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스크랩] 위트니스 리의 성경(야보고서)에 대한 태도 /플레비언에서 펌

baromi 2009. 3. 26. 16:49

위트니스 리의 성경(야보고서)에 대한 태도

  • 글쓴이: pureword
  • 조회수 : 20
  • 09.03.26 10:05
http://cafe.daum.net/AFFECTION/6bAW/97

다음 글은 지방교회의 싸이트 중 하나인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에 올라와 있는 야고보서 평전의 요약글이다.

이 글 속에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성경에 대한 태도와 치우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다(딤후3:16).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야고보서의 내용이 자신이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즉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깍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어떤 관점으로 성경을 읽을 때 나올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오류이다.

 

어떤 성경이 신약의 경륜과 무엇인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그 성경 안에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침묵하거나 주님께 인내를 가지고 묻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좀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성경교사들은 선을 벗어나 결국 성경기록자와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마져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이것은 성경의 몇개 단어를 변개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악이다. 그럼에도 성경안에 있는 어떤 진술들을 예로 들어 야고보의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기록하게 했다고 위트니스 리는 망설임없이 주장한다. 참으로 참람하기까지 한 것이만 위티니스 리의 탁월한 관점에 이미 매료된 지방교회의 형제들은 의심없이 그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영을 그렇게 강조하는 분들이 그 영(성령)에 의해 주어진 말씀을 폄하하는 이 웃지 못할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등장 인물들의 어떤 진술과 사도의 서신이 어떻게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기에 이런 예들을 들어 야고보서 자체를 판단하는지 그 만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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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김재광
  • 조회수 : 265
  • 04.02.12 08:26

    http://cafe.daum.net/overcomers/2OCq/154  

     

    (야고보서는 주후 52년 경에 씌여졌으며 갈라디아서는 주후 54년 경에 씌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두번째 세번째로 씌여진 책으로서, 서로간의 미묘한 그러나 매우 중대한 시각차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둘 다 주 예수님의 사후에 세워진 사람들인데, 이들의 강한 성격과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한 견해의 차이는 정말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파해서 도처에 교회를 세웠고, 그가 세워둔 교회에는 어김없이 야고보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이 와서 율법을 강조하여 혼란스럽게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1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야고보에게로 갔지만, 정작 그 자신도 예루살렘의 흐린 분위기에 의해 사로잡힐 뻔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이 하나님의 경륜과 부합함을 익히 알고있을지라도, 야고보적인 조성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를 숙지함으로, 사탄의 간교한 전략을 파악하고, 깨어 하나님의 경륜 안에 머묾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출처는 야고보서 회복역과 1995년 간 야고보서 결정연구입니다.)

    본 자료는 기본적으로 야고보서 비평임으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의 일부인 야고보서를 이렇게 비평할 수가 있는가? 우리가 이런식으로 성경을 재단한다면 어떻게 성경적 진리를 신뢰할 수 있는가?' 다음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읽어보시고 자료를 연구하신다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a.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되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씌여진 모든 단어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일곱개의 사례를 통해서 이것을 증명하겠습니다.

    1). 모세가 기록한 뱀의 말
    창세기 3:1, 4-5절은 옛 뱀, 즉 마귀가 말한 것이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영의 영감을 통해서 기록한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 사탄의 간교한 속임수과 그의 마귀적인 유혹을 폭로하여, 인류로하여금 사탄이 참 사기꾼이요 마귀적인 유혹자임을 알게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1 Tim. 2:14; Matt. 4:1-3; 6:13; 1 Thes. 3:5).

    사탄의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있고 그 기록이 그영의 영감에의한 것이지만 기록된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 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단 말이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그러면 정녕 죽지 않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아시기때문이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날에는, 너희의 눈들이 열려져서 너희가 하나님들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될 것임을(Gen. 3:1b, 4-5)'.

    이것은 사탄의 말이지만, 성경에 모세가 기록하여 거룩한 성경의 일부가되었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그 기록됨이 그영의 영감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2) 욥의 말함과 그의 세 친구들의 말함과 엘리후의 말함

    욥과 세 친구들, 엘리후의 말함이 욥기 3장에서 37장에 걸쳐 무려 3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말은 상당부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그들의 관념일 뿐, 인간 미덕들의 완전에 관한 그들의 깨달음일 뿐인데 그 관념은 사람 안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35장에 걸친 다섯사람들의 말함 후에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기위해 들어오시는데, 하나님은 욥이 지식이 없는 말들로 하나님의 모사(counsel)를 어둡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Job 38:1-2). 어떤 대학들은 욥기를 사용해서 철학을 가르치나, 하나님은 그의 말들이 지식이 없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 욥이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주님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삽더니:이제는 내 눈으로 당신을 보나이다. 이러므로 내가 자신을 혐오하고, 먼지와 재 안에서 회개하나이다(42:5-6)'. 일단 욥이 하나님을 보자 그는 자신을 혐오했고, 회개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자신의 완전함, 똑바름, 존엄함 대신에,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누가 욥기를 이해합니까? 심지어 야고보도 합당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합니다(5:10-11). 그러나 욥의 지식없는 말은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모사를 어둡게하였습니다.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모사는 단순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하고, 심지어 우리를 변화시켜 그분의 형상이되게하여, 우리가 그분의 표현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삼일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존엄함이나 똑바름의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자신의 완전함, 존엄함, 똑바름을 높이 평했지만, 하나님을 이것을 벗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욥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욥은 자신을 혐오했고,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그분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Matt. 16:24).

    부인함은 자아를 십자가에 남겨두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십자가상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고통받음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사용하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통받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종결을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자아를 개발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길과 반대됩니다.

    3). 시편기자들의 천연적인 감상들
    시편기자들은 자신들의 원수들을 미워하고(18:37-42; 40:14-15; cf. Prov. 25:21-22), 하나님이 복수해주시기를 요청하고(3:7; 43:1; 54:1-3), 원수를 저주하는(35:4-7; 70:2-3; 109:1-15) 천연적인 감상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와중에 그들의 천연적인 감상이 시편기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그 시편기자들의 영성이 어느 수준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데, 그들은 한면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감상 안에서 천연적이었습니다. 시편기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복수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천연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 마태복음 16:22절의 베드로의 말

    '하나님이 그대에게 자비로우실저, 주여! 이것이 결코 당신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베드로가 사탄에게 占奪(점탈)당해, 심지어 사탄이 되어 말한 것으로, 주님은 책망하시되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라, 이는 네가 네 생각을 하나님의 일들에 두지 않고, 사람의 일들에 두기 때문이라(v. 23)'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아버지의 계시를 얻은 후에, 또한 교회의 건축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얻은 후에,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 자신과 다른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달리실 것과 일으켜질 것을 들은 직후에, 이런 사탄적인 발언을 한 것입니다(v. 21).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참 계시를 받은 후에 사탄의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이것을 기록한 것은 우리를 가르쳐, 깨어 기도함으로 속임당하지 않게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Matt 17:4에서 말한 것 즉 '주여, 여기가 더 좋사오니; 당신이 원하시면, 이곳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하겠나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위임에 대한 그의 흐릿한 이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의 기분을 상하게했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항했습니다. 그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의 목소리가 개입하였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그 사랑받는 자라. 그의 속에서 내가 나의 즐거움을 발견하였노라. 그를 들으라!(v. 5)'.

    하나님의 목소리가 베드로의 말을 중단시킨 것은 그리스도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등급을 매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또한 베드로가 옛 창조 안에서와 새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알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Col. 1:15-18). 그러므로 그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자신의 즐거움을 그분 안에서 찾은 바로 그 사랑받는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들어야합니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감의 책인 성경 속에서 많은 단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 심지어는 사탄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를 감정할 때, 바로 이런 관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옛 언약을 새 언약과, 옛 경륜을 새 경륜과 옛 백성을 새 백성과 사람의 타락한 옛 사람을 사람의 거듭난 새 사람과 섞었습니다. 이점에서 그는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그의 표준은 너무 낮습니다.

    6). 사도행전 10:14에서 베드로의 말
    '결코 안됩니다. 주여. 평범하고 부정한 어떤 것도 저는 결코 먹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정한 이방인들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베드로가 그의 종교적인 관념으로 인해서 거부하는 광경입니다.

    그의 말은 하늘에서 오는 소리에 의해서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결케하신 것을(즉 하나님이 정절케하시는 이방인들을) 속되게 만들지 말지어다(v. 15).'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삼년 반을 주님을 따라다니고, 오순절을 체험하고, 분명한 말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함으로 예루살렘교회를 산출하였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주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조차도,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의 그리스도의 증가를 위한 복음의 확산에 관련한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여전히 흐릿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서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신약경륜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표준보다 훨씬 아래있었던 하나님의 구약 경륜에 관한 그의 계시에 따라 말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다시 그의 말을 하는 중에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부어졌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누가에 의해 하나님의 영감 아래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은 베드로 및 은혜 시대 안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을 빛비춰, 하나님의 복음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이르는 이방인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7). 모세의 율법을 높이고 신약의 믿는이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명하는 야고보의 말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영을 혼란시키고, 그리스도가 없고, 그분의 죽음, 부활, 그 영이 없는 야고보의 말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약의 경륜 안에 있는 은혜에 반하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그의 옛 언약의 관념을 따라, 하나님의 구약경륜과 하나님의 신약경륜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흐릿한 이상을 따라, 야고보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서신으로서 성경의 일부로 기록된 것은, 율법에 관한 그의 잘못된 관념 안에 있는 그를 드러내고,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영에 관련하여 그의 흐릿한 이상안에 있는 그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안의 모든 믿는이들을 가르치고 빛비추어, 그들로 야고보가 말하는 결함투성이의 말로 인해, 계속 전진하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완결된 영, 옛 창조를 종결하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모든 새 창조를 발아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함에 있어서 좌절되지 않게하려함입니다.

    b. 성경의 해석을 통제하는 두가지 원칙

    1). 첫번째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과 각각의 단어들은 전체 성경과 더불어, 전체 성경를 따라서 풀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어떤 해석이 전체성경을 따라서 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이 아닌 어떤 책이 되고 맙니다.

    2). 두번째 원칙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전체성경의 중심노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합당한 빛비춤 아래서 이 중심 노선에 의해서 엄격하게 통제받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어떤 해석이 하나님의 경륜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난 것입니다.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며 거룩한 성경의 중심노선으로 빛비춤을 얻은 참 추구자인 하나님의 성도중 어떤 누구도, 그런 빗나간 해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 처럼 빗나가지 않기위함입니다

  •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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