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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인내와 인간의 완악함 (렘15:1-2) /존 칼빈

baromi 2008. 9. 21. 20:30

하나님의 인내와 인간의 완악함 (렘15:1-2)

 



칼뱅의 초상
우리 주님은, 그가 유대인의 포로에 대해서 더 이상 치료책이 없음과 그가 내린 언도가 시행 되어야 함을 선언하신 뒤, 다시 말해 이 백성이 포로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신 뒤, 선지자 자신이 그들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선지자가 판결을 포고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시려 했음을 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네가 말씀을 선포할 때, 그들로 장난처럼 여기게 하지 말고, 네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케 하라.' 우리가 받는 훈계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또는 그의 선지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것이 우리가 견뎌야 할 위협이건 책벌이건, 우리는 그것을 우화로 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포되는 모든 교리에 어떻게 감동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말할 경우,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데 게으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위협에 대해 말할 경우, 결코 절망하지 맙시다. 또한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하지 맙시다. 그가 우리의 정결함에 대해 모른 체한다 해도, 그가 자신의 말씀을 잊었다고 생각지 맙시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기억 속에 새긴다면, 확실히 그 교리에서 훨씬 나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들을 때, 마치 이것이 우화인 것처럼 그냥 흘려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음이 있는 만큼, 그가 우리를 벌하겠다고 위협할 때 우리가 그것을 예방하지 않는 한 우리 머리 위에 연타를 가하실 것임을 배웁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백성을 내어 쫓으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이 일을 행하기 위해 군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들을 이끌어 이 일을 수행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1.징벌의 가혹성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실 때, 끔찍할 정도로 엄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강한 힘을 퍼부으실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사실 때때로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마치 공중에 매달아 놓아 거의 타격을 느끼지 못하는 식으로 처벌하시며, 처벌하신 후에도 그는 우리로 지나간 악을 잊게 하는 어떤 완화제, 즉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주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기다려야 할 징벌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망하는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나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 너희의 보호자가 아님을 밝히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징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그가 사용해오지 않던 가혹함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징벌이 필요한 까닭
이것을 통해 우리가 받는 경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로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징벌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오직 가르치기만 한다면 우리는 너무 굼뜨기 때문입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학생이라면 그에게는 가르치는 것만이 필요하지만, 길들여지지 않는(rude) 학생에게는 가르침과 더불어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나귀인지라, 하나님은 언제나 회초리를 세워 우리를 자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징벌 받는 것이 필요함을 보면서, 하나님이 관용 가운데 그렇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심판관으로 좌정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여기서 우리에게 알리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극도의 가혹함으로 유대인들을 징벌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동일한 처지(dignit)에 있으며, 우리의 삶이 너무도 불행해서 그곳에 부정(iniquit)의 심연이 있음을 발견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의(不義)에서 우리가 그들과 닮았음을 보면서,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음을 보면서, 그가 동일한 처벌로 우리를 벌하실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흩어진 가련한 자들처럼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방인처럼 여기고 우리를 향해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어마어마한 처벌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전에 행했던 대로 계속해서 그에게 범죄 한다면, 우리는 그 처벌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마치 벼락처럼 들어야하는데, 이는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그의 강한 손을 기다리지 않고 그가 우리에게 그런 극단적인 가혹함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2)징벌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그는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램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너희가 새와 짐승과 개에게 먹히울 때, 너희에게는 이것이 우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너희가 그것을 우연으로 돌릴 것이나, 그러나 이것이 내 손으로 된 것을 알라." 요컨대 선지자는 성경에서 그토록 자주 우리에게 제시되는 사실을 밝히고 싫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은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우려 가운데 선의 연합이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피조물들이 일어나 우리를 대적할 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들의 고삐를 느슨하게 하고 이 짐승들에게서 우리에게 대한 복종을 제거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질서가 깨어지지 않을 때 그들이 인간에게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명심하되, 성경에서 그토록 자주 기억하게 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합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런 재앙을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그것이 그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런 생각을 우려의 허망한 마음에 단번에 새겨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한, 일어나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합시다. 검(glaive)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바, 하나님이 먼저 검을 쓰도록 충동질하지 않는 한, 사람의 손이 우리를 대적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떻게 모든것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되는가를(설명합니다). 때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이런 생각으로 돌아가서 일어나 사람들을 대적하지 말고, 이 일을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되 우기가 그에게 범죄 했으므로 이유가 없지 않음을 깨달읍시다. 이것이 본 구절에 관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처벌할 여러 가지 방법을 갖고 계시며, 설령 우리가 검에서 피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복으로 가득한 상자를 갖고 있다고 말씀할 때, 우리는 즉각 다른 것에 빠질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떤 처벌이 지난 뒤에도,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지? 이런 재앙은 그렇게 빨리 다시는 오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면서) 방탕하는 일과 더욱 나쁘게 행하는 일을 스스로 허용하고, 하나님이 백 가지 방법을 쓰신 뒤에도 여전히 다른 백 가지를 갖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검을 보낼 뿐만 아니라 새와 가축과 들짐승을 보내사 우리를 먹어치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네가 너의 집에 편안히 있을 때 내가 뱀을 보내 너를 물게 할 것이요, 네가 들로 나간다면 짐승이 너를 먹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으로서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역경에서 건지시는 방법들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그가 우리를 진노 가운데서 벌하시려 할 때, 그에게 우리가 아직 익숙지 못한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징벌을 내리시는 이유
이것이 이상하고 혹독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 일을 정당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회초리만 밝히신다면, 다시 말해 그가 우리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개와 새와 짐승에 대해 말한다면, 이것들이 우리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처럼 처벌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덧붙입니다. "오 예루살렘, 너를 불쌍히 여길 자 진정 누군가? 너를 위해 슬퍼할 자 누군가? 가서 네 평안을 위해 빌자 누군가? (여호와에서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여전히 나를 반역했으므로 그토록 너를 아끼는 것이 괴롭다"(15:5-6). 첫째로 그는 이 일이 어째서 그들에게 일어나는지를 기억나게 하면서 말하기를, "유다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요컨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처벌을 밝힌 뒤, 그들이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고 첨가합니다. 만일 우리가 무죄하다고 여겨지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진노로 놀라게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통하며 이를 간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협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합니다. 우선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함이요, 다음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생각하고 스스로를 싫어하여 이 회개가 우리로 하나님을 부르는 갈망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위협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1)므낫세와 백성의 죄악
첫째로 므낫세가 언급되는 이유를 봅시다. 성경 열왕기와 역대기에 기록 되기를 므낫세는 무너진 제단들을 자기 시대에 다시 세웠고,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길 원했던 그 하나님의 전을 오염시키고 대신 하늘의 별들을 불렀으며, 나아가 자기 곁에 마술사들을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모든 미신들에 빠졌고 이내 우상숭배가 뒤따랐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수 많은 선지자들을 죽여 예루살렘이 그들의 피를 흘렸고, 술 취한 자가 포도주를 토해내듯이, 예루살렘도 순교자들의 피를 토해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그는 숱한 악 을행하고 무고한 자의 피를 사방에 흘린 불행한자로서 모든 백성의 파멸의 원인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여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왕좌에 다시 앉아할 수 있는 한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자리로 돌려놓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강퍅했고 그들이 섬긴 우상숭배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이 므낫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한사람의 잘못 때문에 백성이 처벌받는 것이 적법하냐고 묻는다면, 여기에 그 죄가 특별히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않고 군주와 더불어 악에 빠진 백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므낫세가 백성을 타락시키는 원인 제공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백성이 그것에 동의했고 우상숭배에 오염되었습니다. 만일 백성이 그것에 저항했다면, 이 악한 사람은 혼자 처벌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사람의 잘못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잘못에 대한문제입니다. 따라서 므낫세가 그토록 오래 통치한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없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악인이 통치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우리가 선한 인물들에 의해 다스려지기에 합당치 않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우리에게 선한 위정자를 준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그의 긍휼을 보이기 원하신다는 표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탄에게 내어주실 때, 그는 그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엄격함을 증거 하십니다. 이처럼 히스기야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그는(=히스기야) 하나님이 신실하게 경배 받으시도록 노력했고 군주의 직무를 선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변했던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은밀히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완악한 왕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만일 백성이 얌전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했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한 왕을 주셨을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처럼 방탕할 때, 그들에겐 악한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위정자의 중요성
게다가 선지자가 므낫세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훈계는, 악한 군주들이나 위정자들이 있을때 이것은 나라 전체를 전염시키는 '독‘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것을 봅니다. 비록 왕이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그의 백성을 이끌기 위해 할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억지로라도 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의 문제에 있어서, 악한 군주가 있을 경우, 우리는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에, 그가 손가락질만하면 즉시 그를 따르게 됩니다. 위정자들의 경우가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상을 만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악인들에게 "오라, 오라 우리가 너희를 도우리라!"고 말하며, 그리고 모두가 즉시 방탕해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므낫세의 작품이라고 언급되는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휩쓸렸다 하더라도, 그 씨가 이 악인에게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권위있는 자들 중 백성을 망하게 하는 악인을 허락하시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위정자들이 악에 이끌리는 즉시 모두가 방탕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생길 때 이것이 우리의 죄로 인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임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는 변명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가 유죄한 것을 인정합시다. 나아가사 사법권에 있는 사람들은 저들(위정자들)을 잘 살펴야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악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이교도들조차 잘 말할 줄 알았듯이, 악을 행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에 정의의 지팡이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게으름으로 인해 생길 모든 잘못들을 하나님과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에 더듬거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므낫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자녀들은 나무를 줍고 어미들은 우상들을 위해 과자를 만든다"4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잘못이 왕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것은 그가 이 악을 끄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도와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포기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그가 회개에 이를 때까지 셈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행한 회개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그가 우상 숭배를 폐기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는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런 권력을 행사했지만, 백성이 미신에 빠져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왕을 보십시오. 그는 그가 악에 빠질 때 모든 백성을 쉽게 타락시켰으나, 그가 그들을 옳게 인도하려 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3.하나법의 인내와 민찬의 완악함
이점에서 우리는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훈계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난 뒤, 좋은 모범을 보이면서도, 백 명을 파멸로 이끈 대신, 그 중 세명도 되돌려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이 우리로 회개케 하여 자비로 우리를 모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타락시킨 자들을 다시 세울 수 없을 때 우리가 갖게 될 후회를 인식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갖게 될 끔찍한 양심의 가책이 아닐까요? 이곳이 선지자가 우리를 데려오고 싶어 했었던 곳입니다. 므낫세 왕은 모든 백성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명예를 짊어져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백성의 방탕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가 맨 먼저 명명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이켜 회개하는 방법들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일로 책망받게 되리라는 것을 주지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아끼는 것과 뜻을 돌이킨 것을 후회한다“(렘 15:6)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이 백성을 지속적으로 경고하시고 선지자 위에 선지자를 보내시기를 결코 그치지 않으셨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는 마치 신명기 18장에 '내가 너희 중에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겠다"5고 기록된 것과도 같습니다. 백성 중예 항상 선지자를 세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그들에게 말하는 신들이 있다고 반박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모른 채 있어야 합니까?”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 너희는 선지자들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너희를 경성시키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고 늦게 누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무감각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위협이 특정한 시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오랜기간 그들을 경고했음을 주목합시다. ”너희는 셈을 치르러 와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너희를 살펴라."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조롱했을 뿐 입니다. 그들은 매우 엄하게 책망 받을수록, 선지자들을 더욱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그들의 무기로 훈계하여 말했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어떠한가? 그들이 타락하지 않았는가? 정의가 어디 있는가? 너희 중에 있어야 할 충성은 어디 있는가? 너희는 모든 악으로 가득차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것이 이를 갈고 분노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보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이들이(선지자들) 개에게 말하는 것 같네! 이렇게 꾸지람 듣는 것을 우리가 참을 것인가? 아닐세, 결코 아닐세!" 그리하여 선지자들이 주님의 직무를 말하며 "너희가 행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 무어라고? 주님의 직무? 이보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끌려가야하나?”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교황 체제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말합니다. 악인들은 그들에게 행해지는 설교들을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짓누르시지 않을 때면 그들은 조롱자들이 됩니다. 그들은 분노하여 이를 갑니다. "어쩐 일인가? 이들이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외쳐댈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잘모르는가? 이보게! 충분히 참고 견뎠네! 복음을 빙자하여 그렇게 외친다고? 호! 우리는 여기서 이런 복음을 원치 않으니, 다른데나 찾아보게!“


우리는 이 악인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히나님은 “내가 너희를 용서하기에 지쳤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별안간에 책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작년에는 하나님이 오늘처럼 위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떤 변명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린아이도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아 알면서도 하나님의 눈이 가려졌고 아무것도 못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 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결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
따라서 선지자는 므낫세의 행적에 대해 언급한 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냐?”라고 덧붙입니다. 명백히 그는 이 거룩한 도시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다 나라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예루살렘이 그분께 바쳐졌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그곳에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유대인)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유익하게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악으로 바꾸면 바꿀수록,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저주로 바꾸면 바꿀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유죄하다는 것을 인식합시다. 그가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냐?”라고 말할 때, 그는 사람들이 변명을 늘어놓았음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머리를 숙여야 함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처벌하실 수 없음을 알기에, "네가 나를 버렀다“(15:6)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화법을 보았습니다. 사실 선지자가 이것을 자주 사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 악의 원인이 우리에게 밝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갖 악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뿌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오늘을 잘 산다면 내일 유익을 얻을 것이나,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면 온갖 혼동에 빠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선지자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명확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눈앞에 그의 불의를 드러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보면서 마땅히 떠는 반면, 사람들은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제의 불평의 문제가 아니라 어제 술 취한 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강단에서 이것을 언급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다시 방종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위엄을 보이사 그들을 혼돈스럽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은 스스로를 겸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구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다른 데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유일한 은신처를 그에게 두어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려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를 영접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날마다 끊임없이 그에게 범죄하는 우리의 잘못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의 선한 하나님의 면전에서 부복하여, 우리가 참되고 생생한 지식에 접하는 것을 기뻐하시되, 이런 지식에 기가 꺾인 우리를 생생한 소망으로 다시 일으키사 우리가 그에게로 돌이키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는 그가 모두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찾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지향하지 않음을 증거 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백성과 모든 나라에게 주시기를....

주(註)
1.이 마지막 문장은 성경 본문엔 없으며, 칼뱅이 첨가한 것이다.
2. au quatriesme des Roys et aux Cronicques은 칼뱅의 잘못된 인용이다. 바른 인용은 왕하21:1-18과 대하 33:1-20이다.
3.대하 33:13-16.
4.램 7:18
5.신 18:15
6.렘 7:25-26,11:7-8; 29:19; 35:14-15; 44:4-5 참고.
7. Ami Perrin에 가담한 리베르탱파(libertinus)를 지칭하고 있다.
8.제네바 민족사라는책에 보면, 1549년 6월 25일에 몇 사람이 밤에 칼뱅과 다른 사역자의 집에 가서 행패를 부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설교 전날 6월 23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본문으로 볼 때 불평한 사람들과 술 취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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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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