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며
성경의 율법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한 편으로는 예전적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자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적) 율법주의자들과 율법폐기론자들을 경계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성경의 율법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한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위조 지폐를 가려낼 때도 위조 지폐를 많이 연구하기 보다는 진짜 지폐를 많이 보면, 위조 지폐를 가려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의 양 극단적인 입장을 경계하기 이전에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가 성립된다고 봅니다.
율법을 다루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은 1. 율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2. 율법의 구성에 대하여 3. 율법의 기능 4.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 5.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적 여유를 내기가 쉽지 않아서 간략하게 정리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율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우리는 율법이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접하곤 합니다. 칭의를 고려하는 구절들을 대할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반면, 율법을 너무나도 강조하는 듯 보이는 성경구절들도 있습니다. 특히 성화와 관련되어 있는 삶의 규범이 되는 율법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거나, 율법을 마치 구원의 조건이 되기나 한 양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즉, 칭의이며, 다른 하나는 성화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살아난 자가 온전케 되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살아난 자가 온전케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역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전케 된다는 말을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행위의 변화 이전에 존재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성경의 기록목적은 크게 두 가지 '구원과 성화'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문맥이 칭의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성화에 관한 것인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고 구원의 열매로서의 삶에 있어서 삶의 규범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율법의 구성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율법이라고 싸잡아서 말합니다만, 일반적인 율법 이해는 율법이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의식법은 주로 제사법 등과 관련되어 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상징적인 혹은 예표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특정한 신정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율법을 말합니다. 현대에 시민법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렉 반센, 루사스 러쉬 두니, 게리 노스와 같은 신율주의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시민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으로서 일반 자연인의 법보다 우월함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며, 현대에 있어서 시민법의 문자적인 적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황금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율주의자들 중에는 코넬리우스 반틸의 제자들의 입장인데, 그들은 반틸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면, 기독교 윤리학적으로 발생되는 문제-moral principles와 moral skills의 문제-와도 연관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여기서 깊이 다룰 필요는 없다고 여겨져서 생략합니다.) 시민법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일반적인 이해는 시민법은 문자적으로 지켜질 필요는 없으며, 그러나 시민법에 대한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도덕법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덕법의 대표적인 예로는 십계명, 사랑의 대강령, 황금률, 산상수훈 등이 있습니다. 도덕법은 당연히 현대에 있어서도 문자적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차원에서 지켜져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율법이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될 수 없으나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 삶의 규범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3.율법의 기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는 흔히 제1,2,3용법을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에 따라 제1용법와 제2용법에 대해서는 순서가 바뀌어 제시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1용법은 신학적인 용법으로서 죄인인 인간을 정죄하여 그로 하여금 절망케 함으로-신학적 의미에서의 절망-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울'의 용도로서 작용합니다. 제2용법은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인간간의 죄를 억제케 하여 시민적 의를 행사하게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인간을 보호하는 방화벽'의 용도로서 작용합니다. 제3용법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의 '감사의 척도'로서 작용합니다. 루터를 비롯한 루터파에게 있어선 일반적으로 제1용법이 더 강조되지만,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제3용법이 더욱 본질적입니다.(물론, 루터파 중에서도 제3용법을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들의 공식적인 입장에 가까운 것은 제3용법을 말하지 않고, 제1용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제3용법 즉, 감사의 척도로서의 삶의 규범이 되는 율법은 성도의 성화적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한 해설은 '다우마의 개혁주의 윤리학'의 견해를 들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4.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자유의 율법이다!
우리는 흔히 율법이 속박과 금지의 명령을 통해 우리의 삶을 제한하는 것을 자유가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항하여 '제한 없는 자유'가 올바른 자유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현대는 율법주의 성향도 있겠지만, 율법폐기론적 성향이 짙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떠해야 할까요? 혹자는 삶의 규범이 되는 율법을 고려함에 있어서 '문과 담장'의 비유, '물과 물고기'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율법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울타리를 치고, 물을 떠나서 살지 말라는 것을 말합니다. 담장을 치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고, 물고기에게 물을 떠나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을 떠난 물고기는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제한과 한계가 있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율법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마음껏 날 수 있는 푸른 창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답합니다. 애굽의 옛 풍속을 좋지 말고, 너희가 들어갈 가나안 땅의 풍속도 좋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문제는 사실 율법의 문제만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바르게 파악되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율법과 복음의 관계: 구원사적이면서도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접근
구원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통시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구원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개인구원론 차원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려하여 공시적이고 현재적인 시각에서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유비가 사용됩니다. 구원사적인 접근과 관련하여 '언약과 성취'의 유비를 말할 수 있고, 구원론적인 접근과 관련하여 '그림자와 실체'의 유비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구약에는 언약만 있고 성취의 역사는 없다든지, 그림자만 있고 실체는 없다든지 하는 세대주의적 이해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입니다.)
결론: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구원사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파악한다면, 복음이란 '율법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자로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반면, 구원론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파악한다면, 복음이란 실체 그 자체로서 파악되며, 그리스도는 의의 전가자로써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수납'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경험한 사람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성화적 삶에 있어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임을 분명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이 구원과 성화라고 하는 사실을 알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살아난 자가 온전케 되기를 누구보다 열망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알 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회복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보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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