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자료

[스크랩] Re:성도의 자살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봅니다.

baromi 2008. 10. 4. 21:57

▲2. <말씀의 약속>이란 열쇠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장망성(장차 망할 성)을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왕의 길(King's Way)을 걸었다.

하지만 너무도 고달프고 험해서, 그는 좀 쉬워 보이는 길로 들어서기로 한다.

그 길은 '의심의 성'에 살고 있는 ‘절망이라는 거인’의 영토로 향하는 길!

 

결국 크리스천은 거인 '절망'에게 사로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온갖 방법으로 그를 괴롭히던 '절망'은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그에게 자살할 것을 종용한다.

 

얼마 동안은 정말로 그 거인이 크리스천을 굴복시킨 듯 보인다.

그때 크리스천과 함께 잡혀 있던 '소망'이라는 동료가 그에게

값진 승리의 순간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동안 당신은 참으로 용감했어요. 그 무시무시한 아볼리온과도 싸워 이겼고

죽음의 그늘 계곡에서도, 허영의 시장에서도 당신은 참 용감했어요.”

용기를 얻은 크리스천과 ‘소망’은 그 밤에 기도를 시작한다.

 

거의 아침이 될 무렵까지 기도를 계속하던 크리스천은 갑자기 크게 외친다.

“맙소사! 난 참 바보야,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니...

여보시오 희망!, 내 품안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오!

그 열쇠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열쇠인데

이 의심의 성에 있는 감옥 자물쇠도 열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은 양치기에게 천성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아있는가 물었다.

양지기는 멀어서 못가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 갈 사람들은 다 가더라고 대답했다.

 

목자들의 이름은 지식, 경험, 경계, 성실이었는데

크리스천과 소망에게 음식과 따뜻한 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1. 토레이 박사

R. A. 토레이 박사도 젊은 시절 방황할 때, 자살을 시도하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 기숙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 보내주시는 돈으로 흥청망청 세상 쾌락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잠깐의 쾌락 후엔 허무했고, 제 삶은 황페화 되어갔습니다.

 

하루는 내가 밤에 자다가 일어나, 서랍을 열어서, 도구(권총, 칼)를 찾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늘 거기에 있던 ‘도구’를, 그날 밤에 나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그 때 내 눈을 가리우신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살을 포기하고, 그날 밤 거기서 무릎을 꿇고, 내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주님, 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벗어주시면, 제가 복음전도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 밤,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정말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큰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2. 링컨 대통령

링컨도 우울증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 죽기 살기로 일한 것이

후에 그를,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3.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완치 후 빈민사역을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관련 글 : ’가가와 도요히코’를 키워낸 나가노 목사

 


▲4. 장애인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김진호의 어머니 유현경씨의 간증

자폐아 자녀로 인해 탈출구가 없는 답답한 인생을 살고, 한 때 자살도 결심했다.

4년간 자녀를 위해 기도한 후에 ‘내 자녀를 사랑하라’는 내적 음성을 들었다.

‘자폐아 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깨달음이었다.

순간 회개기도가 쏟아져 나왔다. 비록 우리 아들이 자폐아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낙심만 했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참고자료 1> 이 글은 자살과 관련해서 작성한 설교문의 요지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자살 문제는 대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었다. 대북송금 문제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정몽헌 현대아산 대표의 자살은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한 주부를 비롯해 카드 빚과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또 지난 24일에는 서울 영등포구 모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방모(16)군이 '성적이 오르지 않아 부모님께 미안하다. 먼저 가서 죄송하다'는 짤막한 유서를 남긴 채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지난 달 초에는 40대 초반의 검찰 공무원이 '오랜 업무에 대한 긴장과 박봉에 대한 두려움이 한 인생을 이렇게 무너뜨리는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 싶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국민연금보험의 한 사람은 국민연금보험의 문제점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최근 잇따른 자살 사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자살은 더 이상 신문 지면에서나 볼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옆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상사가 되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 자살 건수는 모두 1만3천55건으로 전년 1만2천277건에 비해 6.3% 증가했다. 하루 평균 36명, 1시간에 1.5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특히 경기 침체로 실업자, 신용불량자가 늘면서 생활고, 사업 실패에 따른 자살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난 2000년 생활고, 사업 실패에 따른 자살은 786건이었지만  2001년 844건 2002년 968건 등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납니다. 성적 비관 등에 따른 10대 자살은  2000년 466건  2001년 333건  2002년 273명으로 줄었지만, 경제 활동을 왕성하게 해야 하는 30대의 자살은 경기 침체가 계속 되면서  2000년 2천444건  2001년 2천446건  2천655건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한국컴퓨터생활연구소의 어기준소장은 "최근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게임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른바 `리셋증후군'이 확산되고 있다"며 자살이 늘어난 이유를 설명하였고, 김종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기성세대의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자녀에게 전이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자살은 희망이 없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고 말한다. 또 3천여만원의 카드빚과 은행빚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자살한 주부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된 계층이 최후에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수단이 결국 자살인 셈이다.


자살은 오늘에만 있는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와 함께 늘 있어 왔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사회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자살을 이해했다.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고 분석한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정신적 요인이 자살의 원인이라 밝히며, 특히 청소년들은 개인의 자아 발달 과정에서 생기는 다양한 공격성을 제어할 만한 심리적 정신적 방어기제가 형성되거나 정립되지 못했을 때 자살을 선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생계형 자살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생략)


요즈음 사회학자들은 자살을 타의적 자살이라 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의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자살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본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고 정죄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들도 자살한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서 장례를 치르지 아니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교회가 자살을 정죄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자살은 인간은 창조가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지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권자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안다면 결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맡기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이웃 살해 행위에 대해 구약 성경이 극형을 명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천하보다 귀한 존재를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는 복음의 핵심 내용에 근거해 볼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은 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도전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망을 우리가 이겨야 할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망의 그늘에서 인생을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10:10에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자살행위는 예수님의 사역을 헛되게 한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넷째, 자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열려있다. 자살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결과가 되고 만다. 

다섯째, 자살은 창조시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대한 유기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1-24에 자신은 육신의 가시를 갖고 세상에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지만, 성도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유보하고 힘든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섯째, 한 사람의 자살은 비록 그 동기가 어떠하든지 결과적으로 그와 관련된 많은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주는 도덕적인 문제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이들에게 비난이 주어지거나 혹은 그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자살은 혼자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사기 9장에 나타나는 아비멜렉은 무기당번을 불러, 사람들이 여인한테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를 죽이라고 하였다. 사울은 적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자기 칼로 자결하였고, 그의 무기당번도 그가 죽은 것을 보고 똑같이 자기 칼로 자결하였다. 아히도벨은 단순히 자기 의견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목을 매어 죽었다. 

신약에 나타난 직접적 자살에 대한 유일한 예는 가룟유다의 자살이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에 가책을 느껴 나가서 목을 매었다.

특히 엘리야 사건을 보면 자살에 대한 성경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왕상19장에 엘리야는 자신이 주를 위해 온 몸을 바쳐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살인 위협만이 그에게 결과로 오자 로뎀나무 아래서 자살하기를 원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지 그의 삶과 사명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살은 죄악이다. 이 죄악은 피해야 하며 싸워야 한다. 특별히 크리스챤들은 커다란 의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경제적인 것, 가정의 문제,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선택이라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자살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삶의 절망감과 낭패감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에수의 사랑나눔의 교제를 통해서 희망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소망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사랑과 관심의 사각지대에 홀로 버려져 있는 이들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이런 배려와 의식적인 노력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되찾고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2> 자살한 사람도 구원받는가

이상원 교수

<이 글은 제가 교수님에게 '자살'문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견해를 질문하면서, 교수님으로부터 소개받은 글입니다. > 빛과 소금 2003년 9월호

 

살한 사람은 모양만 신자일 뿐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판단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사회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에 두는 유물 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물질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기업 운영과 방북 사업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대기업 총수가 자살하더니, 그의 자살로 인해 방북 사업이 난관에 봉착할 것을 염려한 노인이 뒤이어 자살했다. 

군 생활에서 찾아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사병들의 자살도 잇따르고 있다. 가난과 카드빚 독촉에 시달려 온 어느 주부가 인생을 비관한 나머지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반 투신 자살하는가 하면, 어느 여인은 달리는 전동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을 비관한 아들이 자살하자, 아들을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뒤따라 자살했다. 

특히 아들을 따라 자살한 아버지는 교인이었는데, 그것도 주일 예배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와 자살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이처럼 주일 예배 직후에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 중에 자살한 사람들이 심심찮게 많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이제 자살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살과 순교의 차이

필자는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춰 서술한다. 하나는 자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이 자살했을 때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특별한 언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자살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든지 자신의 목숨을 빼앗든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 자체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6계명을 자명하게 어기는 범주에 포함될 수 있어, 자살에 대해 별도로 언명하지 않을 뿐이다. 

성경에 언급된 자살의 사례는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 등이 있다. 압살롬의 모사(謀士)였던 아히도벨은 자신이 압살롬에게 건의한 전략이 채택되지 않고 다윗이 심어놓은 첩자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자, 집으로 돌아와 목매어 죽는다(삼하 17:23). 이스라엘 왕 엘라에 대항한 시므리는 반역에 실패하자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해 버린다(왕상 16:1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성경은 사례를 기록할 때마다 자살이라는 행동에 대해 특별한 언명을 하지 않고 있다. 사울 왕은 이방인에게 찔림과 모욕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삼상 31:3 4, 대상 10:3 4). 이 경우는 사울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이 찾아 온 것임을 분명히 할 뿐(대상 10:13 14) 그의 죽음 자체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의가 있으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허용되듯,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경우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의가 있으면 허용이 된다. 예컨대 삼손이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내준 사건(삿 16:23 31)은 제6계명을 어긴 통상적 범죄 행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삼손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곤 신당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결행한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셨다(히 11:32). 삼손의 행동은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행위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요 15:13)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자신을 희생시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강재구 소령이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 뛰어든 청년의 죽음은 범죄 행위가 아니라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허용해선 안 된다. 예컨대 어떤 처녀가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면, 그 여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생명의 존엄성이 순결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은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나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는 것을 자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큰 오해다. 우선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을 끊으신 게 아니라, 타살 당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죽음을 예상하시고 피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수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명백히 타살이다. 순교자는 하나님께 향한 신앙이라는 중요한 가치 때문에 타살이 예상되는 길을 피하지 않은 것 뿐이다. 



자살의 충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이 자살을 결행했을 경우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들어가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속사람이 중생해 새사람이 되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겉사람까지 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죄의 세력에 위협을 받으며 그 세력과의 싸움에서 때로 승리할 때도 있고, 때로 실패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과 간음을 범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고 마땅히 피해야 할 죄인 것처럼, 자살도 기독교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도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게 되면 자살의 충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둘째, 마지막 날에 최종으로 구원을 받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에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움뿐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 살아낸 성화의 삶의 궤적이 마지막 날에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살도 예외가 아니다.

혹자는 다른 죄들은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통 사고나 비행기 사고 등으로 급사하는 경우와 심장마비나 익사 사고로 돌연사한 믿음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죄를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가 있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또 전에 지은 죄목들이 생각나지 않아 회개하지 못하거나 끝까지 죄인 줄 모른 채 죽는 성도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마지막 날의 구원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 우리가 입을 열어서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날의 영화로운 축복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질 뿐이다. 


구원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죄 '자살'

물론 마지막 날에 자살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엄중한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책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기독교인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조건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살한 사람은 모양만 신자일 뿐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판단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우리는 자살이 심각한 죄임을 강조해야 하지만, 자살한 사람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경솔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적 곤경, 실연, 사회적 부적응 등과 같은 외적 요인들과 고독, 우울증 등과 같은 내적 요인들은 기독교인들까지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선포, 긴밀한 교제, 상담 등을 통해 이런 원인으로 성도들이 자살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글 이상원  총신대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고자료 3>  자살 급증의 원인과 그리스도인의 사명

 만성길 (연세의대 정신과 교수)

          <이 글은 총신원보에 게재된 글로, 자살의 정신 병리학적 전문가의 견해가 담겨져 있어 소개합니다.>

 

요즘 유명인사의 자살 보도에 이어 자살이 최근 증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사회적 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자살을 이해하려면 우울증을 알아야 한다. 자살은 우울증의 한 극단적 증상표현이기 때문이다.

<자살의 원인-의존대상의 상실>

정신의학의 이론에 의하면, 우울증도 그러하려니와, 자살은 의존대상의 상실 또는 사랑의 상실에 대해 절망감과 분노의 감정이 야기되었으나, 이미 떠나버린 대상을 향해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다. 해소되지 않는 분노는,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분노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인 공격성과 결합하고 또한 떠난 분노나 미움에 의해 야기된 죄책감과 결합하여, 자기 징벌, 자기 상해 그리고 자신의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다.

또한 자실에는 도와주지 않음에 대한 원망과 복수, 도와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자기 지배 의도의 표명,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대상과 다시 재결합할 수 있는 곳, 즉 잃어버렸던 낙원으로의 도피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인생에서 소소한 상실은 약간의 울적함, 약간의 기죽음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을 때, 자존심의 근거가 되었던 외모를 잃었을 때는 심한 우울증이 올 것이다. 이는 그가 크게 의존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었을 때, 사회의 원칙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때도, 우리는 의존할 대상을 잃게 된다.

의존관계 또는 사랑의 관계의 원초적 모습은 어머니와 어린이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어머니에의 의존은 수태될 때 자궁 내에서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된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자라면서 어린이는 어머니로부터 더욱 독립적이 되면서 비로소 "너"와 "나"의 관계가 출현하면서 대상관계도 점점 다양하게 분화 발전한다.

"너"에는 아버지, 형제자매, 친구, 이웃어른들, 선생님, 회사 동료, 아내, 자식, 목사님, 영웅, 대통령 등등이 추가된다. 또한 사람이 아닌 인형, 담요, 쓰던 만년필, 좋아하는 책, 집, 학교, 애완동물,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고향, 돈 약물, 술, 건강, 미모, 직장, 명예, 지위, 권력, 이데올로기 등도 추가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교회와 하나님도 대상이 된다. 이 모든 대상관계에는 원초적 모자 관계가 기초하고 있고, 또한 끊임없이 반복되려고 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살이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단순하고 확고했던 어머니와의 의존관계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어머니나 어머니로 표상되는 가정의 품이나 고향, 자연의 품, 종교적 안식처로 돌아간다. 이들은 우리를 안식하게 해주고, 먹여주고,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보아 주고, 키워주는 대상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 없는 아이"같이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자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실감 극복-사랑>

이 모든 상실을 무효화 할 수 있는 것이 의존의 제공, 바로 사랑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자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 사회에 분노와 폭력성이 증가해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의존하여 살아갈 만한, 의존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우울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자살은 생각할 수도 없는 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행복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이 점에서 한국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명백해 진다. 절망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웃에게 신뢰와 돌봄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실의 증가에 대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탓을 하기보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정부의 투자를 요구하기보다, 바로 자신이 옆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들에게 평소 신뢰와 돌봄을 베풀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응급전화 제도가 훌륭하다 해도,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 돌봄의 정신이 없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자살기도자를 진정으로 도울 수 업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일수록 좋다. 공식 행사를 통하거나 단체로 하기보다, 한 사람의 어머니가 한 무력한 어린아이에게 하듯, 쉽고 단순한 말로 그리고 확고하게 신뢰와 돌봄을 표시해야 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듯, 손길과 눈빛과 목소리로 사랑을 표시해야 한다. 우리 모두 다 같은 인간으로서 똑같이 무력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충분히 해 낼 수 있고 또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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