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역사를 보지마시고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침례교회(교단) 소속이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재침례교도에 대하여 ...
Ⅰ. 서 론
새 천년을 준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와 비전으로 이 시대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우리들은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예를 제시한다면 우리들의 역사의 뿌리에 대한 관심과 긍지와 자부심의 결여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도로서 학문을 연구할 때, 많은 침신의 학우들의 고민중의 하나가 "침례교는 신학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침례교도라면 어느 때부터 누구로부터 침례교도라는 이름이 생겨나고, 또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침례교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본 논고에서는 최초의 재침례교도들은 누구이며, 이들이 주장했던 내용은 어떤 것이기에 수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해야만했는가? 그리고 이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쳐는 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우리는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최초의 침례교도가 누구이며, 이들이 순교를 각오하며 믿었던 신조는 무엇이며, 이들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다.
1. 최초의 재침례교도는 누구인가?
최초의 재침례교도는 누구였는가에 대한 질문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오늘날에는 스위스 형제들 기원론이 일반론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이 최초의 재침례교도로 보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살펴보자.
1525년 1월 25일 10여명의 사람들이 그로스 뮌스터 가까이에 있는 펠릭스 만츠(Felix Manz)의 집에 모였다. 이 모임에 대해서 윌리암 에스텝(Willam R. Estep)은 {후터파 형제단의 연대기}(The Laege Chronicle of the Hutterian Brethren)에 이 사실이 잘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제콥 가문의 게오르게(George of the House of Jacob)는 일어서서 콘라트 그레벨에게 자신의 믿음과 지식에 근거한 참된 그리스도교의 침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가 이러한 간청을 하며 침례 받을 의향을 갖고 무릎을 꿇자 콘라트는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는 이 기록은 목격자의 증언을 담고 있으며 아마도 그는 최근에 후르에서 츄리히로 온 사제 게오르게 블라우로크(George Blaurock)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계속해서 재침례교도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레벨이 직접 침례를 베푼 후에 블라우로크(Blaurock)는 그곳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침례를 주었다. 그러자 새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며, 복음을 가르치며 믿음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자신들이 몸소 서약을 하였다. 재침례교도가 출생된 것이다. 이 첫 번째 침례와 더불어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의 초기 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면 최초의 재침례교도인 콘라드 그라벨은 누구인가? 그는 쮸리히 시의회 의원 중의 한 사람인 야곱 글레벨의 육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콘라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고대어와 고전문학에 접할 수가 있었다. 라틴 문학, 논리학, 변증, 전례음악을 유년기에 공부하고 16세에 집을 떠나 바젤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인문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바젤에는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자리하고 있어서 그레벨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기었으며, 이후 콘라드는 인문주의에 심취하고 그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콘라드의 수학 여정은 파리로 이어지나 끝을 맺지 못하고 쮸리히로 돌아와 당시 쮸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Ulric Zwingle)를 도와 개혁의 완성을 시도했으나 쯔빙글리의 보수적 회귀로 결국 이들은 갈라서게 되고 끝내는 쯔빙글리가 콘라드를 중심으로한 종교 개혁자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쯔빙글리 그리고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즉각 위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1500년 당시에 있어서 이단은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계속되는 저항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였고, 대가를 치르는 재침례교도들의 행렬은 참으로 기나긴 것이었다.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한 사람들, 물에 빠뜨려 죽은 사람들, 목이 베임을 당한 사람들, 처참한 감옥 내에서 연명해야 했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의 의미를 배워야만 했다. 따라서 16세기 세계의 안목에서 볼 때에 그들이 영웅적인 순교는 재침례교도들의 충성의 상징이며, 마크(hallmark)가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들이 따를 것을 알면서도 이들이 결별을 해야만했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그 신앙적 동기는 무엇인가?
2. 재침례교도의 신조
쯔빙글리의 개혁의 중도 포기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스위스 형제들의 지속적인 개혁의 주장 간의 갈등 문제로 인해서 이들은 결별을 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현상 유지를 통한 기득권 확보를 노렸고, 이에 반해 최초의 재침례교도들은 처음 개혁 운동이 시작했던 것처럼 신약 성서적인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제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처음 쯔빙글리는 "백성들의 사제"였으나 그는 마침내 백성들이 편에 서기보다는 시의회와 국가의 편에 서서 "교회"의 순수성을 포기하고 말았을 대 콘라드 그레벨과 스위스 형제들은 쯔빙글리와 결별하고 그리스도와 사도의 길을 통한 교회 회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좀더 자세히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취리히 도시국가에서는 다른 기독교 세계와 마찬가지로 새로 태어난 아기는 당연하게 침례를 받았으며, 교회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교회와 사회는 일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교회는 이곳 주민 모두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경위 교회는 주님을 위해 살고 그 목숨을 바치기로 결단한 소수의 진정한 신자들만의 집단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레벨과 만쯔가 취리히에 세우고자 했던 교회의 모습이었다. 즉 진정한 제자들로만 구성된 교회, 국가로부터 자유스러운 교회였다. 바로 이처럼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침례를 베푸는 것이 그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혁명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도시 당국자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있었다.
결국 1525년 쯔빙글리는 그들과 공개토론을 한 끝에 그들의 주장이 잘못됨을 지적하고 시정부로 하여 유아 세례령을 내리게 하고 재 침례를 받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경고하였다. 그레벨과 스위스의 형제들 곧 최초의 재침례교도들은 이렇게 해서 긴긴 박해 생활의 시초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신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527년 재침례교도들은 슐라이트하임(오늘날 독일-스위스 국경지방 사프하우젠 근처)에서 모였다. 이 모임을 일명 "형제 연합(Brotherly Union)"이라고도 한다. 이 모임을 주도한 인물은 베네딕트파 수사 출신이었던 미카엘 자틀러(Michael Sattle)주도하에 신조문이 채택되었다. 이 신조문을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이라고 부른다. 그후 10년내에 유럽 전역의 재침례교도는 대부분 이 내용에 합의하였다.
이들의 신조의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제자도"이다.
이 제자도는 한 재침례교도가 말한 것에서 그 성격을 잘알 수 있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롤 쫓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알 수 없다". 이는 곧 "그의 말씀은 진리요, 그의 명령은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아들의 빛나고 확실한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가 내부적 경험이나 신조의수용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야 하며,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이 신자의 변화된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침례교도에게는 완전 순수한 진리 외에는 타협이나 합리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랑의 원칙이다.
이들은 비재침례교도들과의 관계에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며, 박해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않았으며, 국가의 강제적 성격을 띤 행위들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랑의 윤리는 서로 돕고, 부를 재분배하는 형태로 재침례교도 내에서 표현되었다. 이 사랑의 윤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자들의 신앙의 열매로서의 선행 행위인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가 현재 교회 권위에 관한 "회중주의적 이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재침례교도는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기초하여 침례 받은 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각 신자는 동료 신자들을 위한 제사장이었으며, 불신자들을 향해서 선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교회 문제에 관한 결정은 회중 전체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교리 문제는 교의적 전통이나 교회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해석에 의거하여 결정하였다. 성경해석은 회중 전체의 모임에서 이들의 의견의 일치를 쫓았다. 교회내 치리문제도 회중 공동의 결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기들이 침례 받을 때 약속하였던 사항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공동으로 돕고 서로 감시까지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철저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 할 수 있다.
재침례교도의 생각에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국가가 "무력을 동원하여 복음을 대변하는 행위는" 명백한 월권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교회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를 여겼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순례자들이며, 그의 교회는 이러한 나그네들의 이 세상에서의 영속적인 행진이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를 분리함으로써 재침례교도는 현대에서 최초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인물들이 되었다. 국가의 간섭이나 도움이나 박해 없이 자기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인물들과 한데 모여 예배드릴 권리야말로 기본적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신약성서의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확신 즉 신자의 침례, 양심의 자유, 국가 교회의 부정은 모든 진정한 재침례교도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기타의 교리들을 세움에 있어서는 재침례파들은 폭넓은 다양성을 보이며, 그들의 신앙의 잘못된 열성들 때문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기기도 했다. 그래벨이나 발타자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그리고 펠릭 만쯔(Felix Manz)와 같은 몇몇 재침례교도들은 강력한 성서적 문자주의를 나타내 보였다. 또한 멜키올 호프만(Melchior Hoffman)과 잔 마티스(Jan Matthys)와 같은 몇몇 사람은 당시 보헤미아와 독일에 성행했던 강경하며 때로는 격한 중세기의 지복천년설에 대한 고집을 나타내 보였다. 이 소수의 과격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하는 가운데서 시도했던 광신적인 방법을 통하여 전체 재림파의 운동에 수치를 안겨 주었다. 그들은 순간적이었으나마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실패로 말미암아 "재침례파"란 이름은 약 1536년 이후로는 완전히 명예롭지 못한 이름이 되어버렸으며, 그래서 "멘노파(Mennonite)"라는 하나의 새로운 이름이 그들의 뛰어난 지도자의 이름에서 채택되어진 것이다.
유럽인들은 "재침례교도"라는 말만 들으면 뮌스터 반란 사건을 연상하였다. 즉 폭도들의 광태와 재침례교도가 사실과는 다르게도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재침례교도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인식이 필요하다.
3. 재침례교도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
허 긴교수는 "2000년의 그리스도교회 역사상 가장 잘못 인식되어 왔으며, 잘못 취급되어져 왔고 잘못 기록되어져 온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재침례교도"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에스텝 교수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16세기의 재침례교도와 간치 부당한 평가를 받은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완전한 오해와 고의적인 오도에 의한 것이며, 도한 철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 소수의 정당한 역사가들을 제외하고는 4세기 동안이나 거의 모든 역사가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와 멸시가 오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525년의 농민전쟁의 주모자인 토머스 뮌쩌의 거짓된 주장과 멜키올 호프만과 잔 미티스의 주도하에 농민전쟁 10년 후에 일어난 뮌스터 반란(M nster Rebellion)의 차마 이 두 가지 사건이었다. 카톨릭교의 도시인 뮌스터에 지상천년왕국을 건설 하려고 시도한 그 환상가들의 엄청난 잔악성과 파괴의 수라장은 전 유럽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반란의 성공적인 진압은 곧 전 유럽에 대하여 재침례교인은 마치 뮌스터의 광신자들처럼, 법과 질서에 대한 하나의 잠재적 위협이라는 근거에서 재침례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는 전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이 진압되기 전에도 수많은 잔악한 행위들이 종교의 이름 하에서 자행되었다. 16세기의 이러한 심각한 오해는 그 참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내용들이 오랫동안 과장되어져 지금까지 내려왔다. 따라서 재침례교도는 광신자 또는 볼쉐비키(Bolsheviki)와 동일한 용어가 되고 말았으며, "종교개혁의 서자"로 취급받게 되었다.
샤프(Philip Schaff)는 재침례교도를 가르켜 '과격한 복음주의자들'이며 '극단의 프로 테스탄트'라고 부른다.
또한 재침례교도의 개혁운동의 본질은 때때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신령주의자', '이성주의자,' '종교적인 자유사상가'들과 명백한 구별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교도들은 시종일과 "쯔비카우(Zwikau) 예언운동"과 토마스 뮌쩌와 같은 과격한 신령주의자들을 스위스 형제단과 결합하여 취급하였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이들을 이성주의자와 종교적 자유 사상가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고의적이든지 아니든 지간에 이러한 부주의한 취급은 재침례교도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역사가 그들을 정당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더욱더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관심과 연구를 통해서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앙운동은 당시 카톨릭 세력과 종교개혁자들이 가혹한 박해로 대치하지 않으며 안될 정도의 영향력 있는 운동이었으며, 후대의 학자들이 이들을 "관제"(magestreate) 종교개혁에 대한 "근원적"(radical)개혁자들로든 혹은 "교회"형태에 대응하는 "분파"(sect)형태로든 카톨릭과 종교개혁 세력 이외에 제3의 운동으로 범주화시켜 종교개혁사를 기술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교회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Ⅲ. 결 론.
16세기의 종교적 격동의 시대의 기류에 흔들리지 않고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성경만을 푯대로 삼고 살아갔던 이 신앙의 영웅들의 삶은 역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순수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부르짖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유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었으며, 집단적으로 국가로부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간직해 온 자유와 평등, 형제애와 공동체 정신,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십자가를 지는 태도, 뜨거운 선교 열정 등은 비록 역사 속에서 약화될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그러한 신앙의 이념과 정신 그리고 삶 자체를 무시하고서는 오늘 우리를 침례교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침례교도가 됨은 그러한 역사 지평의 한쪽 끝에 서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침례교도들이 그들의 생활 속에서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을 재현 할 책임을 주장함에 있어서 엄숙하고 무서운 열성을 그들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순수한 신앙의 정예들이 되어야겠다. 또한 재침례교도들은 "억눌려"있지 않으면 "숨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의를 파악하기보다는 언제든지 그들을 억누르고 있거나 그들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된 자료들만이 유효한 것이 문제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침례교도들의 운동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침례교도로서 침례교운동에 관한 역사적 탐구는 표면적 사실에 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내면적 의미에 관한 연구가 심도 있게 다루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참 고 문 헌
1. 김의환.「기독교회사」. 성광문화사, 1958, 5판.
2. 최봉기. "재침례교회와 침례교회와의 관계(Ⅰ)." 「뱁티스트」. 1995, 20호.
3. Bruce Shelley.「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박희석 역.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4. Robert A. Baker.「침례교회발전사」. 허 긴 역. 침례출판사, 1989. 4판.
5. Robert G. Torbet.「침례교회사」. 허 긴 역.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4판
6. Willam R. Estep.「재침례교도의 역사」. 정수영 역. 요단출판사, 1993. 5판.
[출처] 재침례교도에 대하여|작성자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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