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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Re:북한 특수군 임천용 회장, 5.18단체에 결투 희망

baromi 2009. 6. 25. 09:20

광주사태에 북한군 특수부대 介入疑惑: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 설립이 시급하다
                                                    [2007-08-07 12:24:01] ?몄뇙

생략.....

간단히 말해서,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병력 약 500명 이상이 국군복장과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서해안으로 침투하여 광주사태 초기에 유방을 도려내거나 민간인을 참혹하게 학살하여 광주시민을 격노케 하여 민중봉기를 유발하였고, 장갑차 운전과 교도소 습격과 무기고 습격 등을 이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탈북자 군인들은 이미 국정원에서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증언을 했는데, 일간지 방송,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고 몇 년을 고민 끝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마침내 일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공식 기자회견과 증언은 작년 말(2006.12.20)에 있었고, 한국논단과 인터넷 매체에서 몇 차례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그들의 인터뷰 내용은 전반적으로 광주에서 희생한 분들이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증언 핵심은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 여부에 대한 의혹을 풀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광주사건이 민주화다 아니다 하는 논쟁거리를 만들자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다. 3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해명이 안 되고 있는 미묘한 부분들이 무엇 때문에 실체가 나오지 못하는지, 남한정권은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있어서 설명을 안 하고 있는지 그 아리송한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북한군 개입의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봉기자(蜂起者)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전기톱에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全面戰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III
2006년 12월 20일 오전 11시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 전 교도지도국 19여단 2대대· 계급 상위)이 기자회견한 중요한 부문만 추린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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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에 개입했던
북한군의 실체에 대한 기자회견 요약문

오늘 기자회견은 북한쪽에서 증명하고 있는 사실과 자료에만 절대적으로 근거한다는 원칙이고, 북쪽의 일방적인 자료만으로는 신뢰성에 미흡한 점이 있음을 간과하여 광주봉기 당시 계엄군을 지휘했던 남한군부의 실세들과 계엄군 및 봉기군 양쪽지영의 일반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청취한 자료를 보탰다.

김정일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국제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남한정권과 한국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친북인념이 한계를 넘어서 체제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고 국가적인 가치관에 위협을 주고 있는데 대해서 탈북자들도 눈뜨고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 광주문제를 떠나서 이번 기자회견을 열게 된 근본 취지와 목적이다. 오늘 광주사건의 장르를 주제로 다루지만, 김정일 정권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현 정권과 친북론자들에게 경고를 주는 차원에서 김정일 체제의 속성과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 개념과 통일논리가 질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5.18광주사건의 시발점은 분명히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민주화를 위해서 나섰던 애매한 인명들이 끔찍하게 도륙되고 난도 질 당한 유혈사건은 현장 투입 되었던 계엄군의 불찰에 의해서 초래된 점이 없다고 볼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군의 교란작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만행이다. 광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백색 테러이자 그들의 남침 의도를 증명시켜 주는 사건이었으며 독재의 자산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북한 인권을 침몰시킨 독재정권이 남한 땅에서도 그 기질을 여과 없이 보여준 대표적이고 생생한 시범현장이었다.

광주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죽었으며 배후가 누구였는가를 해명하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심각하게 봐야 할 점은 허울을 쓴 민주화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속을 나누면서 광주의 희생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역이용하고 특정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는 일이다. 광주문제에서 민주화적인 성격은 폭넓게 인정해야 되지만 민주화투쟁 도중에 북한정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비린낸 나는 사건 전반을 독재 권력에 대항한 민주진영의 영웅담으로 만들고 덕을 보려는 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매장하고 진실을 묻어버리는 날강도적인 행위이다.

또한 북한군의 개입이 분명한 이상 남한사회에서 이념세력간의 분쟁으로 회자 되어 집안싸움을 할 단순한 성격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정일 정권은 광주학살의 책임을 져야 하고 남한국민들은 그 값을 받아내야 한다. 무장인원들을 침투시켜 내분을 조장하고 인명살상을 초래한 죄 값을 정당하게 받아내는 것은 눈치 볼 것 없이 자위적인 입장에서 정당한 대응이다.

간첩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들고 포상금을 주는 친북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문제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고 북한군의 개입을 폭로하는 우리자신도 매우 불리해 질수 있다는 것을 타산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과 친북세력은 우리를 질타하고 압력을 넣기 전에 왜 이러는지 우리의 입장을 먼저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다.

광주문제는 정권교체에 써먹을 항목이 아니거니와 북한정권의 행위로 만들어진 국가의 비극적인 일을 정치 쇼에 이용한다면 남남갈등과 전쟁을 조장하고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손해 보는 일로 끝날 것이다. 5.18광주봉기의 진실은 좌우가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관을 떠나서 편법이 없이 사실에 의한 사실의 논리로 평가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광주문제를 통해서 영호남사이에 팽배해 있는 지역적인 이질감이 해소되고 좌우 진영의 정체성에 대한 상호모순이 국익을 도모하는 존중과 화합으로 개변되는 국가통합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광주문제의 본질에 있다. 5.18사건의 진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북한정권에 어두운 국민들의 의식을 개발시키고 지역감정을 해소하며 좌우를 봉합하여 북한정권에 대한 예리한 판단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안보의 질을 부각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1. 5.18광주봉기의 북한군이 개입했던 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발언요지

(1)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가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 1986년 1월 6일 하기 훈련을 위한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한국에서 명명하는 특수8군단) 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 및 대대장 대대정치 지도원을 위한 군사 정치 일군 상학에서 발언) (자료출처: 김정일의 사촌동생 김선일.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는 발언은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 출처가 있다).

(2) “두 아들을 남조선 혁명에 바친 부모님들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제부터 국가가 아들들을 대신해서 부모님들을 모시겠습니다.” (출처: 대대장 여운학. 함장관은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되었다가 죽은 124부대원 중 한 사람인 함장근의 동생. 특수8군단 최고의 여단이 17저격여단 4대대 출신).

2. 광주와 관련된 김정일의 발언

(1)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반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982년3월. 북한 특정여단 53.16.43.17.19.818.59여단들의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출처: 현장. 자료보관: 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

(2) “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습니까.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습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1981년 6월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1군단 지구를 시찰하면서 군인들이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장을 비판하면서 한 발언. (자료출처: 인민군 각 사여단 참모부에 발송된 사상투쟁 교양자료.)

(3) “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출처: 광주평록 1983년 판)

(4) 광주사건 과정에 대한 남한 쪽 관계자의 진술
“확실한 단서를 잡지 못해서 정확이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 현장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충돌이나 봉기군의 저돌적인 행동과정에서 절실히 개입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 개 대대 정도의 역량이 내려왔었다면 당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돼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는 불가능 했다고 본다. 왔으면 바닷길이고 서해안으로 침투했을 가능성이 크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의심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윤전 중장비와 각종 총기를 다루는 수법이나 방산 업체에 대한 습격. 총기 탈취. 방송국. 교도소를 비롯한 국가기관 전복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노출되었다. 군복무를 했다고 해도 일반 봉기군의 능력으로 정부군을 상대해서 그 만큼 고도의 수법을 요하고 체질화된 행동이 필요한 특수적인 일을 수행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상당히 이상한 점들이 많이 발견됐다. 신원이 해명되지 않는 사람들과 병원에 실려 온 시체들을 부검하면 정면에서 맞아죽은 사람보다 뒤에서 맞아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진압군이 시위대의 등 뒤에다 대고 사격한 일은 장담하지만 없다. 이런 일은 매우 심중하고 민감한 일이다.”

“진압군의 중장비가 쉽게 탈취당하고 봉기군의 수중에 장악되는 현상들이 많았다.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훈련되고 전문성이 필요한 일인데 북한 특전사들이 아니고 여기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훈련경험이 제한된 사람들이 한 짓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못한 문제점이 너무 많다. 작년(2005년)에 미국에서도 광주사건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러 사람이 왔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광주문제는 당시 정권의 책임소재에 대한 차원을 떠나서 본질적인 사안을 많이 놓치고 있다. 책임한계에 따른 한두 사람의 피해는 둘째 문제다. 북한에서 남한을 적ㅇ화통일 할 경우 광주봉기에서 자취를 감췄던 영웅들이 수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럴 경우 때는 이미 늦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이 문제는 시급히 밝혀지는 것이 옳다.”

(5)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했던 북한군 관계자들의 증언

A씨(현재 북한군 중장); “내가 알기로는 봉기군 쪽에서는 3분의 2정도는 못 왔다고 본다.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이 인명피해가 많았다. 괴뢰군 쪽에 들어 있던 우리사람들한테 직접 맞아 죽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혼잡한 판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괴뢰군 애들 군복입고 논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다. 우리도 그쪽에서 움직였으면 인명손실이 적을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자 분담된 임무에 따라 조별로 행동했으니까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다. 담당했던 대상물이 다르고 임무성격도 틀렸다.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 대충 짐작으로 일개 대대정도는 되지 않을 까 생각한다.” “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고아만(정치지도원)을 포함해서 세 명만 돌아왔다.” “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남조선 사람들하고 일체 말을 못하게 하는 것 이었다. 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 “그쪽 애들 장비가 우리보다 좋았다.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괴뢰군 애들의 전투능력은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겁이 좀 많아 보였다. 괴뢰군(한국군) 애들보다 남조선 인민들의 정신이 더 좋았다. 시위대쪽에서 죽는 숫자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그들이 계획대로 잘 따라 주었다.”

B씨(현재 북한군 대좌);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 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 죽었을 뿐이다. 시위대들이 많이 죽지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하였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조장시켜야 하고 적당하게 죽여야 되는 것이 임무였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광주에 나가서 절실히 체험했다.”

C씨(2003년 당뇨병으로 제대);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 있다. 그 사람들은 우리 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우리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오래전 일이라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2006년9월 증언 발언, “ 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D씨; “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네 패거리 싸움 식이였다. 우리가 정면에 나설 경우 전면전으로 갈수 밖에 없게 되고, 그러게 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되어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백 프로 죽었다고는 장담하기는 어렵다. 긴박한 상황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처리 된 것으로 안다.”

(6) 광주사건과 관련한 김선일의 발언

“형님 생일날(김정일) 큰아버지가(김일성)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나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광주사건에 대해서 알았다. 형님은 성공한 작전이라고 말했지만 큰아버지는 정말 아쉬워했다. 우리 쪽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훈장을 내신하고 영웅으로 배려해주라고 형님께 지시하셨다. 광주의 일로 김대중 선생의 힘이 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처: 김선일).
“광주 주 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입니다. 수렁님의 노고를 덜어 드릴 수 있다면 지구를 깨는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수령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무조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수령님의 전사들입니다.”(출처: 김선일).


(7) 5.18광주봉기 전후의 북한 수뇌부 상황자료

(출처: 대남사업부 관계자)
1979년 10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과 12.12 전두환 정권 수립으로 남한에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자 김일성은 오랫동안 대남 공작을 총괄하다 퇴임하여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이는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한편 김일성은 표면상으로는 1980년 초(2월6일)에 남북한 총리회담개최. 남북 간의 직통전화 개설 등의 평화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남한 내의 혼란스런 정세를 이용하여 내부 교란작전을 구상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김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있던 장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게 추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김중린의 증언을 사적인 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연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 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 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 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 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 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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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중현 공동대표의 추가보충 발언; “대한민국의 안보위협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이 자리에 나왔다. 북한사람보다 더 친북적인 정신 나간 좌파세력들이 사회 전반의 요주에 틀고 앉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왔다.”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 북한군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주장하는 충격적인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1. 남한의 모든 크고 작은 소요에는 빠짐없이 북한의 공작이 개입돼 있다.

2. 5.18 때, 광주에 1개대대 600명 정도의 특수군이 투입됐다. 제1진에는 300명, 제2진에는 300명이 서해와 동해안으로 양면 투입됐다. 서해안에 이르자 남조선 배가 마중 나와 길을 안내했다.

3. 남한에 있는 탈북자 중에는 5.18때 광주에 왔다가 돌아갔다가 탈북해온 사람이 현재 있다. 그가 오늘 기자회견장에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안 나왔다.

4. 광주 사태에 투입됐던 특수부대원 중 상당 부분이 지금도 남한에 남아 있다.

5. 광주 사태에 참여한 사람들 중 62명이 영웅으로 추대됐다.

6. 죽은 사람 사진들(현장전시) 중에는 전기톱에 의해 얼굴이 가로로 잘려진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이 둔부를 드러낸 채 목이 잘린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의 등에다 뒤로부터 총을 쏜 흔적이 있는 사진들이 있다. 한국의 공수부대 요원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제주 4.3 시간 등에서 보듯이 공산당들은 공포감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장 잔인하게 죽인다. 이 세 개의 사진을 보더라도 광주 학살이 북한 특수군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7. 남파된 북 특수부대 요원들은 각 군단 소속 특수부대들에서 차출됐고, 반은 국방군 복장이었고, 반은 민간인 복장으로 내려갔다, 국방군 복장을 입은 특수부대 요원들은 진압군 행세를 했다.

8. 남한의 HID 등 특수부대 요원들도 장갑차를 몰지 못한다. 한국군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도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 시민들만을 가지고는 장갑차를 몰거나, 무기고를 탈취하거나, 주요 시설에 대한 방화를 동시 다발적으로 지휘할 수 없다. 타 지역에서 발생한 시민 봉기에는 북한군이 개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갑차를 빼앗거나, 무기고를 털거나 정부군을 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싸우지 못했다. 광주에서만 이런 것이 가능했다. 바로 북한 특수군이 개입됐다는 증거다.

9.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갔다 온 사실들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남한 사람들만 이를 부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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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다음은 『한국논단』 2006년 11월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도형: 광주사태 이야기 다시 한 번 듣고 싶은데, 1980년 5월18일 이른바 5. 18 광주사태가 사실은 그 전 날부터 전남대학, 조선대학 등에서 데모가 격화되다가 확대된 것인데 실제로 임천용 씨가 거기서 겪어본 것을 토대로 말하자면 어떻게 거기서 개입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나?
▲임천용: 광주사태를 제가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말하자면 자신감이 있는데 그것은 우선 한국에 와 있는 특전사 출신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보증하는 것이다.
▲이도형: 특전사라는 것이 북한의 특전사 말인가?
▲임천용: 북한의 특전사 출신들이 지금 나처럼 남한에 와있?? 사람들이다.
▲이도형: 그것이 몇 사람이나 되나?
▲임천용: 우리 단위에 있던 사람들이 20여명 되는데 그 외에도 제가 알기로는 저처럼 탈북 해 와 있는 사람이 한 7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 그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확실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는 제가 모르는 것이고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상황만 말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사촌동생 김선일이 저희부대에서 군사복부를 7년이나 같이 했다. 이 사람이 80년도 10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는 소위계급장을 달고서 편제가 없는 작전참모부에 4급 작전 참모로 내려와 있었는데 7년을 같이 있었다. 그런데 광주문제는 81년 6월 정도부터 그 소리를 대대장과 김선일 두 사람 사이에 하는 이야기를 통해 듣기 시작했는데 그 대대장은 직접 나왔던 당사자고 김선일은 김정일이 사촌형이잖아요.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 아들인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왔고 그 다음에 김일성 교시나 김정일이 방침이나 광주문제를 부각시키는 발언들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없는 일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인민군 상상교육 하느라 없던 일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에 나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현재 살아있다. 3명이. 우리 대대 사람이 3명이 살아있는데 한 사람은 92년도에 제대를 했고 그리고 두 사람은 현재 현역으로 북한에 복무중이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장난이라고 볼 수 없다.
▲박화진: 그 이후에 특수부대출신으로 남한의 각계각층에 침투되어있다고 여기서 많이 추정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하나?
▲임천용: 글쎄 저는 보지 못해 장담은 못하지만 광주에 내려왔다가 돌아간 인원이 3 분의 1 정도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와서 많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대대에서 7명 나왔다가 4명 죽었다. 그 4명중 한사람이 여기서는 1. 21 사건이라 하는 청와대습격미수사건에 참가했다가 여기서 죽은 함장근 이라는 사람 친동생 함장관인데 그 사람이 바로 광주에 내려왔다가 여기서 죽었다.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있다. 그때 광주에 내려왔다가 3분의 2는 못 돌아갔는데 그 인원이 북쪽에서 추산하기로 그게 다 죽었겠느냐 부상당했거나 합류 못했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잠재세력이 여기 내부에 분명히 있을 것이고 최근 들어 평택시 사태 등을 볼 때 이것은 이곳의 민간주도는 아니다, 내부에 모종의 세력이 상당히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부로 보인다는 것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전시나 전시뿐만 아니라 어떤 내부적인 반란 내지 소요를 동원할 수 있는 북한의 계획된 인원들이 내려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도형: 광주에 온 것이 4-5백 명 된다고 했다. 그 중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도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한다면 나이로 봐서 그때 20대면 지금은 40대가 넘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도 좌익조직에 침투해가지고 활발히 활동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있다면 그 이후에 다시 남파해서 침투한 사람들이겠지?
▲임천용: 그러니까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분명히 여기서 전향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만약에 그때 여기에 침투했다가 귀대 귀환을 못하고 여기 살아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전향을 했다면 세상에 광주에 북한 특전무력 부대가 나왔던 당사자가 여기 살아있다고 인터뷰기사가 나왔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것은 어느 정권이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딘가 잠적해 있다고 봐야한다. 자기 정체를 안 내놓는다는 것은 분명히 저쪽 또는 누군가의 비호를 받고 밥을 먹는다는 소리다.
(중략)
▲이도형: 특수군단이 여기 공수 부대처럼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단에도 1개 대대씩 있다는 것인가?
▲임천용: 그렇다. 각 군단에 2개 여단이 있고 그 다음 각 사단 안에 1개 대대가 있다. 그것은 사단장 자기 작전범위 안에서 지휘하고 활용하는 특전부대다. 그런데 군단 내에 2개 여단씩 포진되어있는 특수여단이란 것은 우리가 하계나 동계훈련을 할 때 합동훈련을 많이 한다. 이들은 전시의 특전 무력이니까 이미 주어진 대상에 대한 임무가 할당 되어 있다. 특전사들은 고정된 임무가 없다. 그들의 규모나 범위나 실력이 대단한데 여기 남한에서는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박화진: 그런데 그 특전부대를 남한에서 실제로 써먹은 예가 있나?
▲임천용: 실제로 써먹은 예는 저는 직접 관련된 자는 아닙니다만 광주사건의 경우는 확실하다고 저는 인정한다.
▲이도형: 광주사태 때는 얼마나 투입이 되었나?
▲임천용: 그 때 우리 대대에서 저는 대대장 연락병을 하던 당시인데. 우리 대대에서 7명이 광주에 파견되어 갔었다. 그때 상황을 들어보면 특전부대 내에서 훈련이 잘된 사람들을 뽑아서 임시 단위를 구성해서 광주로 보낸 것이다.
▲이도형: 육지로 보냈나요? 아니면 배로 보냈나?
▲임천용: 아니에요. 제가 여기 와서 전두환 정권 때의 실세들도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했는데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하고 약 80%정도 맞는데 그때는 계엄령이 내려져서 육지는 전부 봉쇄되어있었고 그들은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광주에 그 사람들이 내려와서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한 무리는 진압군 쪽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그리고 절반쯤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도형: 7명인데 그들이 그랬단 말인가? 그리고 무기는 무엇이었나?
▲임천용: 아니지요. 우리 대대에서만 7명이 나왔다는 이야기이고 총체적으로 약 1개 대대가 내려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추산하면 한 4백50명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기는 잘 모르지만 그때 여기서 방산 업체 습격 같은 것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희도 사실 의문을 가졌던 것이 교도소는 봉기군이 교도소를 습격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습격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밑에 있었던 분들도 그러는데, 그 때 상황에서 여기 봉기군 능력으로 방산 업체나 그 밖의 국가 시설물을 습격한 사례나 교도소 습격한 사례, 탱크나 장갑차등 중장비를 탈취한 사례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런 능력이 봉기군에게 있었겠느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있어도 한두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적으로 무장봉기가 될 수 있었던 여건 면에서 볼 때 광주 땅에서는 기반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벼락같이 상황이 반전되고 무력 대 무력 대결로 나오니까 여기 사람들이 상당히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희가 북한에서 이런 자료가 있었는데 여기서 말을 한번 맞춰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압군 쪽은 백퍼센트 응사한 것이다. 증언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그때 사상자들을 병원에서 수습하고 치료한 내용을 분석한 것을 보면 뒤에서 맞아 사망하고 부상한 경우가 더 많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은 바가 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내려간 특수요원이 양쪽 진영에 포진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내부교란 내지 배후교란이다. 양쪽에서 소요를 일으켜 싸움을 붙이고 당사자들은 모르니까. 봉기군 쪽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은 혼란상황을 이용해서 사상자를 내고, 그러면 거기서 나는 사상자는 무조건 진압군 쪽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되니까, 문제는 북한 쪽에서 이렇게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다.
▲이도형: 광주사태 직후에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내가 잘 아는 장군으로 광주지구 계엄사령부 참모였던 사람인데 희생자들의 屍身彈痕(시신탄흔) 조사를 했다. 1백68구인가 조사했는데 그 당시 국군은 모두 M16을 갖고 있었다. 칼빈이나 M1은 그때 국군에게 없었다. 그런데 탄흔 조사를 하니까 약 3분의 2가 칼빈에 맞아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소위 봉기군, 시민군 그 사람들의 총격에 맞아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쏘아죽인 것이란 이야기가 된다. 아무튼 그것은 전후맥락을 다시 따져 봐야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북한이 광주에 커밋트(commit)했다는 사실이다.
▲임천용: 그거야 확실하다. 저 혼자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여기 내려와서 북한 통전부(통일전선부)에 있던 사람로부터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통전부 지하 자료실에 대남관련 자료들이 쭉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 한곳에 광주사태 관련 자료들도 전시되어있다. 그 사람은 당사자니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 밖에도 여기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 출신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들은 말을 섞어보면 이 사람이 실제로 특수부대 출신인지 금방 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특수부대 근처에서 군사 근무를 했거나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혹간 “나도 특수부대에 있었다”고 위장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가 분명한 특수부대면 만나서 말을 몇 마디 섞어보면 금방 상대한테서 답이 나온다. 이 사람은 무조건 특수부대다 아니다 하는 판단이 선다는 것이다.
▲박화진: 광주사태는 그렇고 그전이나 후에 다른 무슨 소요사태나 큰 데모가 벌어진 경우 일테면 89년 6월 10일 이른바 「6. 10항쟁」말인데. 그 결과 6 29선언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런 때는 침투한 예나 흔적이 없었나?
▲임천용: 나로서는 말할 내용이 아니라고 보는데, 김일성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회를 딱 세 번 놓쳤는데 아쉽다. 그러면서 광주가 참 아쉽다 그랬다고 한다.
▲이도형: 그런데 그것은 광주에 그렇게 조금 침투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로(전면적으로) 이용해서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는 그런 뜻이다.
▲임천용: 그렇다. 특히 그들은 광주에서 다른 도시로 4.19때처럼 번져나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쪽 개입이 이쪽에서 진압군?錤? 봉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중요 역할을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유독 광주에서만 지독했지 타 도시에서 거기에 호응할 움직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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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만약 광주사태에서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이 사실이라면, 가장 큰 의문은 북으로 도주하지 못하고 남한에 남아있는 북한 특수부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있다. 이들은 김정일의 대남공작에 도구이며 김정일이 불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면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하는 일종의 ‘총폭탄’이다. 그들의 총폭탄 정신은 김영삼 정부시절 북한 잠수정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들은 골방에서 밥만 먹을 것이 아니라 친북반미 시위에 가담하거나 배후조종을 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극렬 좌파의 시위때 마다 복면을 쓰고, 극렬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인명조차 경찰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평택 반미시위에서는 복면쓴 좌익들이 군대에서만 사용하는 군지도를 들고 돌아다녔고, 국군이 이들에게 2단 옆차기로 당했으나 배후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포스코 사태에서도, 반FTA 시위에서도 그렇게 당했다. 박근혜 테러의 배후도 공안당국이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은 올해 대선에서 분명히 개입하겠다고 누누이 경고한 바 있다. 이들의 활약이 건물의 방화, 관공서나 중요 건물의 폭파, 혹은 대선후보에 대한 테러 등 어떤 불법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도록 만반의 경계가 필요하다.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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