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제도 (창세기 2장 22~24절)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말씀(창 2:18)은 이제 그분께서 남자와 여자를 혼인으로 결합시키면서 실제로 인준됩니다. 이 사항은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인 바, 하나님께서 결혼의 창시자이심을 앎으로써 혼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도록 하고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존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애써 결혼을 깎아내리는지를 보며, 교황들이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엄청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육체의 부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결혼에 적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만일 기록된 자료들이 입증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도처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입니다. 사실 그들은 정절이 소중한 미덕임을 입증하기 위해 육체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합니다.1
이것은 마치 결혼한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치욕은 인간들에게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결혼을 창설하신 하나님께도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결혼이 인정돼야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소송에 소환해 엄청난 악을 세상에 도입한 죄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한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을 닫기나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정절을 인정하고 정도 이상으로 그것을 칭송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독신이라 부르는 것 즉 사제와 수사와 수녀로서 결혼하지 않는 문제입니다.2 그런데 이런 신분과 참된 정절3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기로, 매우 부정하고 추잡하게 방탕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은 타인들보다 탁월해 마치 천사의 신분과도 같음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리되어 있으며 결혼을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서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제도
- 금욕/독신을 가장한 우월주의도, 방탕도 설 자리가 없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여자를 정해주셨다고 기록된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통해 입증되는 바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혼인의 창설자가 되심으로써 혼인을 영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신분 제도를 세우셨음을 알고 전적으로 순전히 행해야 합니다. 혼인을 더럽히고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바르게 화합하여 살지 않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거룩한 유대를 와해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길게 다뤄질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이 판결을 통해 혼인이 하나님에게서 기인했은즉 그것을 영예롭게 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자신을 유지하며 화평과 연합해 살며 온전한 성실을 간직하도록 권면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혼인은 모든 호색 및 방탕과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임한 아담의 타락과 부패 이후에도, 이 처방을 남녀에게 주신 데에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배우는 남녀의 창조
이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그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가 주해한 바와 같이 ‘남자의 여자’(hommasse)4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와가 자신의 실체에서 창조되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비뼈 중 하나를 꺼내 그걸로 여자를 만들었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내리는 해석을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아담은 너무 예민하고 날카로워서, 비록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5 하지만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밝혀주셨다고 봅니다. 실제로 하와가 아담의 몸에서 취해졌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한 육체와도 같음을 알 정도로 하나가 되는 목적 외에 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전 설교에서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하와를 흙으로 만들 수도 있었고, 원하셨을 경우에 무에서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남자의 몸에서 그녀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혼인에서 있어야 할 결합이 보다 거룩하도록, 불가침한 것으로 지켜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교훈이 없다면 사실 자체는 무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취하신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자신의 공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결론을 지읍시다.
실제로 우리를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 받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판단과 분별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여기서 아담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과 부합합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첫 조상의 본을 따라 하나님께서 선하고 바르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어떤 반론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따라야 하고 반역해서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차후에 언급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참된 완전이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이 그분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분을 선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그에게 적합한 도우미를 만들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담이 ‘이런 방식이군요’6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은택을 깨닫고 ‘이런 방식이군요’라고 부언하는 바, 이것은 그의 신분의 참된 완전이요 완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지배나 모든 피조물들의 사용이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이런 지배에, 창 2:19~20) 앞서 선포하셨습니다(창 2:18). 여기서 아담은 그것을 인정하고 마치 ‘아멘’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신 것을 수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합당하게 누리고자 할진대,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즉 무슨 목적으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고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와 의를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을 이용할 줄 알도록 말입니다.
2.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1) 결혼의 이미지 - 부부의 연합 및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짐승들이 반려자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본질에 속한 여자가 주어져야 함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적용됩니다. 성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증거하듯이 말입니다. 그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본래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비유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남녀를 만드셨을 때, 남자와 여자에게 일어난 것이 오늘날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서 완성된다고 말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치 그분의 뼈 중의 뼈인 것과 같은 연합으로 그분과 결합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담의 씨에 속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분께서 우리의 육신을 입고 우리의 본성을 취했을 때 우리의 형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기선 일상 생활의 문제가 아니기에 우리가 영을 좇아 육신에서 나온 것과 같은데,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살의 양식과 생명을 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불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기어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과 그분의 능력으로 소생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뤄지는 방식은 그분의 육신이 우리의 육신과 결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을 통해서입니다.
어쨌든 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도들 사이에 있어야 할 연합의 이미지와 모형을 간직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본질에서 취하시고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게 하셨을 때 여자가 존중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속하는 고상한 영예로 승화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충만)이라고 말합니다.7 그리스도가 본래 완전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다른 이에게서 무엇을 빌려와야 하나요?
여기서 문제는 그분의 존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영예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모두 모으고 그분의 모든 복에 참여케 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준비한 하늘의 생명과 영광을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마치 그분께서 자신의 절반과도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2) ‘아담의 용어’ 사용 - 부부의 결합을 지키는 것
나아가 우리 조상 아담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가 온전한 상태로 있으면서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던 시기의 언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입으로 남편과 아내가 연합해 상호 화평과 우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각자가 자신의 관습에 대해 스승과 박사가 되어 자신의 의무를 다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판결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종종 부부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남편이 무슨 유감스런 일로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내게 괴롭고 슬퍼하는 아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사탄의 다른 난관이 있을 경우,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튼 나의 반려자가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본질에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쓸데없지 않으며, 그분은 나로 하여금 그녀가 나의 절반임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나와 결혼한 아내는 나의 본질에서 취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편에서 일어날 수 있을 시험들을 견뎌내고 모든 정열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이혼을 하겠다고 미쳐 날뛰어선 안 되고 오히려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결합시킨 이상 나는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의 편에서도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마치 주인과 살듯이 화평과 우정과 절제로 살아야 하며, 자신이 그에게서 취해졌으므로 채무 관계임을 알아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무에 전념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 판결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라고 덧붙이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라”8고 덧붙이십니다.
3. 부부 관계와 부자 관계
(1) 부자 관계보다 앞설 만큼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결혼 관계
나아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기록된 것은 결혼이 하나님께 속한 또 다른 유대를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버지가 자녀를 자신의 피처럼 사랑하고 자녀가 그들에게 생명을 준 사람들로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유대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작품에 아름다운 조화가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어떤 변화와 대립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의무와 자녀가 부모에게 가져야 할 결속을 깨뜨리거나 폐기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한다는 것은 어떤 말씀인가요? 이것은 비교를 통해서 이해됩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복음 때문에, 부모와 처자와 소유 전체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9고 말씀하실 때처럼, 아내보다 차라리 부모를 떠나야 하리라는 말입니다.
물론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양립 불가가 아니며, 모두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진리를 유지하려는 열정을 가지는 동안, 필요할 경우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대로 이것은 순서상의 비교를 통해 이해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의 교리를 지키고 신앙을 고백하는 문제에서 처자나 부모를 내세우는 것이 아무런 핑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고려하여 ‘나는 죽음의 위험에 처할 것인데, 이제 나의 아내는 과부로 남을 것이다. 나의 자녀를 고아로 남겨둘 것이다. 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내게 부친도 계시고 나는 그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으며, 태생적으로 그에게 빚이 있다”며 이 모든 것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너무도 하찮은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적인 고려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더 좋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부모에게서 사라져 아내와 연합해야 할 경우, 후자를 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양립이 가능합니다. 즉 남자가 아내와 평화로이 살며 둘이 한 육체임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는 부모를 존경하고 그들을 도우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병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인의 연합을 명하셨을 때 자녀와 부모 사이에 불화를 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와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밀접하고 거룩한 유대임을 밝히고자 하신 것임에 주의합시다.
그런데 신중히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부부 관계가 화평과 일치 가운데 유지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개와 고양이와도 같습니다. 비록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방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자들은 매우 적습니다. 물론 모든 남편들이 아내들을 독살해 죽이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아내들이 남편들의 죽음을 계획하진 않을 것입니다. 때로 필요 이상으로 그런 괴물들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10
하나님께서 인류를 굴레로 묶어 그런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아내를 조금도 못 견디게 하며, 설령 그녀가 괴롭고 슬퍼해도 날마다 이혼하고자 할 것입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생활 습관을 따를 수 없을 때 즉시 떠나고자 할 것입니다. 이로부터 저주와 싸움과 논쟁이 뒤따릅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화나게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그녀를 자극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경우, 그는 기어이 그렇게 하고 말 것입니다. 아내 역시 온갖 악한 계획을 짜서 남편을 괴롭히고 슬프게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악마는 그들을 지배하여 본성에 반하는 무서운 혼동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기록된 가르침을 더욱 실천해야 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그것이 모든 공정함과 생래적 정직함에 어긋나기 때문에 적법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내보다 차라리 부모를 떠나야 하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우리가 이미 끌어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론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라”는 말씀 말입니다.
(2) 결혼 관계 유지 -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
설령 우리가 이 원칙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남편과 아내가 하나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제도는 너무도 종종 이런 식으로 바뀌고 침해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짝지었다’고 기록된 이상, 우리에게 약간의 경건이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점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사역을 폐기하지 않으며 그분께서 세우신 것을 파괴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그분과 전쟁을 꾀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와 결합시켰다고 명백히 기록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의 제도가 어떤 것인지 분별하게 하고, 설령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을 스캔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권위를 그분께 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남자가 아내의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때로 모종의 미친 사랑에 빠지며, 아내가 방탕 욕구에 따라 이 사람 저 사람 갖기를 원하는 것처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이 그들의 탐욕으로 방황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열중하는 감각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합시키셨다고 기록돼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거룩한 불가침의 연합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까닭 없이 이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경우, 그는 아내를 집에서 내쫓아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지할 수 없는 큰 악이지만, 질서 상 법적으로 용납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강퍅함과 고집 때문에 그런 방종을 내버려두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두 배로 정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남편이 아내에게 증서를 써줘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11 이렇게 해서 남편은 정죄를 면했습니다. 아무튼 우리 주 예수께서 입증하시는 바는, 그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 없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런 비열한 짓을 허락하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간음한 자요,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소속될 수 없고 자신의 남편과 혼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2
(3) 일부다처제 -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님
이것은 다처제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동방 지역에서 이것의 남용이 지나치게 편만한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했을 때처럼, 족장들의 본을 따라 다처제가 자신들에게 허용되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만족하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심각한 잘못입니다. 비록 그가 모든 성도들의 조상이지만 말입니다. 야곱이 네 명의 아내를 가진 것은 더 심한 경우입니다. 이것은 일부 실수로 이뤄졌습니다. 그는 라헬과 약속을 했는데 레아가 그를 속였으며, 심지어 그의 아내들이 그로 하여금 억지로 다른 여자들을 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13 이것은 혼인이 위반된 방식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승인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본을 따르는 것이 잘못임을 봅니다.14
성자들이 우리에게 공통적이어야 할 규칙을 따른 것처럼, 그들의 모범이 우리를 도와야 하며 바르게 행하도록 우리를 찌르는 가시와도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행한 것을 취하고자 할 경우, 이것저것 무차별하게 그들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적법한 경우가 아닌 쾌락으로 이뤄지는 이혼과 다처제를 비난하면서 본래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마 19:8). 그분께서 ‘처음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혼인에 대해 진술하신 것은 오류 없는 규칙으로 여겨야 하며, 세상 끝까지 그 효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제도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의 규칙을 얻을까요? 그러므로 사람들이 제아무리 바꿔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주목해야 하며, 그분의 명령이 지속되어야 하며, 침해될 수 없는 그분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설령 사람들이 변덕과 경박함으로 나날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4) 늘 되새겨야 할 결혼의 교리 - 결혼의 원수 마귀
그런데 혼인에 대해 기록된 내용은 더욱 멀리 확산됩니다. 이 교리가 매우 필요하며 밤낮으로 묵상하기에 합당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마귀가 끊임없이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포기하게 하며 서로 간직해야 할 애정과 우정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결혼의 원수요 혼란과 불화를 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 그가 이렇게 맞대놓고 싸우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는지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교훈을 덧붙여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두 가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1)우리는 인간들이 행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2)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따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번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바른 길에 있다고 하더라도 때로 길을 잘못 들거나 헛디디지 않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예를 핑계로 삼을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할 것입니다. 이런 핑계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온 세상이 반대로 갈 때 우리가 방탕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온갖 스캔들들에 눈을 감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시다. 나아가 누군가 오랜 시간의 관습을 주장하고 옛 전통을 내세울지라도,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15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판결로 되돌아갑시다. 누군가가 ‘좋소, 하지만 그것은 1,500년 동안 실천된 이론이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규례와 그분의 의지에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시지 않았을진대, 인간들이 반대로 행해선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단 말씀하신 것은 남아있어 지속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와 하늘과 땅과 그밖에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해(年)와 계절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16 이 진리가 확고하고 불가침한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바람에 흔들리고 휘어지는 갈대처럼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의 규칙을 주셨음을 알아야 하며 이 규칙을 끝까지 준수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구절에서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설령 모세가 둘이 한 몸을 이루리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둘이나 세 명의 도우미가 아니라 하나의 도우미를 창조하신 사실입니다. 하나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 바울도 우리가 처해 있는 이 부패 때문에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17고 명백히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결혼을 부패시키는 무질서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은 일종의 간음입니다. 비록 이 일이 다윗에게서처럼 거룩한 족장들에게도 발생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권위는 무오하게 남아 있어야 하며, 제아무리 천사처럼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이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이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4. 벌거벗음과 가림의 기원
(1) 벌거벗은 아름다움 - 본래 하나님의 창조 형상
이제 모세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사실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설령 남자가 혼자 있어도 무슨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선 자신을 바라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욕스럽게 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악당이 낙인을 달고 다닐 때처럼, 도둑이 귀가 잘리고 이마에 낙인이 찍힐 때처럼 말입니다.18 이것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마치 진흙탕에 던져놓았거나, 아니면 우리 안에 그런 수치심을 놓아두셨음을 깨달읍시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분명 부끄러우며, 우리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비난과 수치를 분명히 느낀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이렇게 기록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처음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우리 조상이 넘어지고 우리를 동일한 멸망으로 끌어들인 이후 갖게 된 비참한 상태와 이전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물론 모세는 그들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한 이유가 어디서 오는지, 수치를 깨닫고 덮어 가리고자 한 이유가 어디서 오는지를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다음 장에서 다룰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것이 처음에 없었음이 우리에게 알려져 하나님의 창조와 조상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생긴 악 사이를 구분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나귀와 소와 다른 모든 짐승들을 볼 때, 그들의 벗었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광경을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우리 안에 두신 수치심을 증대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짐승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는 바, 이것이 그들의 상태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수치심으로 짐승들을 치욕스럽게 하시지 않았으며 그들의 몸에 그런 치욕을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부 중에 죄를 느끼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특히 로마서 8장 1~11절에서 다루고 있듯이 말입니다. 어쨌든 짐승들이 입증하는 바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바라보지도, 세상에서 보이기에도 합당치 않으며 그분의 피조물 대열에 들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채, 마치 감춰진 모습으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모세는 처음 창조 때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벌거벗음이 결코 수치를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을 뻔뻔함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짐승으로 만들고 남녀가 난잡하게 벌거벗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비열함이 짐승보다 더하지만,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만일 금지와 처벌이 없다면 자신을 전라로 드러내는 식으로 짐승이 되고 모든 수치심을 던져버리고 마치 볼거리에 자신을 맡기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담과 하와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성실한 것과 비열한 것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뻔뻔했다거나 방탕했음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수치심이 없는 상태로 있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이 그들의 몸에 비취는 상태로 그들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고 창조된 그들의 영혼의 처소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몸에서 하나님의 예술을 보는 바,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찬양하게 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몸에 너무도 충만히 드러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만들면서, 우리가 말한19 그의 지혜를 어떻게 전개시키셨는지 볼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할 정도입니다.
(2) 벌거벗은 부끄러움 - 타락 후 절제를 위해 가려야 할 수치
이제 우리는 감춰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에 기인하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죄가 너무도 인간을 훼손시키고 부패시켜서 인간은 그 낙인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무절제도 없었습니다. 수치심의 일부가 거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한 대로,20 죄는 영혼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했듯이, 영혼이 하나님의 의를 지향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그분의 형상을 새겼음을 볼 수 있었듯이 몸도 마찬가지였으며 오늘날과 같은 무절제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부패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너무도 부패해 눈을 뜨자마자 모종의 헛됨에서 헤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귀는 너무도 가벼워 듣는 것이 온갖 죄악의 메시지일 정도입니다. 우리의 손은 악에 너무 능숙합니다. 우리의 발은 피 흘리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행하기 위해 엄청 잔인하게 달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각이 부패된 방식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먹지 않고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신 고기를 맛볼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패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전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나아가 우리의 쓰레기와 오물로 모든 것을 오염시킵니다. 특히 무절제는 오늘날 인간들이 얼마나 첫 창조에서 멀어졌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에는 그들의 영혼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의 증거가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수치심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예로웠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수치심이 없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안에 악이나 악덕이 있을 경우에 우리는 머리에 정죄를 받아야 하며,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듯이 하나님을 끌어들여선 안 됩니다. 이것이 모세가 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악이 확인될 때면 언제나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연루돼, 우리가 받아 마땅한 정죄에 대해 전부가 아니라면 최소한 부분이라도 하나님께서 짊어지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되는 법을 배우도록 하려는 이유에서 아담과 하와는 주어진 상태, 즉 부끄럽지 않은 처음 창조의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나무 및 식물 등 기타 모든 것에서 만드신 것을 좋게 여기셨을진대, 남자와 여자의 경우에 더욱 위대한 완전함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면, 남자나 여자에게 치욕이나 수치가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편에 창조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이 처음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제 수치의 낙인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한숨짓게 하고 신음하게 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맺는 말
이처럼 모세는 만일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복을 누릴 수 있었다면, 그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큰 행복, 우리도 참여했을 큰 행복은 이젠 없다고 완벽히 밝혀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숱한 비참함과 빈곤에 처할 때, 우리의 몸에 수치심과 비열함밖에 없을 때, 우리의 영혼에 온갖 죄악의 끔찍한 혼란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투덜거릴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무엇이며, 심지어 모든 피조물이 우리와 전쟁을 하고자 무장하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녀의 경우, 둘이 서로 결합하는 대신에, 남자가 머리가 되고 여자가 도우미가 되어 온전히 섬길 준비가 되는 대신에, 한쪽이 다른 쪽의 눈을 파내고자 할 정도의 혼동이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첫 조상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고려한다면 이것은 항상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분의 바람직한 것의 완성을 주셨을 때 아담의 고백 역시 모든 반론을 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와 주변에 있는 숱한 비참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겸손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 모든 것이 우리 조상의 타락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이제 선하신 하나님의 존엄 앞에 부복하여 우리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느끼되 우리 자신을 싫어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그분의 의를 바라볼 정도로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그분에게서 멀어졌는지 깨닮으로써,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갈 참된 방법이란 그분의 거룩한 뜻에 결합되는 것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서 유익을 얻는 은총을 베푸셔서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을 구별하여 그것을 온전히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의 공상이나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 제시하는 본을 따라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으로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란 우리가 그분께 복종하는 것 외에 다른 이치나 사리분별이 없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뿐 아니라 땅의 모든 백성과 민족에게도 베푸시기를….
주(註)
1. 혼자 사는 신분 상태가 결혼한 신분 상태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이노센트 I세 이후 중세를 지배했으며, 트렌트공의회에서 재확인되었다.
2. 칼뱅은 「기독교 강요」Ⅵ, ⅶ, 23~28에서 사제들의 결혼을 비난한다.
3. “참된 정절이란 육체의 정숙함과 더불어 영혼의 순수함을 포함한다”(「기독교 강요」, Ⅱ, ⅷ, 43).
4. 이 프랑스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올리베탕이다.
5. 일례로 피코 델라 미란돌라.
6. 원문은 ‘voicy c'est ?ce coup.’ 한글 개역은 단지 ‘이는’이라고 돼 있음(창 2:23).
7. 엡 1:23.
8. 마 19:6.
9. 눅 14:26 참조.
10. 칼뱅은 남편을 독살한 유명한 인물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Lucr?e Borgia나 밀라노의 Caterina Sporza 등이다.
11. 신 24:1, 3.
12. 마 19:9 참조.
13. 창 30:3~13.
14. 이것은 뮌스터의 에피소드처럼, 구약의 본을 따르고자 한 심령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을 겨냥한 지적이다.
15. 마 19:8.
16. 사 40:8 참조.
17. 고전 7:2.
18. 칼뱅 당시 제네바에서도 도둑의 귀를 자르고 악당이나 시당국을 심하게 비난한 자들의 이마에 낙인을 찍는 일이 여전히 있었다. 칼뱅 당시 마지막 신체적 처벌은 아마 1554년 3월에 14번 도둑질한 Pierre Vincent de Regny의 경우다. 그는 오른 쪽 귀가 잘린 채 영원히 추방되었다.
19. 여섯 번째 설교 참조.
20. 열 번째 설교 참조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에서 펌.
'성경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우상]담무스 ,아세라 神 /펌 (0) | 2008.05.07 |
---|---|
[스크랩] 유대교 네 종파와 그 함정들/권요셉 (0) | 2008.05.02 |
[스크랩] 복음에 관한 오해(4)-순종과 율법주의/알버트 호오톤 (0) | 2008.04.30 |
[스크랩] 복음에 관한 오해(3)-구원의 경험/알버트 호오톤 (0) | 2008.04.30 |
[스크랩] 복음에 관한 오해(2)-구원의 믿음의 본질/ 알버트 호오톤 (0) | 2008.04.30 |