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로이드 존스의 부흥 제2장 부흥의 장애물

baromi 2008. 10. 22. 16:24

제2장 부흥의 장애물


창세기 26:17,18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첫 번째 문제는 오늘날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 그랄에 도착한 이삭은 긴박하고 매우 절망적인 상황 맞이함: 물의 부족은 생명의 절대적 진수가 되는 것의 부족이요, 더 나아가서 유복한 삶에 있어서 진수가 되는 것의 부족을 뜻하는 것.


  *. 오늘날 교회의 고통거리는 교회가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 자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방법이나, 어떤 조직이나, 여기저기를 조금 고치거나, 아니면 상황을 약간 보완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생명의 문제이다. 인생에 대한 영적 사고방식, 세상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영적인 사고방식의 문제이다.


     전통이나 습관이나 관례에 따라서 한동안 일을 해 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밑천이 하나도 없을 때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인 능력과 활력을 교회의 모든 활동에서 필요로 하고 있다. 생명과 능력과 성령 자신을 진실로 필요로 하는 실정이다.


2. 우리는 지금 이삭의 처지에 놓여 있다.


  1) 이삭이 하지 않은 일: 상황을 판단해줄 사람, 물이 있는 곳을 알아맞히는 점쟁이나 전문가를 부르지 않았다.


  2) 이삭이 한 일: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


  3) 오늘날 이삭의 사고방식과 정반대의 사고방식들이 팽배하다.

     물의 근원이나 줄기를 어느 곳에서든지 발견할 수 있으면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4) 이삭이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판 이유.

     -.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 아브라함은 물을 찾고, 파는 전문가였다.

     -. 위기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 여기저기를 파보는 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3.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부흥의 역사도 동일한 것을 보여준다.


  *.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 사람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 사람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 행동하는 방식 등은 동일하다.


  “우리가 신문을 읽어보기만 하면 인간의 주요 관심거리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전쟁을 하며 섹스를 즐기며 다른 여러 가지의 유흥을 구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 나온 모든 것이 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은 여전히 같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닥친 주요 사회 난제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도둑질과, 강탈과, 폭력과, 시기와, 질투와, 부정함과, 이혼과, 분리와, 부패와 이 모든 것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들이 예전에도 문제가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문제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난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물을 얻는 문제를 갖고 있었고 이삭도 역시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차이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같으십니다. 사람도 역시 같습니다. 문제의 해결책도 역시 같다고 신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4. 과거의 교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원리들.


  1) 교회의 역사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울퉁불퉁한 역사였다.


     -. 생명력과 활력과 능력이 충만했던 교회시대가 있었다.

        18세기의 복음 각성: 영국을 건져내었던 것은 휘트필드나 웨슬리 시대의 복음적인 각성이었다.

                            교회는 생명력으로 충만했고 능력으로 충만하여 사회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영국의 복음 각성.


     -.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기, 재각성의 시기는 엄청나게 메마르고 죽어 있고 무감각하고 생명 없는 시기 뒤에 왔다.


  2) 이러한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시대마다 모든 경우에서 그 이전에 얻었던 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시대마다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교회가 소생할 때마다 이삭이 했던 일을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교회는 그전에 있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그전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하고, 옛 원천을 다시 파곤 합니다.”


5.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워버렸다(부흥의 장애물).

   ⇒ 블레셋 사람들이 한 일을 오늘 교회가 하고 있다.


  1) 우리가 처한 새로운 환경이 문제라는 것에 대하여.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난제는 우리가 처한 새로운 환경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러한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 말에 신물이 날 정도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현대인에게 제공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그런 것들이 문제거리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몰아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마땅한 바대로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이백 년 전에 있었던 복음적인 각성 이전의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처럼 텅 비어 있었고 심지어 그보다 더했습니다. ··· 어느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텔레비전이 없었어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닭싸움과 카드놀이를 대단히 즐겼습니다. 그들은 도박을 좋아했고 술을 대단히 즐겼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구실을 찾기가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2) 과학적 지식의 진보에 대하여.


     “250여 년 전의 교회역사를 읽어본다면 자연신론(deism)의 시기가 있었으며, 그 시기 후에 위대한 복음 각성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 바와 같이 그 자연신론의 시대에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요? 그들의 지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확히 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17세기 중엽에 과학적인 대각성이 있었습니다. 아이작 뉴톤과 다른 사람들이 그 시대에 살았습니다. ··· 온 세상은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분위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3) 교회의 분열이 문제라는 입장에 대하여(그래서 교회의 연합이 우선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


     “대답은 교회사에 다 있습니다. ··· 과거에 교회가 예리하게 나뉘어져 있을 때, 심지어 오늘날의 상황보다 더 예리하게 나뉘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위대한 복락을 그런 때에 맛보았습니다. 백여 년 전에 미국과 북아일랜드에서 교회가 수도 없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때도 오늘날, 아니 오늘날보다 더 심하게 많은 교단들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셨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교회의 나뉨이 복락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 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나뉘어져 있을 때도 복락을 내려 보내셨고, 부흥이 임한 곳에 두 가지 중요한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역사가 분명히 보요주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 부흥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단들에게 복을 주었고, 어떻게 나뉘어져 있었든지 상관없이 한동안 그 기이한 연합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부흥처럼 연합을 촉진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역시 틀림없는 또 다른 효과를 발합니다. 그것은 새롭고 전혀 생소한 분쟁을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락과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연히 하나가 되고 함께 모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혀 싫어하며 비평하며 정죄하며 또 그 모든 것을 배격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교회(성공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 영국교회에서 축출당했습니다. 그 분쟁은 부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을 생각해 보십시오. 루터는 로마교회를 나누고자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의 축복은 로마교회를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그것이 순전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의 한 가지 장애물은 교회가 나뉘어져 있는 상태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측입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잡동사니와 같은 말입니다.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와 그 우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우리가 절실히 요청되는바 성령의 증거와 나타남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것을 안 다음에야 우리는 이삭이 보인 본을 실행에 옮길 수 있고, 블레셋 사람들이 처넣은 잡동사니를 깨끗이 소제하여 다시 하나님의 옛 물줄기를 만나고, 한 성령의 능력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비상한 복락의 시기를 맞고 강력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출처 : 복의 근원 교회
글쓴이 : 백경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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