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죽음, 십자가 그리고 피 / 어거스트 반 린

baromi 2008. 8. 16. 07:10


이 세 가지 용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들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마치 한 가지 일을 다소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때때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들은 비록 연관은 있지만 전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나 또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고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고전 15:3) 또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롬 5:6)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된 우리의 죄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는 신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메시지를 얼마나 전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사람이 주님께 행한 일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사람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자기의 추악함을 드러냈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심으로 그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내신 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흠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고, 우리의 죄를 지시고 끔찍한 심판 아래로 나아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주님께 행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주님의 죽음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빌라도와 같이 악한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십자가에 써넣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께 한 칭호를 주셨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칭호이며 '예수'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다메섹 근처에서 소경이 되어 놀라는 핍박자인 다소의 사울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금 그에게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이 지금까지 얼마나 두려운 실수를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여, 내가 무엇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여"라고 부른 것은 우리에게 그 두 이름이 같은 분을 가리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되며 모든 입으로 그분을 예수라 시인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주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신 주님께 우리가 언제나 깊은 경외심을 갖기를 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제나 죄의 문제와 그리고 죄인들과 연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구주로 신뢰하게 하셨으며, 또한 죄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우리가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영과 혼과 몸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살전 5:23)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죄인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신자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죄를 없애주신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는 내 자아를 없애 주십니다. 바울이 이것을 매우 잘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의 죄가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이 진리가 왜 그렇게 별로 강조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자아"를 없애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천천히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매달려 고통을 받는 자가 구경꾼들의 모욕에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움과 모욕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여섯 시간 동안 그러한 고통을 당하셨으며, 신자는 영적으로 그 부끄러움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모욕에 동참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으며(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는 그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갈 5:24). 신자들에게 십자가는 그 상황에서 자아를 없애 버리라는 엄숙한 메시지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내가 사는 것은(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십자가는 고린도전후서에서 일곱 번,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일곱 번 언급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서신서에서는 합해서 다섯 번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고린도는 성도들이 죄악된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갈라디아에는 죄악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선한 행위를 더하는 가르침). 고린도전후서에서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가 죄악된 자아를 없애주기 때문이며,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가 도덕적인 자아를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선하든 악하든 그 상황에서 자아를 없애줍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죄받은 사단을 보며(요 3:14), 심판된 세상을 봅니다(갈 6:14)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자신도 봅니다. 십자가는 주님에 대한 사람의 평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히 13:13).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말해주며, 십자가는 자아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피는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의 놀라운 가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9:33-35에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한 군병이 조금 전에 이미 죽은 그 거룩하신 몸을 찔렀을 때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든 그 시체에서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부터 몸이 차가워지고 피가 응고되기 때문에 피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죽으면 시체가 썩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썩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행 2:27). 그래서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체로 임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홀로 이 이적을 기록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신지 믿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피는 그분이 누구신지 말해주는 것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누구이신지에 우리의 주의를 모으도록 "그리스도의 피", "주님의 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피를 "자기의"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행 20:28; 히 9:12; 13:12; 계 1:5).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흘리신 이 피가 매우 특별한 것임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피는 그분의 생명과 연관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피를 "보배로운"(값을 매길 수 없는) 피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자기의 죄를 위해 다른(짐승들) 피를 드렸습니다(히 7:27). 그러나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자기 피를 드리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죄인에게 피를 바른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발랐습니다. 제사장에게 피가 발라졌는데(출 29:20),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이 제사장들은 오늘날의 신자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레위기 14장에서는 깨끗하게 된 문둥병자에게 피를 발랐는데 그는 물론 구원받은 죄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피는 "구별된" 수양의 피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에게 발라졌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값주고 산"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구별을 위해 즉, 주님을 섬기도록 구별하기 위해 발라진 것입니다. 이 피는 귀와 손과 발에 발라졌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뜻을 행하며, 주님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도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린다는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 및 구원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자들과 자기부인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는 전적인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프랜드에서 펌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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