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와 쓰기 수업시간 발제지
-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비교를 중심으로 -
1. 서론
그동안 해방 전후사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그를 비판하며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해방 전후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해방 전후사의 연구 성과가 집약된 두 책을 서로 비교 ․ 대조해 봄으로써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도 해방 전후사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더욱 객관적이고 유익한 발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2.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을 둘러싼 논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독재가 판치던 시절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접근과 해석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책이 되었다. 그런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좌파성과 민족주의성이 지나치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탈(脫)『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선언한 『…재인식』은 출간 전부터 여러 언론에서 대서특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재인식』은 출간 직후부터 그 내용을 문제삼은 진보 학회의 거센 비판의 물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보 학회측은 『…재인식』의 내용에서 자주 드러나는 독재 정권에 대한 관대한 시각, 『…재인식』이 가진 아날학파적 요소의 비전문성, 반민족주의(혹은 탈민족주의)적인 서술 방식에서 야기되는 몇몇 기고자들의 제국주의 논리 수용과 논리적 비약은 ‘뉴 라이트 만의 재인식’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신구(新舊) 해전사’의 대립은 『…재인식』을 내면서 박지향 교수가 『…재인식』을 집필하고 난 후 인터뷰에서 “2004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동안 한국현대사에 대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는데도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철 지난 주장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주변 학자들에게 최신 연구성과를 한데 모으는 작업을 제의했고,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일을 시작했다.” 라는 발언으로 인해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번져 한동안 나라 한편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직도 사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 대립은 『…재인식』집필진들의 60년대 이후에 대한 서술 예고로 인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3.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의 역사인식 비교
(1) 분단 책임
인식: 신탁통치 방안을 논의하는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 ‘정읍발언’ 이야말로 분단의 실질적인 원인이자 출발점이다. 정읍 발언이 나온 2개월 뒤 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 등 북한의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취해졌다. 분단 고착의 1차 책임은 남한이다.
재인식: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시한다. 즉 8․ 15 해방 37일 만에 내려진 북한 단정 수립 지령은 이후 신탁통치 논쟁, 미소공위에 이르기까지 움직일 수 없는 ‘큰 틀’ 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러한 남북 재통합 논의와 노력은 처음부터 거품이 될 운명이었다.
(2) 한국전쟁 해석
인식: 한국전쟁 발발 과정에서 남침, 북침의 구분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그것은 “전쟁 이전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주로 전쟁 책임”을 어느 한 쪽에 지우려는 일방적 주장일 수 있다. 오히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단정 수립 이후 고착된 분단 속에서 통일 의지를 앞세운 김일성이 중심이 된 내전, 즉 시민전쟁으로 바라봐야 한다.
재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시각은 브루스 커밍스의 섣부른 해석의 틀을 빌려온 것이다. 커밍스 내전론의 핵심은 한국전쟁은 통일의지를 가진 김일성이 주도했고, 스탈린은 사전동의를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미국 견제를 목적으로 한 스탈린의 작품이다. 출발부터 국제전쟁의 성격을 가졌다.
(3) 이승만 평가
인식: 항일 태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외교 제일주의자였던 그의 대미 외교는 독립운동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국인보다 더 철저히 미국 이익을 대변했다. 남한 단정 수립에도 책임이 있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단독 정부의 필요성을 느꼈던 미국에 명분을 주었다. 또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을 반민주 ․ 외세의존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재인식: 목표를 위해 기회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한국의 마키아벨리’ 였다. 그의 목표는 북진통일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수입대체산업화 등이었다. 방위조약은 훗날 고도성장을 보장해 준 안보환경이었다. 그가 주도한 1950년대 역시 공과(功過)가 교차한다. 의회 및 정당정치를 시도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진보가 이뤄졌다.
(4) 김일성 평가
인식: 김일성 등이 해방 후 보여준 지도력은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성에 기초한다.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항일 투쟁의 정신은 개혁으로 이어졌다. 반제 ․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다. 1940년대 후반 사회 ․ 경제적 개혁으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가 무너졌다. 북한에는 민주기지가 창설됐다. ‘반봉건사회’ 남한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재인식: 해방 후 북한에선 새로운 인간과 낡은 인간의 경계가 명확했다. 혁명은 ‘신인간’ 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동원을 위한 기획이었고, 광기의 시대였다. 김일성 수령 체제는 천황제 국가 체제와 닮은꼴이다. 북한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유격대 국가였다. 즉 해방이 동원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강요된 자발성의 사회였다.
(5) 일제 잔재 청산
인식: 북한 정권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를 통해 친일과 숙청 등 일제 잔재 청산을 성공리에 완수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소극적 태도와 반민특위 활동 좌절 등으로 친일세력을 뿌리뽑지 못함으로써 과거 청산에 실패했다.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는 ‘부끄러운 역사’ 의 연속이었다.
재인식: 남북한 모두 해방 후 식민지 시대와의 연속성이 계속되었다. 북한이 남한보다 식민지 잔재를 효과적으로 처리했는지는 아직 논쟁거리다. 남한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구축했던 전시경제체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성큼 넘어간 데 비해, 북한은 오히려 이런 전시체제를 계승해 ‘거대한 동원체제’ 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6) 농지개혁
인식: 북한과 달리 남한의 농지개혁은 ‘농민을 위한 개혁’ 과 거리가 멀었다. 자주 세력이 개혁 추진 과정에 깊이 관여한 반면, 농민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농민들은 현물 상환 부담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계속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작농이나 영세자작농이 양산되었다. 결국 농가 경제 자립 등 애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재인식: 지주제 해체, 자작농의 토지 소유 등에 이뤄졌다. 영세자작농의 양산은 농지개혁제도 자체의 한계로만 볼 수는 없다. 일제시대에 비하면 농가 수지 개선 등 전반적 상황이 호전됐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지지층으로 흡수됐다. 한국전쟁 당시 이들이 북한에 호응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7) 이광수 등 친일파 평가
인식: 대표적 친일 지식인 이광수는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국민복 차림으로 황민정신을 부르짖었다. 도쿄에 건너가서는 조선 유학생들에게 학생 지원을 선동했다. 이광수 뿐만이 아니라 일제시대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역량을 친일 대 반일, 혹은 애국 대 매국의 이분법 속에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반면 민중은 수탈과 핍박의 대상으로 묘사했다.
재인식: 이광수 같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자기 출세와 영달을 위해 배신의 길을 걸었을까? 내면에는 조선이 거듭나기를 간구(干求)하는 민족주의를 품고 있었다. 이광수는 ‘친일 내셔널리스트’ 인 셈이다. 『…재인식』은 일제시대 지식인과 민중을 친일 대 반일의 이분법 속에 칼처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4.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의 역사인식에 대한 평가
앞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의 세부적인 내용 비교를 해 보았다면, 이번에는 보다 개괄적인 평가를 해 보고자 한다. 이 두 책의 본질적인 차이는 앞서 한 방식의 비교 보다는, 각각의 책에 대한 논지 비판을 하는 과정에서 더 잘 드러난다. 특히『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해방 직후 미 ․ 소 본토와 세계의 정세의 서술에 너무 소홀한 측면이 있고, 분단의 탓을 남한과 이승만에게 몰아붙이는 한편 공산당 및 남로당의 행동은 지나치게 변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는 점 등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재인식』은 반민족주의 문명사관, 식민지 경제의 착취성 판정 여부, 친일파 재해석 등에서 논리적 허점이 드러난다. 이중에서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문명사관’ 을 짚어보자면,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는 실제로는 전통과의 상호작용이었으며 진정한 융합 과정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융합 과정이었다. … 갑작스레 해방이 찾아왔을때, 그토록 동화의 깃발이 높이 걸려 있었건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고 일본인들은 황급히 철수했다.
와 같은 억지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문명의 융화라는 허울로 제국주의에 순종하는 그의 의견에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 발표문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에 대한 객관적인 비교와 대조를 중점으로 삼고 있으나, 이러한 결함에 대해서는 반드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거리는 그렇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첫 번째로는 논점이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라 하더라도 『해방 전후사의 인식』측 에서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가졌던 친미적, 사대주의 외교적 사상과 해방 후에 벌인 일들에 속하는 반민특위 활동 방해, 토지개혁의 실패, 남북이 분단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분열주의적 면모에 중점을 둔 반면,『…재인식』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주로 1950년대 한미 동맹 협상 사이에서 생존 외교를 통해 미국을 한국에 계속 붙잡아 두어, 그 당시 한국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적 안보를 확립했다는 점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민족주의적, 진보 좌파적인 시각에서 쓰인 책이고,『…재인식』은 탈민족주의적, 우파적 시각에서 쓰여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로는 『…재인식』의 성향의 모호성에 있다. 『…재인식』을 모두 읽어본 결과 『…재인식』은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 쓰여지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그 성향이 매우 모호하여, 내용 곳곳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내용과 비슷하거나, 그를 보충 설명 하는듯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5. 결론
앞서 보았듯이 두 서적간의 엄청난 괴리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좌편향으로, 『…재인식』을 우편향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언론을 통해 살펴본 이 두 서적간의 비교는 해방 전후사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어주기 쉬우나, 『…재인식』에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흔적이 담겨있고, 그에 대한 보완의 노력을 어느정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재인식』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어느정도 계승 ․ 보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에서 보이는 차이와 그로 인한 대립은, 격동의 시기인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좌파와 우파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알수있게 해준다. 어느 한편이 단절된 역사 인식으로 몇 번을 인식하고 재인식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또 다른 대립만 낳을 뿐이다. 동북 아시아의 잊혀진 국가에서, 세계 열강과 이념의 각축장이 되는 동안에 있었던 얽히고설킨 역사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금까지 벌어진 좌우간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어느 한 측면에 편중되지 않은 보다 건설적인 해방 전후사에 대한 체계 정립이 필요하다. 『…재인식』이 출간된 이후 점차 학술적인 열기를 더해가는 분위기이긴 하나, 여전히 사학계에서는 연구가 부족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사학도들의 많은 관심을 촉구한다.
* 참고문헌 *
1. 송건호, 진덕규, 김학준,『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2004.
2.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3. 배영대,「해방전후사의 인식 뒤집는 재인식 나왔다」,『중앙일보』, 2006. 2. 1.
4. 백 일,「역사를 정치적 편가르기에 이용 말라」,『한겨레』, 2006. 2. 24.
출처: 이성복(sungbok.com), 조유재 공저
-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비교를 중심으로 -
1. 서론
그동안 해방 전후사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그를 비판하며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해방 전후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해방 전후사의 연구 성과가 집약된 두 책을 서로 비교 ․ 대조해 봄으로써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도 해방 전후사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더욱 객관적이고 유익한 발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2.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을 둘러싼 논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독재가 판치던 시절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접근과 해석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책이 되었다. 그런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좌파성과 민족주의성이 지나치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탈(脫)『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선언한 『…재인식』은 출간 전부터 여러 언론에서 대서특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재인식』은 출간 직후부터 그 내용을 문제삼은 진보 학회의 거센 비판의 물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보 학회측은 『…재인식』의 내용에서 자주 드러나는 독재 정권에 대한 관대한 시각, 『…재인식』이 가진 아날학파적 요소의 비전문성, 반민족주의(혹은 탈민족주의)적인 서술 방식에서 야기되는 몇몇 기고자들의 제국주의 논리 수용과 논리적 비약은 ‘뉴 라이트 만의 재인식’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신구(新舊) 해전사’의 대립은 『…재인식』을 내면서 박지향 교수가 『…재인식』을 집필하고 난 후 인터뷰에서 “2004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동안 한국현대사에 대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는데도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철 지난 주장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주변 학자들에게 최신 연구성과를 한데 모으는 작업을 제의했고,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일을 시작했다.” 라는 발언으로 인해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번져 한동안 나라 한편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직도 사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 대립은 『…재인식』집필진들의 60년대 이후에 대한 서술 예고로 인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3.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의 역사인식 비교
(1) 분단 책임
인식: 신탁통치 방안을 논의하는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 ‘정읍발언’ 이야말로 분단의 실질적인 원인이자 출발점이다. 정읍 발언이 나온 2개월 뒤 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 등 북한의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취해졌다. 분단 고착의 1차 책임은 남한이다.
재인식: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시한다. 즉 8․ 15 해방 37일 만에 내려진 북한 단정 수립 지령은 이후 신탁통치 논쟁, 미소공위에 이르기까지 움직일 수 없는 ‘큰 틀’ 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러한 남북 재통합 논의와 노력은 처음부터 거품이 될 운명이었다.
(2) 한국전쟁 해석
인식: 한국전쟁 발발 과정에서 남침, 북침의 구분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그것은 “전쟁 이전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주로 전쟁 책임”을 어느 한 쪽에 지우려는 일방적 주장일 수 있다. 오히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단정 수립 이후 고착된 분단 속에서 통일 의지를 앞세운 김일성이 중심이 된 내전, 즉 시민전쟁으로 바라봐야 한다.
재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시각은 브루스 커밍스의 섣부른 해석의 틀을 빌려온 것이다. 커밍스 내전론의 핵심은 한국전쟁은 통일의지를 가진 김일성이 주도했고, 스탈린은 사전동의를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미국 견제를 목적으로 한 스탈린의 작품이다. 출발부터 국제전쟁의 성격을 가졌다.
(3) 이승만 평가
인식: 항일 태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외교 제일주의자였던 그의 대미 외교는 독립운동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국인보다 더 철저히 미국 이익을 대변했다. 남한 단정 수립에도 책임이 있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단독 정부의 필요성을 느꼈던 미국에 명분을 주었다. 또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을 반민주 ․ 외세의존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재인식: 목표를 위해 기회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한국의 마키아벨리’ 였다. 그의 목표는 북진통일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수입대체산업화 등이었다. 방위조약은 훗날 고도성장을 보장해 준 안보환경이었다. 그가 주도한 1950년대 역시 공과(功過)가 교차한다. 의회 및 정당정치를 시도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진보가 이뤄졌다.
(4) 김일성 평가
인식: 김일성 등이 해방 후 보여준 지도력은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성에 기초한다.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항일 투쟁의 정신은 개혁으로 이어졌다. 반제 ․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다. 1940년대 후반 사회 ․ 경제적 개혁으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가 무너졌다. 북한에는 민주기지가 창설됐다. ‘반봉건사회’ 남한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재인식: 해방 후 북한에선 새로운 인간과 낡은 인간의 경계가 명확했다. 혁명은 ‘신인간’ 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동원을 위한 기획이었고, 광기의 시대였다. 김일성 수령 체제는 천황제 국가 체제와 닮은꼴이다. 북한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유격대 국가였다. 즉 해방이 동원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강요된 자발성의 사회였다.
(5) 일제 잔재 청산
인식: 북한 정권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를 통해 친일과 숙청 등 일제 잔재 청산을 성공리에 완수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소극적 태도와 반민특위 활동 좌절 등으로 친일세력을 뿌리뽑지 못함으로써 과거 청산에 실패했다.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는 ‘부끄러운 역사’ 의 연속이었다.
재인식: 남북한 모두 해방 후 식민지 시대와의 연속성이 계속되었다. 북한이 남한보다 식민지 잔재를 효과적으로 처리했는지는 아직 논쟁거리다. 남한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구축했던 전시경제체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성큼 넘어간 데 비해, 북한은 오히려 이런 전시체제를 계승해 ‘거대한 동원체제’ 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6) 농지개혁
인식: 북한과 달리 남한의 농지개혁은 ‘농민을 위한 개혁’ 과 거리가 멀었다. 자주 세력이 개혁 추진 과정에 깊이 관여한 반면, 농민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농민들은 현물 상환 부담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계속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작농이나 영세자작농이 양산되었다. 결국 농가 경제 자립 등 애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재인식: 지주제 해체, 자작농의 토지 소유 등에 이뤄졌다. 영세자작농의 양산은 농지개혁제도 자체의 한계로만 볼 수는 없다. 일제시대에 비하면 농가 수지 개선 등 전반적 상황이 호전됐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지지층으로 흡수됐다. 한국전쟁 당시 이들이 북한에 호응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7) 이광수 등 친일파 평가
인식: 대표적 친일 지식인 이광수는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국민복 차림으로 황민정신을 부르짖었다. 도쿄에 건너가서는 조선 유학생들에게 학생 지원을 선동했다. 이광수 뿐만이 아니라 일제시대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역량을 친일 대 반일, 혹은 애국 대 매국의 이분법 속에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반면 민중은 수탈과 핍박의 대상으로 묘사했다.
재인식: 이광수 같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자기 출세와 영달을 위해 배신의 길을 걸었을까? 내면에는 조선이 거듭나기를 간구(干求)하는 민족주의를 품고 있었다. 이광수는 ‘친일 내셔널리스트’ 인 셈이다. 『…재인식』은 일제시대 지식인과 민중을 친일 대 반일의 이분법 속에 칼처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4.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의 역사인식에 대한 평가
앞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의 세부적인 내용 비교를 해 보았다면, 이번에는 보다 개괄적인 평가를 해 보고자 한다. 이 두 책의 본질적인 차이는 앞서 한 방식의 비교 보다는, 각각의 책에 대한 논지 비판을 하는 과정에서 더 잘 드러난다. 특히『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해방 직후 미 ․ 소 본토와 세계의 정세의 서술에 너무 소홀한 측면이 있고, 분단의 탓을 남한과 이승만에게 몰아붙이는 한편 공산당 및 남로당의 행동은 지나치게 변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는 점 등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재인식』은 반민족주의 문명사관, 식민지 경제의 착취성 판정 여부, 친일파 재해석 등에서 논리적 허점이 드러난다. 이중에서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문명사관’ 을 짚어보자면,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는 실제로는 전통과의 상호작용이었으며 진정한 융합 과정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융합 과정이었다. … 갑작스레 해방이 찾아왔을때, 그토록 동화의 깃발이 높이 걸려 있었건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고 일본인들은 황급히 철수했다.
와 같은 억지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문명의 융화라는 허울로 제국주의에 순종하는 그의 의견에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 발표문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재인식』에 대한 객관적인 비교와 대조를 중점으로 삼고 있으나, 이러한 결함에 대해서는 반드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거리는 그렇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첫 번째로는 논점이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라 하더라도 『해방 전후사의 인식』측 에서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가졌던 친미적, 사대주의 외교적 사상과 해방 후에 벌인 일들에 속하는 반민특위 활동 방해, 토지개혁의 실패, 남북이 분단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분열주의적 면모에 중점을 둔 반면,『…재인식』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주로 1950년대 한미 동맹 협상 사이에서 생존 외교를 통해 미국을 한국에 계속 붙잡아 두어, 그 당시 한국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적 안보를 확립했다는 점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민족주의적, 진보 좌파적인 시각에서 쓰인 책이고,『…재인식』은 탈민족주의적, 우파적 시각에서 쓰여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로는 『…재인식』의 성향의 모호성에 있다. 『…재인식』을 모두 읽어본 결과 『…재인식』은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 쓰여지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그 성향이 매우 모호하여, 내용 곳곳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내용과 비슷하거나, 그를 보충 설명 하는듯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5. 결론
앞서 보았듯이 두 서적간의 엄청난 괴리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좌편향으로, 『…재인식』을 우편향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언론을 통해 살펴본 이 두 서적간의 비교는 해방 전후사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어주기 쉬우나, 『…재인식』에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흔적이 담겨있고, 그에 대한 보완의 노력을 어느정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재인식』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어느정도 계승 ․ 보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에서 보이는 차이와 그로 인한 대립은, 격동의 시기인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좌파와 우파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알수있게 해준다. 어느 한편이 단절된 역사 인식으로 몇 번을 인식하고 재인식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또 다른 대립만 낳을 뿐이다. 동북 아시아의 잊혀진 국가에서, 세계 열강과 이념의 각축장이 되는 동안에 있었던 얽히고설킨 역사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금까지 벌어진 좌우간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어느 한 측면에 편중되지 않은 보다 건설적인 해방 전후사에 대한 체계 정립이 필요하다. 『…재인식』이 출간된 이후 점차 학술적인 열기를 더해가는 분위기이긴 하나, 여전히 사학계에서는 연구가 부족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사학도들의 많은 관심을 촉구한다.
* 참고문헌 *
1. 송건호, 진덕규, 김학준,『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2004.
2.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3. 배영대,「해방전후사의 인식 뒤집는 재인식 나왔다」,『중앙일보』, 2006. 2. 1.
4. 백 일,「역사를 정치적 편가르기에 이용 말라」,『한겨레』, 2006. 2. 24.
출처: 이성복(sungbok.com), 조유재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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