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Re:진합태산님과의 대화를 돕기 위한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 비교)

baromi 2009. 9. 11. 10:40

진합태산님은 아마도 총공회 측 분인가 봅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진합태산님께서 쓰신 덧글들을 볼때에 기본적으로 정리 되어야 할 것이 2 가지가 보였습니다.

 

첫째, 중생의 용어 정리와 이해

둘째, 언약과 그 적용의 범위에 대해

먼저 중생의 용어 정리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교리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서부터 청교도시대까지 이어져 왔던 <넓은 의미의 중생 or 연속적 중생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웨민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존 머레이로 부터 처음 시작된 <순간적 중생관>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중생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냐... <과정>으로 이루어지냐의 문제이지 결론은 "영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한우리 | 등급변경 | 조회 206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29 

카이로스님이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칭의=구원

 

애초에 칭의만 구원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로 주장하시어

지금까지의 토론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구원의 순서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그것은 중생과 회심의 용어정리부터 해야 올바른 토론이 된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칼빈을 포함해서 17세기 이전에 개혁신학자들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광의적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칼빈은 중생을 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으로 설명했고, 1561년의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고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는 중생을 거의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죤머레이, 루이스벌콥, 안토니 후크마 등등....)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세 가지 의미의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의 중생(요3:3-5, 요1:12-13, 요일5:1)-좁은 의미의 중생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의미하는 중생(약1:18, 벧전1:23)-넓은 의미의 중생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마19:28,KJV,ASV 참조)

 

저는 우리의 토론에서 중생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좁혀서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은 돌이킴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구별되어야 하며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국면들은 동시적이며 상호관계적인 것이 많기에 카이로스님이 주장하는 칭의만 구원이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 뿐이라는 주장은 구원론을 왜곡되게 이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피해야 할 표현으로 보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국면들은 한결같이 구원에 포함되는 것이지 칭의만이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일단 "영이 살아난다"는 중생에 대해서 진합태산님은 기본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합태산님이 적용하신 기존신학용어인 <중생>은 순간적 중생관에 기본구원이라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을 아셔야겠지요..

 

밑의 글은 과정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을 서로 비교하느라 쓴 글이었습니다.

글과 댓글들을 읽고 진합태산님이 알고 계신 기본구원과 어떻게 틀린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영혼의 의사에 있는 글로 제가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을 잡으면서 쓴 글입니다.

아래의 글로 두 중생관의 차이가 이해가 안되신다면... 일단 기존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정(효과적 부르심~영화)의 요소들에 대해

먼저 사전 지식을 습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들의 요소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밑의 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미 | 등급변경 | 조회 62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18 

신앙과 칭의의 순서에 대해서 전통 신학자들 사이에도 견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칭의를 신앙보다 먼저 놓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구속 적용의 순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만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카이로스님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칭의라는 명사가 일반적으로 신앙에 의한 칭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구원의 모든 서정보다 앞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야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칭의 즉 구원의 요소에서 말하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에

국한해서 하는 말임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근거가 되어서 또는 신앙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을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방편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신앙보다 앞섭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볼때)

중생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소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심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보아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없이는 저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믿음)과 회개는 하나로 묶어져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는 말이 회심입니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본다면..

선택, 부르심(소명), 중생, 신앙(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를

일반적 구원의 순서로 보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황 등으로 언급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중생을 거듭남이라는 말로

말하기 때문에 거듭남 전에는 성화가 올 수 없으며 성화 전에는 영화가 올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특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과정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기도 합니다. 즉 -부르심(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

 

 

구원은 시간적으로 구분을 하나 성질적으로 구분도 합니다.

시간적으로 구분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즉 성경은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야 할 것으로

-장차 받게 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받은 구원의 단계들: 선택, 중생, 칭의, 양자됨 등이며..

-현재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 성화이고..

-미래에 받게될 구속: 몸의 부활로 성취될 영화라고

구분을 지을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성질적 구분은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이루신 것(선택과 대속 성취)

-우리에게 이루신 것(칭의와 수양)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과 (중생)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구분합니다.(성화)

 

신자의 의지와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이루시는 구원: 선택, 대속, 칭의, 중생, 양자, 부활

부분적으로 신자의 지정의와 몸의 활동을 통해 이루시는 구원: 성화

 

 

 

지금 카이로스님은 의의 구원의 순서적 이론으로만 구원을 논하기에

연속적 중생관이 마치 애매해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의 성질적 구분과 순서와 같이 연동해서 보셔야지만

연속적 중생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탈 | 등급변경

| 조회 162 | 07.11.04 23:0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84 

연속적인 중생관의 정의는 제가 글을 올려놓았고 또한 여러글에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설득적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교회에 모인 청중들중 회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런 표현을 쓸 때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은 아직 회심한(믿고 회개하여)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회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청중들중에는 회심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회심은 하지 못했는데 좁은의미의 중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로서)

마지막으로 중생의 씨앗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전합니다. 말씀의 설득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좁은의미의중생(초기중생)한 사람이 반응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영적인 귀를 가졌기 때문에

복음안에서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정말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됩니다.

 

죄를 각성하게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새생명의 원소가 심기워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말씀중에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죄의 각성과 확신상태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1주일, 1개월 1년 그 이상으로 (존번연같이)

그러면서 언젠가는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보일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의각성과 확신만으로는 이사람은 아직 회심하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아닙니다.

      이사람이 죄의 각성만 하다가 다시 예전의 죄된생활로 돌아 가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럴경우는 예정된사람이 아닐 것이고, 아니면 각성하고 돌이켜 회심으로 나아가 새롭게 출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정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 회심의 과정이 어떤사람은 급진적으로 올수 있고 어떤사람은 점진적으로 올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초기중생에서부터 회심시까지 설득적이며 권면하는 설교를 할수있습니다.

왜냐햐면 이 사람이 초기중생을 해서 믿고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그이후이 영적인 복들을 누릴수 있기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중생은 했지만 아직도 회심하지 못했다면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사람이 의식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지않은 이상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이기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과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연합과의 차이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 믿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이고,

초기중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입니다.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때만 이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고 그이후의

모든 영적인 축복들(칭의,성화,양자됨, 인치심)을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이때부터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회개하기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소유할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전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 이런회심의 전과정을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마스터스가 말한 연속적중생관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면 이사람은 설득적이고 권면적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초기중생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새롭게 출생할 때까지를 회심의 전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회심할때 까지 (믿고 회개할 때까지) 권면하고 설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출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이렇게 설득하고 권면할까요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할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도 하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회개와 믿음이라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해서 우리가 죄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

믿고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수동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하기를 지, 정, 의가 다하여 믿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공로가 없는것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으로 인한 우리 본성의 새로와짐인 좁은의미의 중생때문입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영화롭게 될때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순서가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상호성임 볼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영화될때 까지 그 영향을 계속미칠 것입니다.

칭의도 마찬가지임니다. 성화도.....

 이모든 과정중에 중생이 시발점이므로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우리의 구원을 공로나 자랑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와 감탄을 할 뿐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득합니다. 마치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이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 같이……..

그래야 그이후의 축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동적으로, 중생을 거의 완전한 쇄신으로 보고  언젠가는 열매로 회개와 믿음을 가지겠지 하는 사람은

(이게 순간적인 중생관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무슨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와 결과로 보기때문에 결코 능동적으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가듯이 수동적이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고 회개 할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모든것위에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하고 무슨 단계니 꼭그 틀에 맞춰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회심을 시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시하고 열린마음으로 살펴보야합니다.

그것이 참된회심인지,- 회심의 단계가 아니라 폴핼름이 말했듯이 필연적인 구성요소가 포함되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한우리

토탈님이 누구신지요? 호기심이 갑니다. 아울러 초기중생(수태,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으로 불러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토탈님이 언급하신 후크마나 벌콥도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이라고 불렀거든요..나머지는 다 동의합니다. 요일5:1절을 함께 검토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주일 지나고 뵙겠습니다. 복된 주일 되시기를....
holyjoy
한우리님께서 사용하시는 '넓다' '좁다'는 말의 정의와 토탈님이 사용하시는 그 말들의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것 같군요. 그 뉘앙스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한우리님께서는 '좁다'는 의미를 '더욱 참되다'는 의미로, 토탈님은 '좁다'는 말을 같이 쓰면서도 '더욱 참된 중생 이전의 무엇'으로 규정하면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요5:1의 '난 것'을 설명할 때에도 그것이 '좁은 중생(거듭남)'인가 아니면 '넓은 중생(거듭남)'인가, 논의할 때, 이 '넓다', '좁다'라는 말의 개념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거듭남'은 한글이고, 꼭같은 그 한글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비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1) 검정색은 불신자의 상태입니다.

(2) 연두색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3) 파란색은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쓰게 함으로 사람이 애쓰는 것을 표시.

(4) 빨간색은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첫째는 아시다 시피 순간적 중생관입니다.

두번째 그림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위의 그림은 순간적 중생관의 일회적 성령의 사역과

연속적 중생관의 이회적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기 위해서만 그린 것입니다.

 

즉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위에서 보듯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단 1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회적입니다.

그 1회가 순간적으로 일어날때 효과있는 부르심과 중생과 회심(회개와 믿음)과 칭의 이렇게

4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카이로스님의 말로는 셋트로...

즉 한박스 안에 들어있는 4가지 요소를 성령께서 한요소씩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한 박스채 통채로 일회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속적 중생관은 그것이 아니고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2회 일어나는데 바로 수태와 칭의때입니다.

이 2회 일어나는 기간은 "순간적"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순간적 중생처럼

순간적으로 일회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2회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순간적으로

나타나서 한번 일어난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두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위의 그림은 순간적 중생관과 연속적 중생관의 성령의 독단적 역사의 횟수가

일어나는 것만을 염두해서 그린 것이고..

 

밑의 그림은 연속적 중생관이 어떠하다는 성질적인 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연속적 중생관은 바로 위 그림의 밑에서 보듯이

수태와 칭의는 서로 분리가 된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

계속적으로 연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혜성의 머리 부분이 수태라면.. 혜성의 꼬리 부분이 칭의라고 한

피터마스터스의 글과 같이 한 몸체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단독적인

역사하심은 초기와 칭의때.. 그리고 그 중간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사람들의 애씀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쓰게 만드시기에

사람이 성령의 목적을 향해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순간적 중생관에는 인간의 애씀이 전혀 없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에는 회심을 위한 인간의 애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애씀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마음에서 나오는 애씀이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기원한 노력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화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성화에서 신인협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독립적으로 하나의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까지 인도하시고 그 인도하심을 받아 인간은

애를 쓰는 것이기에 결국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공로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회심의 과정에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시의 인간의 애씀에 대한 개념은

아래의 덧글에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인간의 노력이 무지무지 요청됩니다. 청교도들의 간증을 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백하기를 자기의 그런 노력 때문에 구원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요.^^ new 23:11
그럼, 바로미님의 지적대로 회심 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 시의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new 23:15
회심시, 곧 수태와 새출생 사이의 애씀은 말 그대로 돌아섬의 애씀(endeavor of turning to God)이고, 성화시의 애씀은, 하나님을 향한 애씀(endeavor only toward God)입니다. new 23:17
turning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다가 돌아서는 것을 자가용이 회전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뒤로 도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이고, 어느 정도 반원형식으로 완만하게 도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지옥을 향해가던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는 것이 돌아섬의 애씀이고, 그렇게 돌아선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애씀입니다. 회심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new 23:23
돌아섬의 애씀은 일종의 방향 전환이고, 하나님을 향한 애씀은 그렇게 방향전환한 사람이 달려가는 것에 해당하겠군요. new 23:26

 

ㅎㅎ 리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오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1차중생의 상태를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단계로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중생때를 구원에 이른 상태로 강조하는 것은, 1차중생을 싯점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요. 마치, 영원전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A라는 사람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싯점은 영원전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태시에 생명의 씨가 뿌려졌지만, 믿음과 회개로 반응해야만 new 10:11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해야 합니다. 영원전의 선택을 받을 사람이 영원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만약 영원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구원까지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는 이들이 바로 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의 추종자들 중에 있는 줄 압니다만...ㅎㅎ 한우리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리플을 붙여봅니다. ^^ new 10:13

 

  Horace
나그네1님이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무엇보다도 연속적 중생관은, '새출생'과 '성령세례'를 일치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가 '수태'한 것처럼 보여도 '새출생'에 이르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은 자가 '수태'하여서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것에는 성령의'특별한' 사역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단지,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으로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성령의 내주'와는 다른 것이라고 앞에서 제가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성령세례에 대한 관점은 양무리마을의 연속적 중생관과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교 07.08.20 20:38

  Horace
수님들께서 '연속적 중생관'이란 용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로는 이런 '연속적 중생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들의 중생관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줄 압니다. 만일 이런 용어나 개념들에 그 분들이 익숙하지 않다면, 그 분들이 이런 중생관에 익숙해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린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 지금도 얼마든지 그 분의 택하신 자녀로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들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베풀고 계시는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07.08.20 21:18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의 시기가 모두 새출생과 동일한 시기이니, 성령세례 받으면 곧 성령께서 내주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이군요? 성령세례 받고 나서 한참 후에 성령이 내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와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군요? 수태한 것처럼 보여도 새출생에 이르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하고, 수태하여서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것에는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이 있는 것으로 보구요. 호 목사님의 글을 읽으니까 명쾌해지네요. 연속적 중생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07.08.20 22:34

 

예외의 경우이지만 한 순간에 중생이 일어났다고 할때.. 

순간적 중생관과.. 연속적 중생관은 차이는 아래그림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순간적 중생관은 한 순간에 1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고

순간적 중생관은 한 순간에 2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의 할점은 이 2회 역사는 중생이 2회 일어난다는 의미의 2회가 아닙니다.

시작과 완성.. 즉 수태와 칭의(출생)의 개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글에 대한 덧글 들....

어떻게 보면 덧글들이 더 유용합니다.

 


왕초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로미님은 여전히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하시겠지요? 저는 깊이 고민해 보아야 겠습니다. 이제껏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연속적 중생관의 견해를 수용하려 하였는데.. 같이 갈 수 없는 견해임을 알게 되어 약간은 혼동스럽습니다. 어떤 견해를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견해를 배척해야 할런지..??
바로미
네.. 만약 위의 저의 개념이 맞다면 순간적 중생관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학의 대가들이 모두 연속적 중생관을 언급하고 있네요? - -? 간혹 일부만 순간적 중생관의 관점을 언급하는군요. 즉 구원의 체험은 하나인데.. 그 구원의 체험에 대한 해석이론은 두 가지네요.. 순간적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냐? 연속적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냐... 일단 연속적 중생관은 순간에 체험한 것까지 해석가능하지만 순간적 중생관은 순간에 체험한 것만 해석 가능하네요.. 
바로미
단.. 위의 저의 개념이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과 맞아야지만... - -;
왕초보
저도 홀리죠이님 말씀을 바로미님과 동일하게 이해했습니다. 성령의 이회적 사역과 순간의 개념..
 
바로미
일단 연속적 중생관은 성도들의 모든 구원의 체험들을 모두 수용하여 해석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칭의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때문에 쉽게 수용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이.. 두 해석 모두 옳은 것이라면.. 기왕이면 이미 내가 구원받았다는 해석을 추구하는 것을 무시 못한다는 것이지요
왕초보
위에서 순간적 중생관에서 소명-중생-회심-칭의의 네 요소만 언급하셨던데, 양자(입양)까지가 동시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소명-중생-회심-칭의-양자, 여기까지가 동시적 사건이라고 보아야..
바로미
아.. 수태와 칭의에 중점을 두다 보니.. 그냥 아시는 분들은 아셔서 들으시겠지요.. 솔직히 양자 삼는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왕초보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볼 때, 순간적 중생관이 소명~양자까지가 동시적 사건이고, 또한 구원의 논리적 순서제시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바로미
결국 구원의 체험은 하나인데.. 해석이 두가지입니다.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1회에 단번에 다 일어나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가 2회 일어나는데. 중간에 그 2회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회심과정이 있는가?
 
바로미
솔직히 노골적으로... 순간적 중생관이 편하긴 합니다. - -; 복음을 믿고 주님을 믿기도 마음을 먹고 회개햇다면.. 그 자체가 구원의 확증이라면.. 얼마나 쉽겟습니까? 불신자가 보기에도 너무 쉽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주님은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나 쉬워서 구원받을 수 있는데.. 중간에 탈락하는 자들이 많다는 소리가 되나요? 그럼 결국 중생후에도 얼마든지 중생취소되어서 지옥 갈 수 있다는 견해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겠는데요?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성령의 단회적 사건으로 즉 거듭남으로 회심의 방편을 거쳐 칭의가 선포되는 것이지요. 이회적 사건 보다도 단회적 사건이 이해하기도 훨씬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해하기 편하다고 진리는 아니지만..
 
바로미
솔직히 순간적 중생관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쉽지요? 혹시 그래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분들이 교회에 많아지게 되었고... 교회의 타락의 주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순간적 중생관을 가르쳤었지만.. 지금 연속적 중생관을 가르치는 것이 상당히 힘듭니다. 성도들의 눈빛이 부담스럽더군요.. 실망의 눈빛... 그냥 교회 나와 말씀듣고 그 말씀에 동의하면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저의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셔서 그렇게 얄밉게 신앙생활 하셨군요.." 즉 순간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여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체험을 순간적 중생론으로 적용해 받아들인 분의 신앙은 올바르지요..
왕초보
이회적 사건으로 칭의가 선포가 된다고 생각하면..?? 수태는 경험했는데, 칭의는 경험 못하면 어쩌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연속적 중생관에서 수태는 반드시 칭의로 연결되겠지만 얼른 듣기엔, 성령의 수태의 사역도 경험하고, 성령의 출산의 사역도 경험해야 하고, 한 마디로 불안한 것이지요? 한 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바로미
위의 개념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잘 정리 되었지요? - -; 홀리조이님이 좀 들어오셔 좀 언급좀 해주셨음 좋겠는데요..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전해서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는 것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전해서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는 것..
바로미
구원의 체험을 순간적 중생관 이론에 적용해서 해석한 신앙생활...
바로미
구원의 체험을 연속적 중생관 이론에 적용해서 해석하는 신앙생활
왕초보
확실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바로미님 지적대로 한국교회에 거짓신자가 많은 까닭이 순간적 중생관 때문인지.. 카이로스님 지적대로 칭의가 확정적 구원이어야만 평안을 잃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성화를 추구해 갈 수 있는데.. 연속적 중생관은 무거운 짐을 안겨 주는 건지..
바로미
그렇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저희 성도들에게 연속적 중생관을 설명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짊어주는 것 같긴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의 상태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되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상태가 더 성도에게는 두려운 상태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성도들이 부흥사들이나 은사자들의 예언들을 그리 선호할 이유가 없지요..
 
바로미
지금 잠깐 영혼의 의사를 훑어 보았는데요.. 연속적 중생관은 회심을 의식할 수 있는 단계가 있지만, 순간적 중생관에는 회심을 의식하는 단계 조차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네요. 즉 카이로스님이 처음 언급햇던 칭의 후 회심이 된다는.. p115 "순간적 중생의 입장에서는 죄인이 이미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순간적 중생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출생(카이로스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칭의)이 회개와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봅니다."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 성령의 단회적 사역인 거듭남의 결과 회심의 반응이 일어난다. 연속적 중생관: 성령의 이회적 사역 즉 수태와 출산 가운데 회심의 과정이 있다. / 이렇게 놓고 보니 "회심"을 "거듭남으로 인한 결과된 반응"으로 볼 것이냐,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이해할 것이냐의 문제네요? 물론, 거듭남으로 인한 결과된 반응이 지속적인 과정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없겠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회심을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면, 단계가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고,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한 중생의 결과된 반응으로서의 회심으로 보면, 중생과 칭의가 동시적 사건이니 카이로스님 말씀도 어느 정도 이해될 것 같습니다.
왕초보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결과 회심의 반응이 뒤 따라오고. 회심을 방편으로 하여 칭의되고, 그러나 회심 조차도 불가항력적 은혜로 거듭난 결과이니 전혀 공로가 될 수 없는 은혜이고..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인 중생(거듭남)에 기초하여 거듭남의 결과인 회심의 반응을 방편으로 하여 칭의된다. 저는 순간적 중생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명~양자까지 필연적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칭의의 방편은 회심이고, 회심이라는 반응은 중생의 결과이고, 중생은 불가항력적 은혜 곧 성령의 유효한 부름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 은혜로 말미암았기에 결코 취소될 수 없는 확정적 구원이고.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반영!
 
바로미
즉 칭의의 결과로서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느냐? 아니면 거듭남의 열매로서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냐??? 아니면 연속적 중생관 처럼 칭의의 수단(방편)으로서 회심의 과정이냐? 겠지요?
 
바로미
성경은 회개하여 구원함을 받으라고 했으니.. 회심은 결국 구원함(칭의를 받는)을 받는 방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회심을 열매나 어느 것의 반응으로 보는 것은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나요?
왕초보
회심은 칭의를 위한 방편인 동시에 중생의 결과가 아닐까요? 칭의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회심을 성경이 요구해도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어떻게 믿을 수 있고, 회개할 수 있을까요? 결코, 오류가 아니라고 봅니다.
바로미
칭의를 위한 방편으로서 회심을 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중생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회심의 시작... 하지만 중생의 결과로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은 좀 적용하기 어렵겠는데요? 중생이 무의식적이라서.. 그럼 대부분 회심즉 온전한 회심을 한 후 그 회심 바로 전에 중생케 된 것으로 오인할 수 있지 않겠나요?
 
바로미
구원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갑자기 성령께서 중생시키셔시고 회개케 하셔서 칭의 하신다? 아이러니... 순간적 중생관으로는 해석 안되죠..(1) 구원시켜달라고 기도 (2) 중생 (3) 회개를 통한 칭의 (1) 은 과연 어떤 기도인지.. 들으시는 기도인가?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저런기도 많이 하는데.. 그래서 말이 안되기에 복음을 듣고 동의하고 믿고 영접기도하는 순간 칭의하셨다고 하는 이론이 나올 수도 있지요?
 
holyjoy
ㅎㅎ 열심히 배우시느라고 수고들 하십니다. 어제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좀 더 분명해 진 것이 있는지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로미님께서 그려놓으신 그림을 보면서, 여전히 미진한 감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스터스목사의 모델을 다시 보시면,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성령의 주권적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노력, 곧 구도자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도자가 힘쓸 수 있도록 설교자가 또한 힘쓰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순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수태와 출산). 수태 이전의 모든 노력은 순전히 자연인의 노력입니다. 그리고 수태 이후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깨어나게 하심으로 이뤄지는 애씀입니다(생명에 이르는 근심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구도자가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출산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때와 스타일을 결정하십니다. 전적으로 구원이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출산한 사람이 성화되어가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견인하시고, 또한 그 성도는 힘써 자신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연속적 중생관의 강조점들입니다. 참으로 개혁주의, 청교도들이 강조해 왔었던 것입니다. 수태가 되면 반드시 새출생에 이르게 되지만, 수태가 된 것 같으면서도 가짜 수태가 있어서, 거짓된 확신에 빠지게 하고, 참된 회개가 참된 믿음을 갖지못하고 결국은 새출생조차 하지도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그런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바로미
그럼 성화에서의 인간의 애씀과 수태후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성화는 인간의 애씀이 성화를 이루는 한 요소에 속하지만.. 수태후 인간의 애씀은 칭의를 얻기 위한 조건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인가여??? 즉 칭의를 위한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는 것인가요?
holyjoy
왕초보님만 아니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사, 신학교교수들이 '순간적 중생관'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토탈님의 정리는 탁월하다고 제가 지적한 것입니다.
holyjoy
성화에서나 수태 이후의 인간의 애씀이 전혀 구원의 조건적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쓰게 하시지 않는 모든 힘씀은 거짓된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로미
그럼.. 성령께서 인간이 회심하도록 힘쓰게 인도하신다는 것이고... 성화에서도 역시 인간이 거룩하게 되도록 힘쓰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고요.
holyjoy
That's right!!!!! It's absolutely fabulous!!!!!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 그림에서 수태와 칭의 중간에 다른 색의 막대기만 찍- 그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보면서.. 회심의 과정 중에 인간이 해야하는 일이 있길래.. 이것을 회색선으로 그을까하다가 그만 두었는데요.. 성화시의 인간의 애씀과 회심의 과정시의 인간의 애씀의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때문에...
holyjoy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인간의 노력이 무지무지 요청됩니다. 청교도들의 간증을 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백하기를 자기의 그런 노력 때문에 구원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요.^^
왕초보
그럼, 바로미님의 지적대로 회심 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 시의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holyjoy
회심시, 곧 수태와 새출생 사이의 애씀은 말 그대로 돌아섬의 애씀(endeavor of turning to God)이고, 성화시의 애씀은, 하나님을 향한 애씀(endeavor only toward God)입니다
왕초보
돌아섬의 애씀과 하나님을 향한 애씀이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요?
holyjoy
turning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다가 돌아서는 것을 자가용이 회전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뒤로 도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이고, 어느 정도 반원형식으로 완만하게 도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지옥을 향해가던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는 것이 돌아섬의 애씀이고, 그렇게 돌아선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애씀입니다. 회심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로미
그림과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holyjoy
바로미님께서 이 부분에 명확해지신 것 같아서 감사와 동시에 축하를 드립니다. 남은 과제는 이 모델을 따라서 회심과 중생을 어떻게 쉽게(어렵지 않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호목사님께서 힘을 다하셔서 가르치시는데, 이런 모델에 따라서 회심하는 분들이 늘어가면서 생명력이 넘칩니다^^
왕초보
홀리죠이님 말씀대로면 돌아섬의 애씀(회심 시)과 하나님을 향한 애씀(성화 시)이 차이가 있다는데요. 색깔도 다르게 표시해야 하는 게 아닌지요?
바로미
인간의 애씀의 두가지에 대해 둘다 다른 색으로 하면.. 인간의 애씀이 하나는 인간에게 기원된 애씀으로 오인될 것 같아서요..
 
holyjoy
지금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면 너무 세부적인 구분은 현학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질문이 있을 때만 그 차이를 설명하면 될 것입니다. ^^
왕초보
돌아섬의 애씀은 일종의 방향 전환이고, 하나님을 향한 애씀은 그렇게 방향전환한 사람이 달려가는 것에 해당하겠군요
holyjoy
왕초보님,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같이 힘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차원이 다른 셈이지요.^^
holyjoy
원래 '회심'의 구약용어가 '슈브'인데,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방향전환을 나타내지요~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으로 해석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질문입니다. 특히 고넬료와 루디아의 경우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임이 전제 되었는데.. 왜 그것을 보지 못했을련가가 궁금하네요. 만약 마음이 열리는 그때가 순간적 중생의 순간이라면 전부터 하나님을 공경했던 그 공경은.. 거짓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성경은 그런말 한적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그 문장 자체가 순간적 중생을 한 시점이라고 해석할 수도 없고요.. 또한 고넬료와 루디아가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때 "공경"은 그들이 애쓰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왕초보
어떤 신학교 교수는 벌코프의 기독교교리요약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데 카이로스님처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으로서 가르치시는 것 같더군요.(그렇다고 제가 벌코프의 견해가 순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 중생관인지, 연속적 중생관인지는 직접 읽어 보시면 알게 되겠고..) 하긴 그분이 선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보니 전공이 조직신학이나 교의학도 아니고..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연속적 중생관 보다는 순간적 중생관에 익숙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어 갑니다. 이제는 자러 가야 되겠습니다.~~
 
 
 
 
 
 
한우리
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돌아서고 애씀의 방향전환도 중생1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생1의 상황을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짓는 연속적 중생관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점에서 바빙크의 이런 견해는 생각할 것이 많아보입니다. "중생의 새생명 안에 원리적으로 신앙과 회심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들은 때가되면 필연적으로 그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지라도 언제나 구별할 수 있다. 회심은 중생의 열매요 동시에 그것은 신앙을 전제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요 역사로서 처음뿐 아니라 계속된 과정속에서도 그렇다. 동시에 부어주신 새 생명에 기인한 인간의 행위로서 한 순간에 제한되지 않고 일생동안 계속한다." (하나님의 큰일, 20장 소명 p423, 김영규 역) 중생을 수태와 출생으로 비유했다면 출생만이 아니라 수태의 상황도 구원의 시작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군요...수태에 해당되는 좁은 의미의 중생을 받았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인식되는 회심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피터마스터즈 외에 또 누가 있는지요? 대부분은 참된 회심으로 이끌리지 않는 수태는 가짜 수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까?
바로미
한우리님의 지적은 이미 방향을 틀기 시작한 수태부터 이미 구원 받은 상태이고.. 방향이 완전히 틀어진 칭의에서는 구원확정이라서 일단 자동차 자체가 커브를 틀어서 일단 방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 즉 회심의 시작을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우리님의 주장 맞나요? 홀리조이님은 완전히 방향이 틀어졌음을 하나님께서 선포해 주셔야지만 그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고요? 결국 회심의 견해차이인가요? - -?
홀리조이님과 피터마스터스는 회심을 통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칭의)이 이땅에 사는 성도에게 내려질 때를 구원 받은 때.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태부터라고 생각되는데.. - -; 저는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 중생관에서 오는 산물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저는 회심과 칭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좀더 잘 연구를 해보아야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심이란 무엇이고.. 칭의는 무엇인가?... 
한우리
회심의 견해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생의 견해차이 같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이 참된 회심이 있기 전에 수태를 인정한다면 그 수태까지도 생명의 상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구원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미
회심의 첫 단계가 수태(초기 중생) 아닌가요?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연속적 중생관을 보면 수태와 회심이 개별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던데요.. 즉 수태후 회심이 시작된다고 보게 되는데.. 문제는 연속적 중생관을 언급하신 피터마스터스는 회심의 시작이 수태라고.. 말하면서 수태(중생1)가 회심의 첫 단계로 언급하네요. 그래야지만 중생의 과정이 모두 하나로 큰 사건으로 보아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우리
수태된 상태를 생명의 상태로 볼 수 없다면(?) 낙태의 문제도 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지 않겠습니까?
grace
저도 한우리님의 말씀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한우리님의 견해처럼 저도 수태부터 생명이둣이 구원이고 칭의의 순간이라는 중생2는 차라리 진정한 성화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보는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칭의가 순간에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회심의 과정 자체가 없습니다. 단지 순간적 중생관에서 말하는 그 중생은 연속적 중생관에서 말하는 회심의 첫 과정 즉 수태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연속적 중생관에서 회심의 어느 순간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냐에 따라서 그레이스님의 궁금증이 풀릴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저도 수태부터 구원이 맞다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만약 회심의 과정 자체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칭의는 그럼 무엇인가?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 -?
 
바로미
그럼 회심이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없고(자동차가 방향을 틀어 돌고 있는 상태), 온전한 회심이 이루어져서 이제 의롭다고 칭의하실때 구원을 받았다(자동차가 생명의 새 방향으로 완전히 틀어졌을 때 이제 제대로 되었다! 선포) 는 것이 홀리조이님과 피터마스터스님의 구원을 언제 받는가?라는 시점이고.. 한우리님은 바빙크의 견해를 통해서 회심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회심의 시작은 곧 구원을 받은 상태로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지요?
바로미
이제는 연속적 중생관의 차원에서 회심 과정의 시작부터 구원받았다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칭의를 받을 때에야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는가로 나누어지는군요..
grace
그러니까 제가 첨부터 중생1을 차라리 구원예정자의 부르심에 대한 마음을 여는 시기라고 해야 중생2가 진정한 중생이 되는것이고 그렇다면 중생2를 진짜 중생이라고 보고 순간적중생이 맞는것 이 되는데~~
grace
그런데 중생1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중생2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전제를 한다면 구원의 시기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것 같기는 하지만~~
바로미
그레이스님이 말하는 순간적 중생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요? 부르심과 동반한 중생을 말하는 것이지요? 순간적 중생관이 아니고.. 그레이스님 오해를 하시면 안되는 것이 사람이 어떤 구원의 체험을 했다면 그 구원의 체험이 순간적 중생의 체험이냐 연속적 중생의 체험이냐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합니다. 구원의 체험은 하나이지만 두 구원론으로 해석하는데 기존 한국교회는 순간적 중생론으로만 해석해 왔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grace
출산하는 중생2의 순간만을 진정한 중생이라고 보면 순간적이라는 것이죠,
바로미
지금 한우리님은 출산(중생2)이 아닌 수태(중생1)부터 진정한 구원의 상태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연속적 중생관에서 진정한 중생의 역사는(성령의 단독적 사역) 수태와 칭의 이렇게 두개입니다. 그러나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중생과 칭의가 성령의 일회적 사건에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보고 진정한 중생(성령의 단독적 사역)은 하나라고 봅니다.
 
한우리
바빙크 만이 아니라 후크마도 그런 주장을 합니다. 인간의 반응 측면에서 회심(회개와 믿음)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함이 정상이지만 회심으로 반응되는 것은 결국 수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수태를 좁은 의미의 중생(생명의 씨앗이 뿌려짐)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 좁은 의미의 중생을 후쿠마도 벌콥도 바빙크도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채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터마스터즈는 거듭남을 중생2에만 채용하는 것이 저와 다른 점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거듭남을 중생1로도 표현하고 중생2로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grace
그렇다면 중생2에서 칭의가 아니고 중생1에서 이미 칭의가 되어야 하는것이 아닌가요?
grace
성령께서 중생1을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중생2로 이끄신다는 전제를 하고 연속적중생론을 펼치는것도 가할것 같습니다만 ~~
한우리
저는 순간적중생관이나 연속적 중생관보다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좁은 의미의 중생도 거듭남이라고 쓰고 넓은 의미의 중생도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만 고집하면 안된다는 뜻이죠....
한우리
(그레이스님) 아니죠 중생1은 아직 믿음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이니까 칭의라고 부를 수 없죠. 아브라함이 12장에서 칭의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의롭다고 칭함 받았으니까요....
grace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순간을 구원받았다고 그동안 설교를 들었습니다,칭의를 받은 시기 즉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는 그 시기가 칭의이며 구원이 비로소 이루어진 시기로 보아야 할까요
바로미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머리가 시원할 것입니다. 12장은 효과적 부르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요.
 
 한우리
물론 바빙크는 직접적으로 거듭남이라고 하지 않고 소명의 부분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많은 개혁주의 학자들은 내적소명 자체를 좁은 의미의 중생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스트롱과 바빙크, 후크마)
왕초보
중생1,2나 중생의 시작과 완료, 수태나 출산.. 이런 용어들은 다 연속적 중생관의 용어들입니다. 순간적 중생관에선 중생,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 용어사용이 정리되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중생이 시작되고 완료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을 단회적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사건이 단회적으로 일어나면, 소명~양자가 동시적 사건이기에 칭의가 확정됩니다.
grace
기복신앙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lordship의 신앙으로의 전환이 중생2가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결국 둘다 학설로서 수용할수 밖에 없네요,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선 중생2라는 용어가 없습니다. 칭의이지요. 순간적 중생관에서의 중생(거듭남)은 단독설을 취합니다. 협력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속적 중생관을 견지하신 분들은 순간적 중생관을 배척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순간적 중생관을 지지하는 분들도 연속적 중생관을 비판적으로 보겠지만.
grace
중생2가 순간적중생관에서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 둘의 조화를 자꾸 생각하다가 보니 ~~
 
바로미
혹시.. 번역자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번역해서 이렇게 꼬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 -?
왕초보
그럴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의 시초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궁금하네요.. 존 머리부터??? 그럼 역사가 너무 짧은 것 아닌가요? - -? 존 머리가 웨민대학원 조직신학 교회로 핫지의 뒤를 이어서 했다는데.. 우리나라 신학생들 초기에 박형룡이후부터 거의 웨민으로 갔지요? - -? 그리고 교수가 되었고... 저는 신학시절 연속적 중생관을 듣지 못하다가 저희 교단의 송용조 목사의 조직신학 책을 보고 그제서야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개념을 처음 접해 보았습니다. - -;
 
한우리
왕초보님이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순간적 중생을 주장하는 분들도 중생이 완료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신비적이라는 것이죠. 그 생명은 언제나 자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자라가는 것은 응애하고 태어나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복중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것이죠.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서 중생이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 중생관을 말하는 것인데요. 연속적 중생관에서 중생의 시작 곧 중생1 그리고 중생의 완료 곧 중생2..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의 완료 개념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중생1이라는 용어나 중생2라는 용어도 없습니다. 그냥 중생(=거듭남)이고 그냥 칭의입니다. 중생이 시작되었다. 중생이 완료되었다. 중생1,2 .. 이런 용어들이 연속적 중생관의 용어라는 겁니다.
grace
순간적중생관이 여러가지 면에서 편하기는 합니다,
바로미
ㅎㅎㅎ 그레이스님도 순간적 중생관이 편하게 느껴지시는가봅니다. ㅎㅎㅎ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체험을 한 사람의 그 체험담을 순간적 중생관으로 적용하면 상당히 불편해 짐을 느끼실 것입니다. ㅎㅎㅎ
 
한우리
제가 볼 때 문제와 오해의 소지는 연속적 중생관이 응애하고 태어나는 그 순간만 거듭남이라고 단정짓고 뱃속에서 10달동안 자라는 것은 거듭남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바로미
그런데 한우리님.. 재미있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마스터스 목사는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즉 순간적 중생관으로 길들어진 저희들은 거듭남 이후 회심을 거쳐서 회심 후 칭의라는 것을 따로 생각하는데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거듭남이후가 아니고 회심 이후가 아니고..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라고 언급하는 것에 주의하셔야 할 듯 합니다.
바로미
아.. 오타.. (재미있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가 아니고 (재미있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 (초기중생--> 죄각성-> 회개와 믿음-> 칭의-> 양자-> 구원의 확신) ==> 회심의 단계, 그런데 이 과정을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해석하니.. (초기중생-수태) (죄각성-> 회개와 믿음) (칭의-양자-구원의 확신) 이렇게 따로 분리해서 자꾸 생각하게끔 하네요?
 
한우리
연속적 중생관이 회심의 과정 안에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다면 아무리 회심을 강조해도 수태도 구원의 시작이라고 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연속적 중생관은 수태와 회심을 분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것인가요? 오히려 순간적 중생관이 수태와 회심과 칭의를 다 같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미님의 말씀처럼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언급한다면 논리적 모순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요....??
바로미
영혼의 의사 책에 나오는 회심의 요소 그림을 보면 회심의 첫 단계가 수태(초기 중생) 넷째 단계가 (칭의) 다섯째 단계(구원의 확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것이 한 몸뚱아리(하나의 과정)이라서 수태부터 구원의 시작이니 구원 받았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여태동안 생각해 왔었는데.. 어제 홀리조이님은 회심(여기서 회심은 아마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말하는 듯 합니다)과 칭의가 있어야지만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일단 죄 용서를 받으려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홀리조이님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전조단계로 수태와 죄의 각성의 단계를 회개를 위한 단계로 기본 기초단계로 보신 것인가????
 
한우리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이 소명-중생-회개-믿음-칭의라는 구원의 논리적 순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동시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이 참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데까지 중생한 순간 그럴 수도 있고 오히려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순간적 중생관입니다. 순간적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 순간적이라는 것이지 그 생명이 회개와 믿음과 칭의로까지 발아되는 것이 다 순간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순간적 중생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로미
(한우리님)그래요? 제가 알기론 순간적 중생관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은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의 넓은 의미의 중생의 글들과 일치가 되지 않아서 순간적 중생이 그렇게 적용되는 것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순간중생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바로미
ㅎㅎ 저는 왕초보님의 글에 대해서 답변한 것입니다.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는 구원론 그렇게 자세히 배우지 못하고 졸업했습니다. ㅎㅎ 솔직히 제가 배운 신학과정의 허술함을 고백하고도 싶어지네요. 졸업후에 배운게 더 많으니까요.
 
holyjoy
ㅎㅎ 리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오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1차중생의 상태를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단계로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중생때를 구원에 이른 상태로 강조하는 것은, 1차중생의 싯점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요. 마치, 영원전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A라는 사람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싯점은 영원전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태시에 생명의 씨가 뿌려졌지만, 믿음과 회개로 반응해야만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해야 합니다. 영원전의 선택을 받을 사람이 영원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만약 영원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구원까지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는 이들이 바로 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의 추종자들 중에 있는 줄 압니다만...ㅎㅎ 한우리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리플을 붙여봅니다. ^^

 

한우리

리플 감사합니다. ^^ 저도 홀리죠이님의 견해와 거의 동일합니다. 단지 1차중생, 2차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과 그 씨앗이 발아한 것으로 사용합니다. 1차중생, 2차중생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서요..
 
바로미
그렇다면 홀리조이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받는 시점을 말할 수 있는 때는 "드러난 때"를 말씀하신 것이로군요
바로미
위의 홀리조이님의 덧글 2개, 게시물에 추가했습니다.
 
 
 
 
참고..
카이로스 | 등급변경 | 조회 97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44 

 

 

홀리조이님의 리플 중에 [성경을 그런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님의 영혼을 위해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고넬료, 루디아가 순간적으로 중생하였다고 해석하는 개혁주의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20:57 ] 라는 글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으로 바울, 고넬료, 루디아의 구원순서를 설명 부탁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되면 완전히 우리의 토의는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더이상 장황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네요

홀리조이님의 리플 중에 [성경을 그런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님의 영혼을 위해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고넬료, 루디아가 순간적으로 중생하였다고 해석하는 개혁주의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20:57 ] 라는 글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으로 바울, 고넬료, 루디아의 구원순서를 설명 부탁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되면 완전히 우리의 토의는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더이상 장황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네요.

 

holyjoy

그렇다면, 성경을 펴보십시오. 먼저, 바울부터 살펴보기 위해서, 사도행전9장을 펴십시오. 펴셨으면 펴셨다고 리플을 다십시오. 다른 분들에게 응답하고 되돌아 오겠습니다. ^^
holyjoy
읽으셨다면, 사도행전9장에서 사울이 회심한 싯점은 몇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holyjoy
그리고 사도행전10장을 펴셔서 고넬료의 경우를 살펴보시고, 고넬료의 회심의 싯점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지적해 보십시오
holyjoy
또한 사도행전16장의 루디아가 그 마음이 열리기 전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는데, 마음도 열리기 전에 그녀가 '하나님을 공경하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카이로스
저에게 재질문하실 필요 없이 성경에 나온 부분만 연속적 구원관으로 설명해주시면 되는데요~ 저는 이미 루디아에 대해서는 순간적 중생관으로 두차례 올렸습니다만.
holyjoy
이미 저의 질문들이 연속적 중생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저의 질문에 답을 해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루디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했던 '싯점'과 '마음이 열렸던' 싯점이 동시적이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개혁주의신학자, 혹은 성경해석학자가 누가 있는지 대어 보십시오
카이로스
유대교인들이 지금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 사람들의 성령의 역사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holyjoy
그들이 예수를 주로 인정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가라지도 있겠지요. 알곡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루디아처럼 마음이 열려 예수를 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구원과 무관합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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