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스크랩] 율법을 사랑하는 자유에 대하여

baromi 2008. 5. 26. 22:01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두말할 가치도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구원 그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심비에 새져진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으니 이제 구약의 도덕법은 거기에 녹아져 있으니 볼 필요도 없다는 주장과 그 성령의 법을 따름에 지침서인  계명의 기초인 구약의 도덕법을 보면서 신구약 모든 말씀에 순종할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양분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서 복음을, 복음 속에서 율법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해야 한다는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율법이 곧 복음이라는 식의 이해입니다. 물론, 율법 그 자체로서는 '죽이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율법이 성령으로 인하여 사용될 때에 그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율법이 어떻게 죽이는 의문이 되었느냐 하면, 성령없이, 그리스도없이 사용되고,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고, 성령에 의해서 활용될 때에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고, 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좌표이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같은 이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으로 잘 정리하였습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돌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 바로 '성령의 법'이요, '생명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그 자체가 복음이라는 견해와 일치됩니다. 물론, 구약의 의식법들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이런 오해는 절대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소위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분들의 오류가 바로, 율법의 복음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성령의 법은, 결코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기록된 율법의 '정신'과 '영'을 깨닫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행하게 하시는 이,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을 '성령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상의 면에서 볼 때, '모세의 법'과 '성령의 법'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같은 것이면서 또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도 도덕법을 따를려고하는데 하물며 성령안에 있는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도덕법이 왜 지침서가 되는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바라보는 말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비신앙인의 시각 바라보면, 그것을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보면 구원 얻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한일에 대하여 항상 무익한 종으로서의 자기 성찰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의로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임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4)”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사실 본문은 ‘...이루라’(work)가 아니고 ‘...이루어 가라’(work out)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는 복합 동사를 사용하여 목표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이 말은 분명히 성도가 달성해야할 성도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목표요 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성도가 주도적으로 움직여 할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주체는 분명히 자신인데, 사실은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인 것입니다.
또 이글에 구원에 인간의 노력이 첨가된다고 주장하는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의 당연한 책임이며 의무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비로소 안식을 누리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새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4~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성령께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 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성한 이후로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도구로 존재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 중에 신자들에게 폐해진 것은  정죄하는 기능입니다.
즉 죄 지은 이의 양심을 찌르고 저주하는 일이  중단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불신자나  자기의 힘으로 신자노릇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정죄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보여 주는 모범입니다.
신자들이 행할 의가 율법과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의의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면의 표준은 여전히 율법 하나뿐이고
그것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것의 완전성은
우리가 평생토록 추구할 목표를 보여 줍니다.(12 15) (교회사 김기홍교수님의 글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 부분입니다.
첫째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입니다.
그것은 칭의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둘째 자유는 .이제는 율법을 사랑하며  순종할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뛰어다니길 싫어합니다.
그럴 힘도 업지요 마찬가지로  죄인은 혹시 의를 원해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은
일어나 활동할 자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라보면서  점점 더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전에는 의무감으로 할 수 없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이제는 자진해서 행합니다.
좋은 두려움으로 주인의 일을 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기업이 자기 것이므로
기쁨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합니다.

셋째는 무해 무익한 것에 대한 자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의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그것들에 사로잡혀서 우상 섬기듯이 하지 않는 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해도 유익도 아닌  단지 하나님을 얻기에 이용할 대상인 줄을 알고
빠지지 않으면 됩니다

 

.

저의 이 신학사상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신학사상을 초월하셔서 오늘도 사랑으로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는 다 표현할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글은 홀리죠이님의 자문을 구하여  쓴글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