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청년의 때 / 존 칼빈

baromi 2009. 4. 6. 16:46

청년의 때

 

 

 

1. 도입: 왜 뻔한 말씀을 주시는가 - 무딘 영과 더딘 실천
지난 주일 우리는 본 시편의 논지가 무엇인지, 그 용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밝혔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가장 큰 애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확신하도록 부추김을 받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탁월한 다윗도 이것을 배워야 했다면, 아직도 이렇게 무지하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학교에서 유익을 얻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우리는 더 더욱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냉담한지, 나귀처럼 자극 받지 않고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다윗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그의 율법과 성경 전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듣는 일에 전념할 경우, 이 지속적 연구에서 무슨 유익과 이득을 얻는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할 것인가 주의 말씀을 따라 주의할 것이다,” 또는 “주의 보호 가운데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규정된 대로 순수하고 단순하게 우리의 삶을 정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길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각에 기대를 걸어서도 안되며,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만들어도 안되고,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단순히 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의 모든 지혜와 그들의 삶의 모든 완전함은 하나님을 좇고 그의 뜻에 맡기는 것이라는 게 다윗의 논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얼핏 보기에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 상식적인 게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누구며,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고백으로 말하면 충분히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 기록된 것을 확신하는 자는 얼마나 적습니까? 아니면 설령 우리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실천은 어떻습니까? 실천하는 자들은 매우 적잖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규칙은 우리의 삶을 그의 말씀에 따라 교정하는 것이요,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며 우리가 길을 잃고 어떤 길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반대 같지만 말입니다.

 

2. 왜 하필 청년인가
하지만 왜 여기서 특별히 청년이 언급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의 율법을 큰 자나 작은 자, 노인이나 젊은이 모두에게 주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유년 시절부터 무덤에 이를 때까지 계속 배워야 하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윗은 이 율법의 가르침을 청년에게 제한하고 있습니까? 물론 이 가르침이 노인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가장 고삐 풀린 때
우리는 끓어 넘치는 젊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사람들에겐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붙들어 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있는 이처럼 끓어 넘치는 감정을 제거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처방이 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지적합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실로 젊은이들은 길들일 수 없는 야수처럼 길을 잃으며,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어 끝도 없고 고삐로 묶어 둘 수도 없어, 잡았다 싶으면 빠져나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따른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확실히 잘 길들여질 것이다. 비록 그들의 열정이 넘쳐 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정에서 절제(modestie)도 보이며, 평온하고 온유한 태도도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안에서 그들의 모든 악을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과도한 정열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2) 한시라도 빨리 말씀으로 살아야
둘째 이유는, 젊은이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말씀으로 돌보심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너무도 악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들은 본성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신중하지 않을수록 더욱 쉽게 악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이 필요성으로 경고하여 그들이 더욱 주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요컨대) 그는 우리가 그의 뜻에 따라 교육받기를 원한다면, 일찍부터 하나님의 학생이 되기 시작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한 말을 알고 있습니다. 즉 덧없는 노년의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기 위해 육체에 속한 것을 잘라 내고 깨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1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각과 분별력을 주신 때부터 즉시 시작합시다. 그리고 이것을 끝까지 지속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교훈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는 물론 모든 시대에 군림했던 온갖 지나친 일들과 방종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때[하나님께 순종할 때]라야 우리에게 선한 질서를 유지시켜 주기에 충분한 고삐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에 담겨 있는 가르침에 굴복되기를 허용한다는 조건하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진해서 하나님의 편에 가담하는 이 겸손을 갖는다면, 바랄 수 있는 최상으로 세워진 모습들, 곧 천사의 질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세상은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대로 순종하려 하지 않으며 이런 도리(raison)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세상일이 이토록 꼬여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만일 우리가 그의 말씀을 좇는다면 만사가 형통하며 우리의 길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우리의 삶에 진정한 완전함이 있으리라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의 율법을 증거하실 때, 사람들은 그들을 선하게 인도하시려고 했던 하나님을 배반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분명 모든 입은 닫히고 그들은 파멸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 다른 이유입니다.

 

나아가, 만일 너무나 패역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탐욕이 마치 야수와 같고, 그래서 우리 힘으로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신과 연합시키기 위해 그의 말씀에 힘을 주시리라는 것을 압시다. 물론 우리가 이 목적을 지향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이미 내가 밝힌 대로) 분명 이미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없는 보다 과도하고 넘치는 청년기의 부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큰 자나 작은 자 모두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예를 드린다는 조건하에,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다는 조건하에, 그들의 성향과 그들의 방종한 탐욕을 제거하는 데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내가 이미 언급한 권면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다윗이 여기서 사람들에게 지적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일찍부터 하나님의 학생이 되어 그의 지배를 받기를 시작해야 하며, 그의 전생애 동안 이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지혜자가 되기 위해 무덤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이는 “틈 있을 때 회개하러 오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낄낄대는 익살꾼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오직 선한 갈망만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내를 멋대로 남용하는 데로 밀어 부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처럼 미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3) 절제야말로 참 지혜
이제 우리가 청년 시절부터 하나님의 학생이라고 여기에 기록된 말씀을 좇읍시다. 무엇보다도, 이미 언급했듯이,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교훈이 여기에 주어진다는 것에 유의합시다. 사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보다도 그들에게 더욱 바짝 죈 고삐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어리석고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물론 나는 오랜 경험이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 제법 진중함을 보이는 노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이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매함과 무지투성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다윗이 다른 구절에서 한 고백을 듣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성도 아무런 신중함도 없는 소와 길 잃은 짐승과도 같다고 말합니다.2 그토록 탁월한 선지자였던 그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노인들도 하나님의 지혜의 학교에서 많은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내가 이미 밝힌 대로, 이 시기가 어느 때보다도 무분별한 시기이며, 많은 이들이 사탄과 육체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젊은이들이 아무런 판단이나 신중함도 없으며 이처럼 그들의 엄청난 열기를 품어낼 뿐입니다. 더군다나 절제를 갖거나 남이 해주는 훈계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누군가 그들을 책망하고 비난할 경우, 당연히 화를 낼 이유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오만하고 더 반항적으로 나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도로 방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절제야말로 젊음이 갖는 올바른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노인들에게 있는 것과 같은 신중함과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노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과, 자신들의 망상과 자신들의 지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젊은이에게 있어야 할 으뜸가는 지혜입니다.

 

3. 왜 삼가고 깨끗케 해야 하는가 - 훈계는 곧 심판의 경고이기에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날 젊은이들은 끝까지 뻔뻔스럽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세상이 거의 완전히 절망적이며 모든 악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는, 흔히 말하듯, 아직도 코를 풀 줄 모르는 더러운 아이들을 볼 것이며, 누군가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제멋대로 하기를 바라는 이런 더러운 젊은이들은 지금부터 십 년 정도는 회초리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있는 걷잡을 수 없는 교만을 볼 때, 그들이 사탄에 사로잡혀 있어서 스스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자들로 드러났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케 할까요, 주님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라고 말씀할 때, 더욱 우리는 이 구절에 유의해야 합니다. 물론 이 훈계를 들을 필요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뚫린 귀를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을 멀리하고, 갖고자 하는 것을 가지며, 술집과 오락실과 도박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꾸짖으실 때, 이 교훈은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가 솔로몬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는 지혜를 끌어들여 “내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큰 자들과 작은 자들 모두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권했지만, 아무도 나를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3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삶이 단정해질 것이라고 선포하셨다는 것은 이 교훈과 훈계를 회피하는 모든 이들이 마지막날 계산을 치러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막힌 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 악을 첨가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이탈했던 구원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말씀으로 행하신 훈계를 그들이 회피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이 표현하고자 했던 사실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기를 자신이 얼마든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고 할지 모르나, 이미 기록된 말씀을 좇아 하나님이 지배하시도록 맡기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왜 전심으로 구해야 하는가 - 가만있으면 세상에 휩쓸리기에
이제 이어지는 것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서”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지 않은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즉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비록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갈 다소간의 욕망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도 약해서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허영으로 넋빠져 있으며, 우리 안에는 세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한 헌신을 여전히 위대한 것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모범을 따라 전심으로, 즉 삶의 주목적으로 이 목적을 지향하는 데서 이탈하지 않는 완전함으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다윗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와 싸우지 않아도 될 정도의 그런 완전함을 갖지 못했음도 사실입니다. 이는 성 바울이 그가 마치 절뚝거리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선을 행하지 않고 그의 본성적 악에 붙잡혀서 자신이 정죄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4 다윗에게도 그런 유혹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혹에서도 그가 지향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범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열심이 있는 자들도 많은 악과 이 세상의 헛된 염려 및 많은 육체의 탐욕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매일 한 걸음씩 움직여 단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며, 때로는 전진하기는커녕 후퇴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어쨌건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았다고 고백한 뒤 그가 계명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붙드시기까지 얼마나 그에게 부르짖을 필요가 있는가를 봅니다. 비록 이미 그가 우리 안에서 힘있게 활동하셨고, 또 그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음을 우리가 안다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너무나 악하고 불완전하며, 또한 우리는 너무도 허약하고 나약해서 우리가 그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고백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내가 잘못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라고 덧붙였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길을 가는 법을 배웁시다. 사실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또한 그것을 행할 능력을 주시며 그의 은혜를 따라 모든 것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탄이 불시에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가 우리 안에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두려움으로 행하며 철저히 감시해야 합니다(라고 성 바울은 말합니다).5 이것이 어떤 이들이 한동안 절반은 천사와 같은 선한 모습을 보이다가 방탕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절망 상태로 내버려두실 때 끝까지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됩니까?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완전하다’고 하는 이 미지근함 때문입니다. 성 바울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나는 끝에 도달하지 못했고 다만 노력한다.”6 그가 “나는 노력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안에 겸손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게 합니다. 그가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5. 말씀에 대하는 다윗의 태도
1) 내 마음의 보석상자 - 말씀을 담아 두는 선한 양심(내 마음 보좌에는 누가 앉아 있는가)
이어지는 말씀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숨겨 두었나이다”입니다. 다윗이 이런 식으로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숨겨 두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변덕스런 지식을 가질 경우, 마귀가 즉시 우리를 정복하여 유혹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결국 심연에 빠뜨릴 정도로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전에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숨겨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되 그것이 우리 안에 새겨질 정도의 애정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지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죄는 인간들 안에 자기 보좌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듯이, 우리의 모든 지각은 사악하고 부패했으며, 우리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숨겨 두지 않고서는 그를 섬기는 일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윗이 칭찬 받기 위해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닮아야 할 하나의 거울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의 교리에 대해 단순히 뚫린 귀를 가져서도 안 되며 그 교리를 우리의 뇌에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숨겨져야 합니다. 즉 그것을 보물처럼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숨겨 두다”라는 이 말은 다윗이 야망이나 헛된 영광에 몰두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멋지게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 안에 있는 이 은밀한 소원의 증인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피조물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보화를 가진 뒤, 그것을 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지켜 주셔서 사탄이 그것을 빼앗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성 바울은 그 보화를 숨겨 두어야 할 보석상자는 착한 양심이라고 밝힙니다. 그는 이 착한 양심을 버린 많은 사람들이 또한 믿음도 잃고 파선했다고 말합니다.7 만일 어떤 사람이 문도 잠그지 않은 채 자신의 재산을 방치한다면 도둑들이 쉽게 모든 것을 훔치고 약탈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가 이 착한 양심에, 그리고 여기서 다윗이 말하듯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숨겨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탄에게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2) 찬송 - 배움의 자세(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인정)
다윗은 “찬송을 받으실 주님,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한 뒤 “주님, 당신은 찬송을 받으십니다. 당신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덧붙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증거하는 것은 그가 위에서 한 요청이 그가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무슨 공로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뜻 보기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가 그를 찾았기 때문에 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 앞장서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해야 하며 다음으로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흔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이나, 하지만 다윗의 의도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것을 자신의 고유의 힘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먹으려면 이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며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과 노력은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많은 성경 본문에서 밝히듯이,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 선행했으며, 다윗은 다만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을 계속해 달라고 요구했을 뿐입니다. 이는 그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주님, 나는 내가 당신을 찾았을 때 이미 당신이 당신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활동하셨음을 압니다. 그런데 당신의 손에 인도되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당신이 끝까지 지켜주지 않는 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당신이 이렇게 하실 때, 이것은 모든 칭송을 당신께 돌리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순전한 은혜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능력과 공로에 부푼 사람처럼 스스로를 높이려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기까지 칭송과 찬양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는 그가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또 그가 이미 배운 교훈에 더욱더 확고히 있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당신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식한 자라거나 초심자였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지자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책임을 맡은 자였으며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무지한 자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그가 더욱 더 성장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율례로 가르치시는 이런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다윗처럼 합시다. 즉, 그가 칭송 받고 찬양 받으셔야 한다는 근거를 그분께 제시하고 그것에 기초를 둡시다.

 

3) 먼저 배우고 받은 것을 나눔
특별히 여기에는 우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이미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학생이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 날마다 우리의 신앙을 성장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세움 받은 자들, 바로 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성경으로 훈련되지 않은 채, 강단에 올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이 직무를 찬탈하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뻔뻔스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이 배움의 조건으로 날마다 강단에 올라갑니다. 여기 있으면서8 나는 내 말이 사람들에게 들려지기 위해서만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내편에서 하나님의 학생이 되어야 하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나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가장 능통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일평생 그들의 학교 스승이실 필요가 있음과 다윗의 모범을 따라 더욱 더 확고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경우,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이요 교만한 자들이라는 사실에 주의합시다.

 

이런 것들이9 더 길게 추론되어야 함이 매우 합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한 가지 것에만 주의합니다. 그것은 이 시편을 요점적으로 다루면서 이것에 대한 기억을 더욱 잘 새기는 일입니다. 지난 주일 첫 번째 설교에서 말했듯이, 성령이 본 시편을 알파벳 철자에 따라 구성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처럼 모두에게 공통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 시편이 우리의 사용에 친숙하고 적절하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설명도 순수하고 단순하게 이뤄지는 것이 좋고 또 필요합니다. 즉 본문의 문맥을 따라가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거의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 말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지나치게 긴 반복을 기다리지 않고서 각자가 여기에 설명된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쨌건 나는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나치게 모호하지 않을 만큼 간략한 설명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다윗은 “주의 입의 규례를 내 입술로 이야기했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할 일치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각자가 아멘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 그리고 어떤 위반과 모순 없이 그와 우리 사이에 조화와 일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의미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따르고 그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그의 이웃을 부추겨 다같이 한 가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애를 쓰며 또 그렇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진정한 열심을 갖는 자는 결코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방을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한 방탕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며, 냉랭하고 미온적인 자들을 자극하며, 나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며, 이미 바른 길에 있는 자들을 격려하여 더욱 전진하게 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바로 이런 조건, 즉 각자가 자신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상호간에 염려할 것을 조건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열심을 가질 때, 각자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조건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압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쓰여진 순서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입의 규례를 그의 입술로 이야기했다”는 말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서 이미 그가 그것들을 그의 마음에 숨겨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마음에 숨겨 두었다고 말하는 그것을 그가 뒤에 입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각자가 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에게 “앞서 가시오”라고 말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말하던가 아니면 함께 가자고 말해야 합니다. 모두가 바른 길로 가기를 목표로 삼으면서, 우리 역시 함께 우리 하나님께로 가서 참 신앙으로 그와 결합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잘 싸울 줄 알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박사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오직 오염과 악취만이 발견될 뿐이며,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취한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어야 하며, 다음으로 우리 안에 이런 감정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 노력을 하며,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일치된 마음으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은 다윗이 여기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다윗과 같은 선지자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기록되기를 “서로 권면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 바울은 모든 신도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10 그러므로 이 일이 우리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가장 진보된 자들인 그들이 교회의 공통된 교화와 이웃의 교육을 위해 받은 은혜를 펼쳐내기를 원하십니다.

 

4) 참 만족의 근원 -재물에 지배받지 않고 말씀 따라 사용하기를 배움
이어지는 말씀은 “내가 풍족한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道)를 즐거워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증거하는 바는 그가 사람들이 지나치게 연연해하는 지상의 애착(affections)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진 이 달콤함을 느낀다는 것과, 이 구원의 교리가 우리로 그것에 빠져들게 할 만큼 그렇게 우리를 즐겁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보다 앞서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지배하는 이 모든 탐심과 악한 성향(affections)을 제거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엉겅퀴와 가시나무와 독초로 가득한 땅에서 밀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습기가 조금도 없는 돌과 바위 위에서 포도주를 숙성시키려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들의 본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선한 것이 없는 가장 메마른 땅입니다. 그들의 모든 감정(affections)이란 하나님의 선한 씨를 질식시켜 죽이는 엉겅퀴와 가시나무와 독초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재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립시키며, 인간들을 이끌며 그 마음을 끓게 하는 이 탐심과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말씀에 따라 행하려는 열망을 대립시키는 데는 이유가 없질 않습니다. 이는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아아, 주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빠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무엇보다도 당신의 말씀을 갈망했고, 내 육체의 모든 악한 생각들(affections)을 [나를] 옭아매는 것으로 여기려 애썼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구절에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학생이 되고 그의 증거의 도(道)를 기뻐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육체의 탐심을 길들이며 이 세상 것들에 탐닉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사람들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상상하는 것 속에 갇히지 말고, 오히려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는 모든 것을 경시하며, 성 바울이 말한 것처럼,11 배설물과 쓰레기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가 가졌던 부를 결코 버리지 않은 것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왕으로서 풍족했던 그는 금과 은을 바다에 던지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풍요로움을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성경의 역사서가 말해주는 대로, 그의 집이 얼마나 탁월했고 아름다웠는지를 압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규율을 따랐습니다. 즉, 이 세상의 재물을 마치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붙들리지 않은 채 여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마치 성 바울이 말한 것처럼,12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유함을 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휘감기지 않은 채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며, 한편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으시려 하실 때마다 그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하며, 그의 뜻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그에게로] 이끌어 내시는 것일 때, 그에게로 가기 위해 우리의 발 하나를 언제나 들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다윗이 여기서 재물의 풍부함에 대해 말하는 데는 이유가 없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 바울이 말하듯이, 탐욕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13 사람들이 이 세상의 재물에 그토록 빠져 있으며, 뭔가를 갖고 있지 않고 잘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에게 증거되는 교훈을 명심합시다. 즉 우리의 모든 욕망을, 마치 모든 재물 속에 두듯이, 하나님의 증언의 도(道) 가운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만족과 안식을 그곳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5. 다윗의 다짐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은 “내가 주의 계명을 훈련하며14 주의 도를 지키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말한 이야기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결론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이미 그가 그렇게 시작한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고 성경에 담겨 있는 교훈을 즐거워할 것이며, 자신의 모든 연구를 그것에 적용하고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성장하려는 욕망을 망각하지 않겠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로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전념하겠다고 한번 선한 마음(affection)을 갖는 것과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이미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로 항상 점점 더 전진하게 하도록 여러 차례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을 압시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다리를 질질 끌거나 절뚝거리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올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결코 망각하지 않겠다고 다윗과 더불어 주장하면서, 또한 우리를 자극하기를 계속하되, 더욱 불붙는 갈망과 더욱 훌륭한 용기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기 위해 우리 안에 항상 더 많은 열정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초대하신 이 완전함에 도달해야 합니다. 즉 그가 우리를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본성에서 빼내신 뒤 우리를 그의 의에 충만히 결합시키신다는 말이며, 그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빛난다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끊임없이 그의 분노를 자극하는 헤아릴 수 없는 잘못들을 인정하고 우리의 선한 하나님의 면전에 부복하여, 그가 기꺼이 우리로 우리의 악을 더욱 잘 느끼게 하셔서 그가 명한 치유책을 찾고, 그의 거룩한 말씀을 읽는 일과 그것에 대해 날마다 행해지는 설교를 듣는 일을 훈련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한편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께 아뢰어 그가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가 인간들의 입을 통해 듣는 가르침이 무익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능력과 효력을 가지며,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그 가르침 안에서 확고히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더 세상과 그리고 우리의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결합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가 이 은혜를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도 베푸시기를….(*)

 

* 1553년 1월 15일에 행한 설교(CO, XXXII, 493)이다. 이 설교문에 붙여진 소제목과 괄호 및 주(註)는 원문에 없는 것이지만 독자의 편의를 위해 첨가하여 번역, 편집했다.

 

주(註)
1. 전도서 11:9~12:1
2. 시편 73:22.
3. 잠 1:20~24 참고.
4. 롬 7:19~20.
5. 빌 2:12 참고.
6. 빌 3:12 참고.
7. 딤전 1:19.
8. 강단에 서 있는 칼뱅 자신을 가리킨다.
9. 설교자의 태도.
10. 살전 5:14, 골 3:16, 히 3:13.
11. 빌 3:8.
12. 고전 7:31.
13. 딤전 6:10.
14. 법도를 묵상하며(한글개역).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