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역사적 입장에서 본 오순절 성경세례사건
박 형 용 교수
Ⅰ.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의 단회성과 그 의의
성령은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사역하신다(엡 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역에 관한 견해의 차이로 교회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음도 사실이다. 같은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서로 달라지게 된다.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 필자도 아전인수 식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해석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필자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연구할 때는 성경을 의존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 주제를 성경에 의존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성령 체험을 해야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하나님이신 성령이 성경의 제한에 속박될 수 없다는 생각에 근거하거나, 성령의 사역에 관한 성경의 설명이 불충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며 성령의 사역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사실상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성경 이상으로 더 좋은 자료가 있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공적인 계시와 사적인 계시로 나누어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66권의 공적인 계시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성령의 사역을 논해야 하는 것이다.
1. 성령 세례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교통정리
오늘날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사용된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잘 정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세례라는 용어는 자주 나타나지만(동사 80회, 명사 22회) 성령과 세례가 같이 사용된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성령과 세례가 같이 나타난 곳은 복음서에서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이며 사도행전에 1:5과 11:16이요 바울서신에 고린도전서 12:13이다. 여기 언급된 성구들을 분석해 보면 복음서의 성구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라고 말한 내용이다.
마 3:11, 막 1:8, 요 1:33의 내용도 같은 말씀을 기록한 병행 구절들이다. 그리고 행 1:5와 11:16의 경우는 행 1:5이 눅 3:16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이요, 행 11:16은 행 1:5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세례가 함께 사용된 성경 구절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성경 구절들은 눅 3:16, 행 1:5, 그리고 행 11:16이다.
이상의 세 구절을 보면 눅 3:16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사역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한 말이요, 행 1:5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세례요한의 말을 상기하면서 오순절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요, 행 11:16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나타난 사건을 유대인들에게 설명하면서 행 1:5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집중적인 관심을 두어야 할 성경 구절은 예수님 성역 초기에 언급한 세례요한의 말인 눅 3:16과 부활 후의 예수님의 말씀인 행 1:5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고전 12:13로 좁혀진다. 다른 복음서의 성구를 택하지 않고 누가복음의 성구를 택한 이유는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되 마치 1권과 2권 혹은 전편과 후편 식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실은 눅 3:16이나 행 1:5 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 초기에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 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눅 12:49~53).
세례요한의 말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다(롬 4:25). 그런데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속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부활체로 이 땅위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 읽더라고 사도행전의 맥락으로 볼 때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인 오순절 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행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성령 세례 사건이었음을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오순절 사건이 “성령 세례 사건”이라고 증거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성구는 고전 12:13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의 내용을 맥락에 비추어 해석할 때 여기에 언급된 성령 세례가 행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록 성령 세례라는 같은 표현이 행 1:5과 고전 12:13에 같이 나타나지만 그 용도가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고전 12:13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키지 않고 개인 성도들의 구원 체험의 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전 12장의 문맥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고전 12:13은 몸의 부분이 되기 위해 성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으로 비교하면서 몸에 여러가지 부분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여러가지 직분과 은사들이 있고 인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지만 “우리가” 같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바울은 교회가 여러가지 특성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되지만 같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 지나야 할 경험이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 세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행 1:5이나 고전 12:13을 아무 구별 없이 취급하기보다는 성구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바로 포착하여 구별지어 줌이 성령 세례 문제를 논하는데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볼 때 행 1:5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과 연관시켜 고찰해야 할 행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행 1:5은 구속 역사적인 전망으로 다루어야 할 구절이다. 반면 고전 12:13은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성령과 세례가 같이 사용된 성구라 할지라도 눅 3:16이나 행 1:5은 오순절 사건(행 2:1~4)을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고전 12:13은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행 2:1~4)
(1) 구약 예언의 성취
구약에 예언된 대로(욜 2:28~32, MT 3:1~5) 그리고 예수님의 예고처럼(요 14:16,26; 16:7~14)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후에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이 발생한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오순절은 곳곳에 흩어져 사는 많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즐거운 축제의 날이다. 유월절이 속박의 땅에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면, 오순절은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오순절의 축제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잔치이다.
이런 축제의 날에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이 발생했다.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상황으로(행 2:2) 그리고 볼 수 있는 상황으로(행 2:3) 전개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러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구속 역사적으로 볼 때 바벨(Babel)탑의 저주가(창 11:1~9)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극복된 것이다. 이와 같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자 오순절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심히 놀랐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행 2:7~13).
베드로는 어떤 이들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한 것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한 사실에 대하여 행 2:15 이하에서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제자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님을 변호한다. 베드로는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다”(행 2:15,16)라고 말하면서 요엘서 2:28~32(MT 3:1~5)을 인용한다.
요엘서의 예언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요엘서의 예언은 오순절이 종말론적인 사건이며, 마지막 날의 시작임을 명백히 한다. 베드로는 구약 요엘서를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행 2:17~18과 행 2:19~20 사이에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προφητε?σουσιν)을 첨가한다.
그런데 행 2:17~18과 행 2:19~20의 내용을 살펴보면 눅 3:16에서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한 반면 행 1:5에서는 오순절을 가리키면서 “성령의 세례”라고만 묘사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행 2:17~18
1)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2)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3)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요
4)남종과 여종들은 성령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20
1)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가 있을 것이요
2)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행 2:17~18은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행 2:19~20의 내용은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행 2:19~20은 오순절 사건을 초월한 내용으로 종말의 마지막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동일한 어조의 말씀을 성경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7,10). 계 6:12에도 진노의 날을 묘사하면서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된다는 내용과 아울러 극적인 사건들이 마지막 날에 발생할 것을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묘사가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는 말씀과 함께 나타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하면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고 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사역이다. 성령의 세례는 축복의 세례요 불의 세례는 심판의 세례이다. 이는 두개의 세례가 아니요 한 세례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행 2:17,18에서는 오순절에 발생한 성령 세례가(행 1:5) 신자들에게(교회에게) 주신 축복의 세례로 묘사되어졌고 행 2:19,20에서는 심판의 세례가 장차 불신자들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으로 언급된 것이다.
요엘서를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한 베드로는 구약 예언이 어떻게 취급되어져야 하는지 그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것은 신약의 전망으로 구약 예언을 다루는 예이다. 베드로의 해석은 요엘서의 예언 가운데 나타난 장시간의 간격을 가진 두 사건을 한꺼번에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같다.
즉 강림의 첫째 요소가 오순절 사건이요 둘째 요소가 마지막 심판의 사건인데 베드로는 망원경으로 이 두 요소를 한꺼번에 본 것이다. 비록 본문 내에 두 사건을 떼어놓는 시간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문 내용의 통일성이 파괴되거나 그 구조가 흐려지진 않는다.
오순절 사건과 마지막 심판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시간적 긴장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강림의 두 면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왕국 교훈이나 바울 서신에서도 한 강림의 두 면을 보여준다. 즉 “현재”와 “미래”의 이중적 초점, “이미”와 “아직”의 이중적 초점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오순절을 설명하는 부분(행 2:17,18)과 심판의 사건을 설명하는 부분(행 2:19,20) 사이에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κα? σπροφητε?σουσιν)를 첨가한다. 요엘서의 내용 속에는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을 행 2:17,18과 행 2:19,20 사이에 첨가함으로 17,18절과 19,20절의 강조가 다른 것을 명백히 했다. 베드로가 구약 예언 전체를 볼 때 그 예언이 특별한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18절 끝에 가서 무엇을 삽입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세례의 다른 면인 심판의 요소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있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행 2:21).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을 면제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이 성도 개인의 구원 체험을 위한 사건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큰 획을 긋는 사건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 유일한 특성을 가진 사건인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증언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즈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고 예언한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는 세례의 사역이 될 것임을 증거 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게 된 이유는 군중들의 마음속에 생긴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였다. 군중들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보면서 이 사람이 대망했던 그리스도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눅 3:15). 이스라엘이 대망했던 종말론적 통치를 시작할 그 분, 즉 약속된 왕국을 성취할 분이 바로 요한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군중들의 이러한 생각은 구약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메시야 대망 사상에 그 뿌리를 둔 것이며 세례요한의 대답은 그러한 사상에 부응한 대답이었다.
세례요한의 대답은 자신과 예수님의 왕국에 대한 입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비교된 것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도 아니요 요한의 사역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심 되는 활동이 세례의 사역임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설립하실 왕국의 특징이 세례라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준비적인 사역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다. 여기서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음을 본다. 요한은 무리들이 대망하는 ‘메시야-왕’이 아니며 단순히 그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 물세례를 준다고 했다(눅 3:4~6).
세례 요한은 무리들이 대망 하는 ‘메시야-왕’은 자기 뒤에 오실 분으로 능력이 많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말했다. 세례요한의 말에 나타난 내용은 자신은 오로지 외적이고 준비적인 세례를 베푸는 자요 그리스도는 내적인 정화와 재생을 가져오며 진정한 세례를 베풀 자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즉 왕국 활동을 전체적으로 관찰할 때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중심 되는 특징을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례요한은 외적이며 상징적인 물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내적인 참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풀 성령과 불의 세례는 두 가지의 세례를 가리키기보다 한 세례의 두 국면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을 하나의 전치사 (?ν)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누가가 두 세례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썼다면 전치사를 따로 사용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풀 성령과 불의 세례는 하나의 세례로 축복의 국면과 심판의 국면이 있음을 뜻한다. 즉, 성령의 세례는 축복의 국면이요, 불의 세례는 심판의 국면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축복의 세례와 심판의 세례를 같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히 9:27) 때문에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고 또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히 9:26)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의 세례인 것이다.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할 그곳에서 예수님이 대신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수님이 받을 세례로 표현한다. 막 10:38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의 말씀이나 요 10:11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임을 확실히 한다.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우리의 죄 때문에 받으신 심판의 세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님께 접붙임 받은 사람들은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 받아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심판의 세례를 받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오순절 사건을 가리키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것”(눅 3:16)이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심판의 세례를 받으신 후 오순절 사건에 대해 설명한 때는 불의 요소 즉 심판의 요소는 제거되고 오로지 “성령으로 세례”(행 1:5) 받을 것만 말씀하셨다.
“성령과 불의 세례”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면서 “성령의 세례”로 변화된 것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받을 심판의 세례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자들은 심판의 세례를 면제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 세례 사건은 축복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신 사건인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사상의 흐름을 한 저자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눅 3:16; 12:50; 행 1:5; 2:1~4)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개한 주장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례요한의 말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을 연관시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그의 백성에게 축복의 성령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죄문제를 해결하는 십자가의 심판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성취한 구속 사건들, 즉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가운데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3) 예수님의 증언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움직이는 생애이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도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복음서에서 더듬어 보면 십자가로 향한 이 길을 막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아름답고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막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쓴 잔임을 잘 알면서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혹독한 책망을 하셨다. 이처럼 십자가로 향한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 자신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생각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요 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면 다른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요 제자들에게는 손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하고 부활하신 후 다른 보혜사 즉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여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시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임함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을 명백히 하셨다(참조. 요 14:18).
여기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이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부활, 승천을 오순절 사건과 밀접히 연관시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오순절 사건도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구속적 사건들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고 또한 역사상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발생하게 계획하심으로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이 단순히 한 개인 성도가 경험할 모델로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 진행 중 하나의 귀중한 사건으로 역사상 발생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뒤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사건이 있지만, 앞으로는 예수님 재림 전까지 펼쳐질 신약 교회의 복음 전파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Ⅱ. 후속 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행 2:1~4)의 단회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면 뒤따라오는 질문은 사마리아에서 발생한 성령 강림의 사건(행 8:4~25)과 고넬료 가정에서 발생한 성령 강림 사건(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에서 발생한 성령강림사건(행 19:1~7)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이다. 이제 이 문제를 개별적으로 연구하도록 한다.
1. 사마리아에서 발생한 성령 강림 사건(행 8:4~25)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사도들을 제외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행 8:1).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예루살렘 밖의 다른 지역에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누가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는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빌립은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행 8:4~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이적을 행함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함을 믿고 세례를 받아 신자들이 되었다(행 8:12). 그런데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파송 되어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행 8:15)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의 믿는 자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한 이유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기 때문이다”(행 8:16)
(1)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과 일치
우리는 사마리아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는 누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또한 사마리아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구속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행 1:8)까지 전파되어 나가고 있음을 알리기 원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으로 교회가 설립되고 그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지역에 전파되므로 주님의 선교 명령의 첫번째 부분이 사실상 성취되어 졌으며, 이제 그 다음 단계인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음을 기록한 것은 누가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강조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구속적 복음은 사회적 신분이나 인종적 장벽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시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과 증오를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깊은 감정의 골로 나뉘어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가 사마리아에도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이 오랜 기간 싸여온 역사적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의 유대인적 자만심을 버리고 사마리아에 있는 성도들을 한 형제로서 맞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사도들의 위치와 교훈의 중요성
누가가 행 1장에서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충원할 때 사도의 자격을 두 가지로 정리 요약한다. 사도의 첫째 자격은 주님을 추종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지상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동행한 사람이어야 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행 1:21~22)라고 하신 말씀에서 배반한 유다의 계승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추종한 제자여야 했다.
사도의 둘째 자격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다의 계승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의 서클에 포함되어 있었던 사람이어야 한다. 누가는 유다의 계승자를 택하는데 필요한 두가지 자격을 명시함으로 본문에서의 사도는 단순히 교회 내의 어떤 기능을 성취하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요,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정도의 사람도 아니며, 본문의 사도는 복음 전통의 보증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전달된 계시의 말씀을 왜곡됨 없이 보존하고 전달해야 한다. 누가는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누가가 사도의 자격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행하고 가르치신 내용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함을 모두 포함시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누가가 예수님의 공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의 증거를 사도의 자격으로 말한 것은 말씀 계시의 기록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계시를 주셨다(히 1:1~2).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은 일과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마지막 계시로서 영원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신약 성경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상태요, 그때로부터 상당 기간(약 30년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말씀 계시를 바로 기록할 수 있다. 사도들은 예수님 당시로부터 신약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말씀의 보존자, 말씀의 전수자, 그리고 말씀의 선포자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의 사도들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행 8:14)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사도행전 기록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과 바울 회심 사건(행 9:3~18)에서만 열 두 사도의 역할이 언급되지 않고 그 외의 사건(사마리아 사건, 고넬료 사건, 에베소 사건)에서는 성령 강림의 현장에 사도들의 중보자적 역할이 있었음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누가는 복음이 확장되어 나가는데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 한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기도하고 안수하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행 8:15, 17, 18) 교회 확장에 있어서 사도들의 권위가 중심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도들의 권능과 권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사도들이 신적인 진리의 통로였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 가운데서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함으로 복음의 전파에 진전(사마리아)이 있게 하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의 통일성을 확고히 하신 것이다.
(3) 사마리아에 강림한 성령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성령 받도록 기도하고 안수하매 비로소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그런데 누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 8:16) 세례를 받은 후에 사도들의 방문을 받고 성령을 받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후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았다고 증거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먼저 믿은 후 그 이후 어느 시점에서 성령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초대 교회 당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또한 죄 용서함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2:36~38; 3:15~19; 5:30~31).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강조되었다(행 2:31~32; 3:15~21; 4:10, 33; 5:30~31; 7:52~56).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고 회개한 후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예수 믿는 시점과 성령 받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 신학자들은 사마리아 사건과 다른 사건(행 2장 사건도)을 근거로 선 중생 후 성령 세례의 구도를 주장한다. 하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어떤 한 개인의 구원 패턴이 되게 하기 위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공생애 사역을 승천까지 기록했고,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승천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마리아에 강림한 성령의 사건을 이해할 때도 구속 역사의 진행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예수 믿은 후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성령 강림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더 넓은 문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λ?μβανον πνε?μα ?γιον). 그리고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므로 시몬이 그 장면을 목격한 후 돈을 드려 권능을 사기를 원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르쳐 주는가? 시몬은 성령의 역사의 외적인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으면 유익할 것같이 생각하여 돈을 드려 그 권능을 사고자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강한 외적 역사로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완고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빌립의 세례를 받을 때 예수를 믿었고 따라서 성령도 받은 사람들이었다(참고, 고전 12:3; 롬 10:9~10, 17).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이 방문했을 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외적으로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경을 너머 사마리아까지 전파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사마리아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에 접붙침시키는 역할을 했다.
2. 고넬료의 가정에서 발생한 성령 강림 사건(행 10:44~48; 11:1~18)
하나님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방 전도를 준비하고 계셨다. 행 10장 전체와 행 11:1~18은 이방인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고넬료의 회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방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질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 고넬료 사건은 사도행전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행 15장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과 연계시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방인들의 구원 조건에 할례를 첨가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행 15:1 참조)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경험으로 하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8~9)라고 말한 후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라고 증거 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나님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방 전도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이다.
(1) 사건 경위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고넬료와 베드로를 서로 만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청하라고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친절을 베푸셔서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신다(행 10:5~6). 하나님의 이런 계시의 방법은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하나님은 베드로의 구별 의식을 깨고 계셨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시장함을 느낄 때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보자기 안에는 각색 네 발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에 베드로는 “일어나 잡아 먹으라”(행 10:13)는 소리를 들었다.
베드로가 나는 결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겠다고 항의하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하셨다. 환상은 세 번 반복되었고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신이 베드로에게 와서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 같이 갈 것을 간청했다.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시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방금 계시를 받은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가서 고넬료와 그 가정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했다(행 10:43).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할 때에 특별한 기도도 하지 않고, 사도들이 요청도 하지 않고, 안수도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지체없이 새로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행 10:44~48).
(2) 고넬료의 가정에 내린 성령
성령의 임함은 베드로가 설교 할 때에 고넬료 가정에 임했다. 그런데 고넬료 가정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는 기독론 중심 설교였다(행 10:34~43). 베드로의 설교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실은 우선 초대 교회의 메시지의 근거가 역사적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음을 증거하고, 또한 역사적 예수를 통해 성취한 사역과 성령의 강림이 무관하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하신 사실과(눅 3:21~22; 참조, 행 10:38)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되어졌음을 증거 한다(참조, 눅 4:1; 마 12:28).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확장해 나가신다(행 10:38; 참조, 사 61:1~2; 눅 4:18~21).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귀로 이어진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증거 한다(행 10:39). 베드로는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적용되어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리셨음을 증거 한다(신 21:22~23; 갈 3:10~13; 벧전 2:24 참조). 베드로는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셔서 승귀의 자리에 높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삼으셨다고 증거 한다(행 10:40~42). 그리고 베드로는 이와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게 된다고 설교한다(행 10:43).
누가는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증거 한다. 우리는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의 강림과 연관하여 몇가지 요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누가는 성령으로 행한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고넬료 가정에 발생한 성령의 강림이 무관하지 않음을 증거 한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의 사역을 선포할 때 성령이 강림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요 14:26),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요 16:13),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요 16:14~15)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는 고넬료 가정에 강림한 성령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계획을 성취한 사건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고넬료 가정에 발생한 성령의 임함도 강한 성령의 외적 역사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두 개의 특별한 계시, 즉 고넬료에게와 베드로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고넬료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신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똑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백성이어야 함을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신다(행 10:1~33; 11:17). 고넬료 가정에 나타난 성령의 강림은 성도가 세례 받을 때에 경험하는 보통의 방법이 아니요 특별한 방법의 강림이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임함은 외형적으로 목격될 수 있는 안수의 방법(행 8:17) 이상의 외형적 표시가 있었다. 사마리아에서는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했었다. 그러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임함은 선교의 절정을 표시하는 사건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강림 이외의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었고 또한 이런 성령의 강림은 분명한 외적 표식으로 방언을 수반했던 것이다.(행 10:46)
세째, 누가는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의 강림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철폐되었음을 강하게 증거 한다. 누가는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랬다”(행 10:45)고 전하고 베드로가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행 10:47)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한다(행 10:48). 누가는 이방인들에게 내린 성령이 유대인들에게 내린 성령과 정확하게 동일한 성령임을 언급하므로써 하나님께서 할례자인 유대인과 무할례자인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 버렸다고 증거 한다(참조, 엡 2:11~18).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은 유대인들의 구별의식을 철폐하고, 이방인들의 자기 비하 의식을 고양시킴으로 성령께서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하나님 백성만 존재함을 분명히하게 되었다.
네째,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고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처럼(행 8:14~17)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도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도구로 사용하여 발생하게 하신 성령의 역사였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행 10:41)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사도들은 복음을 맡은 자들이요, 복음의 전수자이며, 복음의 변호자들이다. 사실상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을 주도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은 처음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파된 복음과 예루살렘 교회에 주신 복음이 동일한 것임을 나타내기 원한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은 복음의 괄목한 확장이 있을 때마다 복음의 확장 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3. 에베소에서 발생한 성령 강림 사건(행 19:1~7)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계속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룰 때 반드시 다루어야 할 사건이다. 우리는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에 비추어 좀더 넓은 문맥 안에서 관찰하여야 한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을 추적하기 원했다(행 1:8).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되었다(행 2:37~47).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함에 있어서 사도행전 1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위한 준비장으로 기록했으며, 사도행전 2장부터 8장까지는 열두 사도 중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까지 전파된 사실을 기록했고, 사도행전 9장부터 12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를 위한 준비를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여주며,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 사도 중심으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을 추적한다.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고,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도록 하는 발판 역할을 했으며,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열 두 사도 중에 대표자적인 인물인 베드로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 사도를 열 두 사도와 동등한 위치에 두는 역할을하며 또한 열 두 사도와 바울 사도를 사용하여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하기 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며, 그 계획을 추적한 누가의 의도를 분명히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누가의 기록 의도에 비추어 관찰해야 만 하는 것이다.
(1) 사건 경위
에베소에 있는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행 19:1, 7)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요한의 세례는 받았지만(행 19:3)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행 19:2). 이런 소식에 접한 바울은 인내심을 가지고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행 19:4).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다. 에베소 제자들은 단지 세례 요한에게 충성을 고백한 것이다. 에베소 제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κο?σαντε?)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바울의 안수와 함께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외적인 표현은 에베소 제자들의 방언과 예언이었다(행 19:5~6).
(2)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내린 성령
성령이 바울의 안수와 함께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자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몇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에베소의 성령 강림 사건은 바울의 안수를 통해 발생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와 고넬료 가정 사건 때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처럼, 에베소 사건 때는 바울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그의 그릇으로 택하신 후(행 9:15) 바울을 12사도와 동등하게 사용하신다. 사마리아와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12사도와 관련되어 발생된다. 이제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 사건이 바울의 사역과 연계되어 발생한 것은 바울을 선택한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 두 사도와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을 확장시키시는 계획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에베소 지역의 선교는 복음의 확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은 3년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힘썼다(행 20:31).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사건은 바울의 에베소 방문 초기에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에베소 사역 초기의 성령 강림 사건은 앞으로 계속될 3년동안의 바울의 사역의 방향을 정해 주는 역할을 하며 또한 에베소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복음 확산에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 와같이 복음 선포에 중요한 에베소 지역에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나타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세째, 에베소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을 때 방언과 예언을 했다. 이는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현상들이 발생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할 때 마술사 시몬은 제자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행 8:19)라고 돈을 드려 사기를 원했다. 이는 성령 강림이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증거 한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역시 성령 강림의 결과를 외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누가는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묘사할 때 한 번도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누가는 단지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행 10:45),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행 11:15),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6)의 표현으로 세 사건을 묘사한다. 우리는 누가의 기록에서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과 그 이후의 성령의 강림 사건들과의 사이에 차이를 두고자 하는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일치된 결과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종족의 차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성령으로 한 교회만 이룰 뿐이다.
지금까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 이후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논의의 대상이 된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다루었다. 이 사건들은 누가의 기록 목적에 의거하여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있었음을 증거하며, 누가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복음 증거를 위해 필요한 단계마다 특별하게 역사했음을 증거하며 또한 복음 증거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사도들의 도움을 통한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강조함으로 전파된 복음의 순수성과 신약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Ⅲ.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과 은사의 계속성에 대한 이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구속역사적인 전망에서 관찰하면 그 사건의 유일성이 명백하게 증명된다. 그리고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진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요 예수님의 초림, 사역,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교회 설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하여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교회의 설립 쪽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획하신 것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계획하셔서 정한 때에 그 사건이 발생하게 하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유일성 주장과 함께 항상 대두되는 문제는 오순절 이후 계속되는 성령의 사역이 오순절 때와 비슷한 현상으로 발생했는데 이 계속적인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사역이 사마리아에서, 고넬료 가정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 오순절 때에 발생한 성령의 사역과 비슷한 현상으로 발생했으니, 같은 성령이 오늘날도 똑같은 현상으로 계속 역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게 들린다.
물론 성령의 사역은 계속된다. 누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시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자 아들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신 사건이나, 그 구속의 복음이 교회를 통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어떤 은사는 언제까지만 나타나고, 그 이후는 어떤 은사가 계속 주어질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순절 사건, 사마리아 사건, 고넬료 가정의 사건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아직 사도들이 생존해 있을 때의 사건이며, 대부분의 신약 계시가 쓰여지기 전에 발생한 사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사역과 오늘날 계속되는 성령의 사역을 비교하고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음의 몇가지 제안으로 우리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사도직의 단회성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12사도를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후에 교회를 설립하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도들을 준비시키신다. 예수님이 안드레의 소개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개명해 주신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으신 시점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 중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의 유명한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는 “너는 베드로라”라고 시상을 달리하여 말씀하신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교회의 설립 시기를 미래로 남겨둔 사실도 의미심장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책임을 가지고 설립된 신앙의 공동체이다(마 28:18~20; 눅 24:46~48; 행 1:8).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거는 구원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적용되며(롬 10:9~10) 그 말씀을 받는 자들로 성도들의 숫자가 확대되어 간다. 즉, 신약의 교회는 전파해야 할 분명한 메시지를 소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래로 남겨둔 상황에서 곧바로 교회를 설립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교회를 설립하셨다면 교회는 전파해야 할 특별한 메시지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의 특별한 강림이 있던 오순절에 설립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사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배반자로 탈락된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기 이전에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택해서 12의 숫자를 채운다. 그런데 성경은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을 때는 야고보 대신 다른 사도를 선택하지 않는다(행 12:2). 우리는 사도들이 가룟 유다 대신에는 맛디아를 선택하여 12을 채웠는데,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을 때는 왜 그 후계자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우리는 사도들의 활동으로 신약의 교회가 확고히 설립된 이후에는 사도들의 후계자를 계속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그 이후 사도들이 그들의 연한을 다 채웠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계자들을 계속 세우시지 않은 역사적 증거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들의 후계자를 계속적으로 세우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사도들의 후계자를 계속 세우실 필요가 없었던 것은 마지막 계시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신약 성경(27권) 안에 기록하여 객관적인 계시로 삼아 오고 오는 세대에서 교회의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삼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12사도와 바울, 그리고 사도들과 친밀한 교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영감시켜서 그의 뜻을 신약 성경 안에 기록하셨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에 권위있는 규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약 성경이 사도들과 신약 저자들이 죽은 후에라도 교회 안에서 같은 권위를 보유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방법인 영감으로 기록되게 계획한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 설립을 위해 사도들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셔서 그들을 제 2의 교회의 터로 삼으시고 신약의 교회가 튼튼히 서 갈 때 그들을 역사의 현장에서 퇴장하게 만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그들의 사명과 책임을 다 했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사도들의 지도하에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어지기 원했고, 일단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어지자 교회를 통해 자신이 시작한 천국 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살았던 사도들에게 특별한 목적을 부여하시고 그 특별한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특별한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사도들이 소유한 특별한 능력도 종료되어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 중 “사도”가 있는데(엡 4:11) 그 은사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종료되었음이 확실하다. 사도들만이 소유한 은사와 그 이후 교회가 소유한 은사의 차이가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 신약 성경 계시의 종결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과 은사의 계속성을 고찰 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신약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때때로 어떤 이는 2000년전의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이 같은 분인데 왜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를 오늘날은 제한시켜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그들은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스스로 상충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성령의 동일한 사역은 주장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신약 성경이 계속적으로 쓰여져서 28권째, 29권째, 30권째의 성경이 쓰여지는 것은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2000년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27권의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으므로 오늘날도 똑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28권째, 29권째 등의 신약 성경이 계속 쓰여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 66권을 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주시기 원하셨다. 성경이 규범이라함은 성경의 숫자가 계속 증가되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규범이 변화되면 규범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약 27권의 규범을 주셨다. 신약 성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된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어진 그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정경의 형성과정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요 역사를 주관하셔서 정경이 정경되게 하심으로 정경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영감된 자료들을 역사적 과정에 펼쳐 놓으신 다음 통일된 정경으로 모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쓰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추상적 역사관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자료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태도이다.
말씀 계시는 역사 안에서 발생한 구속적 사건들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말씀계시는 노아의 사건, 아브라함의 불러냄, 출애굽의 사건, 이스라엘의 왕조, 이스라엘의 귀양과 귀환 등과 연관 되어있다. 그리고 말씀계시는 그리스도의 강림, 십자가 수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 되어있다.
예수님 이전의 구속적 성취는 성전 재건이 중요한 사건이다. 이 기간 동안 말씀계시가 풍요하게 나타난다. 말라기, 스가랴, 학개가 성전 재건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성전 재건 이후 약 400년 동안 예수님의 새로운 구속적, 계시적 행위가 있을 때까지 조용한 기간이 뒤따른다. 그리고 신약의 계시는 예수님의 강림, 십자가 수난, 부활을 중심으로 기록된다.
신약은 이제 특별한 한 사건만이 구속 사건(재림)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신약의 성도들은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 1:10)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 계시를 주신 후에 계시의 역사는 조용한 기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특별계시는 역사적 과정으로 발생했다. 구약도 역사적 과정으로 기록되었고, 신약도 역사적 과정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종점에 도달한 것이다(히 1:1~2).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특별계시, 역사적 과정, 종말, 그리스도를 함께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특별계시를 말씀과 사건의 관계, 그리스도 사건의 세기적인 특성, 그리고 계시의 언약적인 특성을 함께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승귀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이래 계시가 멈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때로부터 특히 그리스도의 승귀로부터 그가 다시 재림할 때까지(고전 1:17) 계시의 역사를 종결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 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 점진적으로 적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계시의 종료는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사역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단회적인 특성을 포기하면, 특별계시의 종료를 주장하는 입장에 문제가 생기며, 특별계시의 종료를 양보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단회적 특성에 큰 타격을 받게되는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라는 말도 신약 성경의 완성과 종료를 뒷받침해 준다(엡 2:20). 바울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제한된 의미로 12사도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영감 받은 사람들로 신적 권위를 소유한 계시의 전달자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시사 그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권위를 부여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사역을 친히 듣고 목격해야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 1장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택할 때 제시된 “사도의 자격”이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요,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행 1:21~22). 이와 같은 자격은 대단히 중요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신약 계시가 기록되기 이전까지 예수님의 교훈과 사역을 가르쳐야 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가르침은 신약 성경으로 기록되어졌다. 선지자들도 사도들과 교제하면서 영감 받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들의 교훈 역시 신약 성경으로 기록되어진 것이다. 바울이 엡 2:20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모두 가르치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롬 15:20 참조). 살몬드(Salmond)는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기초로 이해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가장 좋은 것 같다. 그 기초 위에 그들의 회심자들이 영적인 집으로 지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은 곧 신약 성경이며 따라서 교회는 신약 성경을 기초하여 세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건물의 기초가 일단 놓여지고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지면 기초를 함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약이라는 교회의 기초도 어떤 누구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고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로서의 신약은 완성되어지고 종료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과 특별계시의 종료가 무슨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신약 계시를 종료시키시되 바로 그 신약계시 안에 앞으로 특별한 구속적 사건이 하나 남아 있다고 전하신다. 즉, 앞으로 남아 있는 구속적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신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을 통해 신약계시를 기록하면서 그 계시 안에 구속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 되는 예수님의 재림과 그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계시해 주신 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의 승귀 이후 사도들을 터로 삼아 신약 교회를 설립하시고 그 교회에게 예수님 재림 때까지의 사역을 맡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계시는 객관적이며 공적인 신구약 계시 이외의 다른 계시가 필요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예수님 재림의 사건을 신약계시 속에 예언해 두시므로 더이상 예언적 성격의 계시를 교회에 주시지 않을 것을 암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공적인 계시만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현재 우리 앞에 충분한 계시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의 삶에 필요한 모든 계시를 신약 성경 속에 담아 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개개인에게 주신 사적인 계시에 의존하여 재림 때까지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요, 공적인 계시인 신약 성경에 의존하여 살도록 계획해 주셨다.
계시가 계속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계시에 대한 이중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은 한편으로 정경적이고 구속적인 계시를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인 신자나 그룹을 위해 계속적으로 사적인 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교회를 위한 계시와 사적으로 개인을 위한 계시의 구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시에 대한 이중적인 견해는 성경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계시와 구원에 필요하지 않은 계시를 나누어 인간에게 주시지 않는다. 구원은 신자의 생애의 어떤 한 부분만 상관하지 않고 신자 생애의 전체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의 생애에는 구원과 관련 없는 사적인 계시가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초를 놓으실 때 그리고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던 예언의 은사는(행 21:4~14, 빌립의 딸들의 예언)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언이 계속 존재한다고 하기보다는 완성된 말씀의 해석에 의해 교회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현재의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들, 즉 치유의 은사, 다스리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고전 12:28~30), 가르치는 은사, 권면의 은사, 구제의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롬 12:6~8), 복음 전하는 은사, 목사와 교사(엡 4:11) 등의 성령의 은사는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약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이전에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에게 주셨던 특별한 성령의 은사와 신약의 교회가 튼튼히 선 다음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성령의 은사 사이에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다.
3. 목회서신에 언급된 성령의 사역의 의의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과 은사의 계속성을 고찰할 때 목회서신에 언급된 성령의 사역을 연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목회서신의 교훈을 통해 바울 사도 이후 교회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후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에 대해 교훈하는 말씀을 목회서신에 쓴다.
디모데의 목회는 비록 바울이 설립했지만(에베소 교회), 바울이 없는 상황에서 목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도의 경우도 바울이 없는 상황에서 디도가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보살피는 것이다(딛 1:5).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신 사도들이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교회의 삶의 단면들을 목회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사역의 면면들과 같은 성령이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를 지도해 나가는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1) 목회서신에 묘사된 교회의 모습은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다.“율법은 선한 것”(딤전 1:8),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딤전 1:10), “예언을 따라”(딤전 1:18),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딤전 4:5),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딤전 4:6), “예언으로 말미암아”(딤전 4:1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딤후 2: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 1:9),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딛 2:1) 등을 들 수 있다.
목회서신에서 계시의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들을 통해 나타났던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에 의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2) 목회서신에 묘사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언이나 방언이나 특별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요 일상 생활에서 집안 사람의 칭찬과 교회의 칭찬과 불신자들의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딤전 3:1~13; 딛 1:5~9).감독의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는”(딤전 3:2) 것이다. 본문은 감독의 자격 중 갖추어야 할 7가지 자격을 제시한다. 갖추어야 할 7가지 자격은 ①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며, ② 결혼생활이 건전해야 하며, ③ 삶의 방식이 온건하고, ④ 건전한 마음의 사람이어야 하고,⑤ 일반적으로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하며, ⑥ 손님을 잘 대접해야하고, 그리고 ⑦ 가르치기를 잘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7가지의 감독의 자격이나 그 뒤에 따라 나오는 감독이 조심해야 할 7가지 특성들은(딤전 3:3~4) 모두 일상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3) 목회서신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딤전 1:5, 19), “경건”(딤전 1:9; 2:2; 4:8; 딤후 3:5, 12; 딛 2:12), “기도”(딤전 2:1, 8; 4:5), “사랑과 믿음과 정절”(딤전 4:12; 5:12; 6:5, 11), “믿음과 사랑”(딤후 1:13), “겸손”(딤전 1:15), “고난”(딤후 2:2; 3:11) 등이다.
(4) 바울 사도가 마지막으로 쓴 서신인 디모데후서에서 왜 성경 영감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가(딤후 3:14~17), 이 말씀은 계속되는 교회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객관적 계시의 말씀에 의존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5) 바울 사도는 디도서에서 “성령의 사역”을 다음 맥락(딛 3:5,6)에서 언급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하려 하심이라”(딛 3:5~7). 본문의 성령의 사역은 성령의 이적적인 외적 역사를 가리키지 않고, 성도안에 역사하셔서 중생의 체험을 하게 하는 사역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외적이며 동적인 사역을 강조하지 않고 내적이며 정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사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교회를 튼튼히 세워 나가실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회서신에 묘사된 교회의 삶의 모습에서 사도들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보다는 정적인 특성들을 찾아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교회의 기초를 놓게 하신 사도들 이후의 교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교회가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만 주셨던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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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연구에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 차원에서 볼 사건이 아니요, 구속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사건임을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연구할 때 성경을 떠나서는 바른 접근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항상 주관적이 되고져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교회에 주신 객관적인 계시에 의존하여 신학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위해 66권의 계시만 주셨다.
본 논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오순절 사건, 교회 설립, 재림 등 하나님의 구속 역사 진행을 근거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고져 노력했다. 그리고 본 논문은 신약 계시를 주신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구속 성취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가르치는데로 하나님께서 어떤 성령의 은사를 멈추게 하시고, 다른 성령의 은사는 계속되게 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신학 작업을 할 때 항상 겸손해야 한다. 겸손의 미덕은 교회를 세우지만 교만은 교회를 헐어 뜯는다.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은 교회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역사하신다(엡 4:3). 바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단계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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