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자료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

baromi 2008. 10. 8. 08:28

신동식 목사

5.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

지금 까지 부흥의 정의와 그 열매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부흥의 정의와 열매를 보면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에 대한 열망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된 부흥에 대한 이해이다. 거짓된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부흥의 참된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거짓된 부흥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윌리암 스프레이그 박사의 견해는 매우 유익함을 볼 수 있다.

거짓된 부흥의 표지다. 첫째 ‘큰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부흥이 일고 있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할 하등의 근거는 없다. 둘째 신앙고백의 측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나는 회개하였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부흥의 확실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세 번째로 격렬한 반대와 광범위한 반대가 있다는 것이 그 부흥의 참됨을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 있다. 그것은 부흥은 감정과 관련이 있지만 부흥이 반드시 감정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부흥의 성격을 회심하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평가하는 데 기울어지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의 수, 그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진정한 부흥을 불확실하게 시험하는 시금석은 없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회심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여전히 죄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회심하였다고 상상케 하도록 만드는 교리들이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된 부흥의 표지다. 부흥이라고 외쳐지는 어떤 것이 ‘성경적인 방편들’을 통하여 나온 결과였다는 사실은 그 부흥이 참되다는 것을 우호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복음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방편들로 인하여 산출된 신앙 문제에 대해서 강력한 흥분과 복음이 인정하지 아니하는 교리의 전파, 그리고 복음이, 근본적인 초석으로 알고 있는 교리들이 생략된 채 전하여지고, 성령의 검이 신실하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사용되는 대신에 동물적인 격정을 산출할 양으로 의도된 한 다발의 인간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또한. 신앙의 본질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대신에 뒹굴고 흐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대치시켰다고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순전한 역사일 수 없다고 서슴없이 말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를 명백하고 진실하게 설교하여 그 넓이와 길이에 있어서 하등의 거짓이 없이 일어난 관심이 신앙에 모아지고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공정하게 추천하고 있는 단순하고 정직한 방편을 사용하여 그러한 관심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여기에 성령의 순전한 역사가 일고 있다고 말하는 데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전한 부흥은 그에 비례하는 반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들이 참된 부흥의 증거로 취할 수 있는 주도적인 것은 ‘부흥의 견실하고 언제나 열려 있는 열매’이다. 소망스러운 회심의 개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법칙이 부흥에 대하여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종교의 문제에 대한 흥분이 아무리 큰 것이었다 할지라도 지나가 버리고 지속적인 어떤 선한 것이 거의 남지 않으면, 부흥이라 이름 붙이기가 부족한 것이다. 흥분이 사라진 뒤에도 거룩한 열매들이 여전히 남게 되고 더욱 더 무르익게 되며, 회심하였다고 고백하였던 사람들이 겸비로운 길을 계속 걷고 있으며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참된 신앙 부흥으로 소생 받은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생활에서 구현된 신앙은 그 신앙이 마음에 거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참된 부흥은 말씀과 참된 교리의 선포를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거짓된 부흥은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격정의 도가니가 된다고 해도 거기에 바른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참된 부흥이라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