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칭의는 “순간적”이지만, 이와 동시에 시작되는 성화는 “계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설명과 관계해서 대조하면, 중생한 자의 “습관”은 “칭의”와 같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면서도 또한 “성화”와 같이 “계속적”으로 형성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여기시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ㅎㅎ


그리고, 파블로님의 두번째 질문은, 회심과 중생의 관계입니다. 저의 앞의 설명을 유의하시면 병행적으로 나열시키고 있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실, 회심은 효과적인 부르심(수태)과 죄의 각성과 죄의 확신, 그리고 회개, 믿음, 중생, 칭의, 성화의 모든 과정들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심이란 말의 영어는 conversion인데, 이 말에는 “회”라는 말뜻은 있어도 “심”이라는 말은 실상 없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전환하다”, “돌이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생활을 하면서 집수리하는 사람들의 광고전단지에 보면, “conversion”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게 됩니다. 종교적인 “전환”이 아니고 집수리에 관한 “전환”입니다. “집수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집수리”가 아니고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변혁으로서의 “전환”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에 의한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conversion)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회심”이란, “전환”에 있어서의 모든 순간과 과정을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지옥을 향해서 가다가 이렇게 계속 걸어가는 것이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그 발걸음을 돌려서 몸을 틀어서 천국을 향해서 발걸음을 되돌리는 과정에는 어느 한 순간만을 꼬집어서 “전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전환”을 말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해하실 수 있는 지요? 지속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가지고 있는 전환의 과정이 회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중생이 차지하는 것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순간적인 사건으로서의 “중생”은 지속적이면서도 순간적인 “회심”이란 사건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시게 되면 제가 이야기 싶어하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은 “회개”(repentance)와 “회심”(conversion)의 차이에 대해서입니다. “회심”은 “전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자녀들(창세전에 택하신)을 “전환”시키실 때에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어가시지만 그 “능력”에는 그 전환시키시는 죄인들의 마음 속에 “회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시는 것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또한 죄인의 마음 속에 자신의 잘못과 거짓됨과 죄악들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스스로 뉘우치도록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일을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들 안에 일어나는 뉘우침을 “회개”라 하고 이러한 회개 등을 모두 포괄적으로 포함한 전체 과정을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설명이 파블로님의 영적 진보에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양무리 손성은 드립니다.

 

Ps. 성령체험의 차이는 또 다른 영역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성령세례를 개인의 구원의 서정과 관계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베풀고 계시는 세례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개인의 구원의 서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중생과 일치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존의 이해는 너무 개인주의적인 성령체험을 이해하기 때문에, 저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구속사적 사건이라는 지평에서 이 성령체험을 이해하게 되면 성령세례로 시작되었으면서도 계속 반복되는 사건이 성령체험이고 그것의 한 정점이 성령충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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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년왕국(統千年王國, pan-chilliasm)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시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지난 주일 박계원목사님을 통해서 들었던 천년왕국에 대한 세 입장 중에서 저는 소위 “무천년왕국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천년왕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pre-), 후(post)라는 말과 더불어서 “무”(a-)라는 접두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곧 “무천년왕국”이란 “천년왕국이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오해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이든 실제적이든 그리고 한 번 뿐이든 성경에는 이 단어(“천년, chiliasm)가 분명하게 나옵니다(계20:3,5,7). 기독교의 신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어떤 위치를 이 개념이 차지해야 하느냐는 것은 차지하고 하여튼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존의 신학적 개념과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통(pan-, or supra-)천년왕국”이라는 말로 저의 견해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무”, “a-”)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때부터 지금도 계속 (“통”, “pan-”, 혹은 “supra-”)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초대교회때부터 이 지상 가운데에 “천년왕국”이 성취되었고 또한 그 왕국의 통치가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고 또한 이 땅 우리의 삶 가운데에 그 왕권을 주장하면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전에도 말씀드렸던 “하나나님 나라”의 개념과도 일치됩니다. “실현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에 속해서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 바로 “천년왕국”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올 어떤 “왕국”이 아니고, 이미 이 땅 가운데서 성취되어져서 더욱 완성되어져 가는 “왕국”이 바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왕국”이 역사의 어떤 싯점에서 성취되어졌으며, 우리 개인에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설명은 간단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설명은 좀 길게 오늘 설교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이 “천년왕국”,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정점이 바로 오순절날의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입니다(특별히 행2:33, 15:16). 이 날에 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종말”의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던 것은,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위 “성령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의 백성들과 자녀들에게 쏟아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행2: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세례란 일종의 가입식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해 있던 자들을 “하나님나라”, “천년왕국”에 속하도록 불러서 일종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바로 “성령으로 주신 예수님의 이 세례”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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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께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에 오순절에 강림하셨는데,
그렇다면 구약에도 개개인 신자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봐야 하나요?

 

holyjoy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시기는 했었어도 성도 안에 내주하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다윗의 시편 51편에 보면, 자기에게 주의 영이 떠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임하였다가 떠나시곤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도 안에서 영원히 내주하시게 되는 것이 신구약간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성령이 성도에게 임하였다가 떠난다고 해서, 구원받은이가 구원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똑같은 구원이며 중생이고 회심이어도, 그 구속의 경영역사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


holyjoy
1)구약에서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윗분이 지적한 것처럼, 잘못된 견해입니다. 잘못은 잘 지적하신 것 같은데, 해법제시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구약의 차이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도

구약은 외적인 임재나 임시적인 임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내적인 임재나 지속적인 임재가 병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윤목사님의 지적처럼, 구약성경에는 없었던 성령세례가 신약성경에서 등장한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다고 한다면,
신약에서는 메시야왕국에 성령을 주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정국가의 운영은 외적이고 임시적이고,
메시야왕국의 운영은 내적이고 지속적이라고 한다면,
저의 앞설명이 이해되실 줄로 생각합니다.

 

2)다윗의 기도는 '성신이 떠날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서' 나온 기도입니다.
윗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라도 다윗과 같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신약성도 안에서 내주하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할 때에는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내주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내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내주측면이 강조되었던 것보다도 비록 내적인 역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내적인 역사는, 성령의 강권적인 외적 역사가 내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과의 관계는, 환경과 의식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렇게 어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사단이 신약성도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성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구약의 성령께서 외적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더라도 구약성도의 내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는 것을, 신약성도가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를 통해서 성령의 영향속에 있는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은, "때가 되매" 이루신 구속사역과 성령의 오심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열매
그렇군요. 다윗의 경우는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은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의 차이는 구약은 성령의 임재가 있어도 외적인 임재나 임시적인 임재였을 뿐이지만, 신약에선 내적인 임재나 지속적인 임재라는 것. 그리고 윤 목사님 지적하신 때가 차매 구약성경에는 없었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오순절 성령으로의 세례. 이제야 조금 의문이 풀린 느낌입니다.

그리고 손 목사님 마지막 지적하신 부분,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는 것을 신약성도가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를 통해서 성령의 영향 속에 있는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은 구속역사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은 아주 좋은 지적인 듯 보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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